오늘 읽는 부분에서 암개미들이 결혼 비행(?) 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떼를 지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늘에 새 떼들이 이 암개미들을 상당부분 잡아먹기 때문에 그 비행의 생존율이 지극히 낮다고 한다.
본문에서는 ‘56호 암개미‘를 주인공으로 삼고 이 장면을 묘사하는데, 독자인 나는 이 ‘56호 암개미‘ 라는 것이 어떤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한 인간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경쟁을 뚫고 기어코 살아남아서 승자의 영광(?)을 누리는 뭐 그런 것 말이다.
이에 관한 얘기를 좀 더 보태보자면 위에서 언급한 암개미들을 잡아먹는 새 떼들은 인간의 성공을 방해하는 굳건한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여기 일일이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새 떼들은 굉장히 집요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암개미들을 자신들의 먹잇감으로 잡아먹는데,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어떤 선과 악의 구도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암개미가 선, 새 떼는 악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선은 악에 맞서 싸우지만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악에 굴복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악조건을 뚫어낸 선은 그 영광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것이다. 약간 종교적인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실제 본문에서도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 같은 것들을 만나볼 수 있었기에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이 딱히 못할 해석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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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읽다가 갑자기 개미가 아닌 거미 얘기가 잠깐 나온다. 근데 신기한 건 개미나 거미나 사람이나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점이었다. 저자의 관찰력과 세심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열 번째 떼 중에서 무사히 새 때를 빠져나온 암개미는 열네 마리이다. 그러나 56호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들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다. 이제 겨우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을 뿐이다. 더 힘겨운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56호는 자신의 미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대개 1천5백마리의 암개미가 날아오르면, 그 중에서 10마리 정도만 무사히 땅에 닿는다. 아무리 낙관적인 가정을 한다 하더라도 그 10마리 중에서 자신의 도시를 건설하고 여왕이 되는 개미는 4마리 정도일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푸르다! 땅 속의 삶밖에 모르던 개미에게는 공중을 비상하는 일이 너무나 황홀하다. 또다른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다.
56호는 하늘이 텅 비어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기는 커녕 공기의 흐름으로 가득 차 있다.
한 무리의 수개미들이 56호의 뒤를 쫓아오고 있다. 암개미 56호가 속력을 낸다. 가장 빠르고 가장 끈질긴 자들만 따라오라는 뜻이다. 보다 좋은 유전 형질을 골라내려는 일차적인 선별 방식이다.
곤충의 세계에서, 대개 수컷들은 교미를 하고 나면 죽게 되어 있다. 수개미들에게는 단 한 번의 사랑할 권리만 주어져 있다. 정자들이 수컷의 몸을 빠져나오면서 주인의 목숨도 앗아가는 것이다.
개미의 세계에서도 수컷은 사정을 하고 나면 죽는다. 어떤 곤충의 암컷은 제 몸에 정자가 가득 차면, 정자를 제공한 수컷을 죽여 버리기도 한다. 격한 감정 상태가 암컷의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곤충의 세계는 전체적으로 볼 때 암컷의 세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홀어미들의 세계이다. 수컷들은 부차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개미를 관찰해보면, 저 자신의 생존 요구에 행동하기보다는 외부의 요구에 따라 행동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개미 역시 외톨이로 살아갈 줄 안다. 겨레를 필요로 하지 않고, 겨레에 반역을 하기도 한다.
개미에게는 자신의 죽음이 그리 대단한 사건이 못 되는 것 같다. 즉,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일을 단념할 만큼 개체의 죽음이 그리 중요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샹트렐버섯 : 갓이 술잔처럼 생긴 식용버섯. <술잔>을 뜻하는 그리스어 kantharos 에서 유래한 말. 한국에서는 꾀꼬리버섯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뇌는 6백억개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 장치가 포화 상태가 되면, 가장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정보들을 지워버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조절이 된다. 그렇게 해서 충격적이었던 일에 대한 기억과 즐거웠던 일에 대한 아쉬움만이 남게 된다.
어떤 사회, 즉 수백만의 개체로 구성된 한 사회가 움직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게 하는 실험대상으로는 개미만 한 게 없지요. 개미들이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고 있어요. 개미들을 관찰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관찰하는 거나 다름이 없지요. 수백만 마리의 토끼나 생쥐가 어울려 사는 도시가 있다는 얘기는 아직 못들었어요.
전투를 겪고 나면 언제나 소중한 교훈들을 많이 얻게 마련이다.
공격해 오는 적이 성가시다가도, 막상 그 적이 사라지면 더 불안해지는 법이다.
인간의 두뇌와 개미집은 닮은 점이 있다. 둘 다 홀로그래피 방식으로 만들어 낸 입체상에 비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홀로그래피란 무엇인가? 레이저 광원에서 나온 간섭성 빛을 물체에 비추면 빛이 난반사되는데 그 빛을 모은 다음 일정한 각도에서 참조광을 비추면, 빛이 겹치면서 물체의 입체상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빛의 간섭 현상을 이용하여 입체상을 재현하는 기술을 홀로그래피라고 한다.
사실 그 입체상은 어디나 존재하면서 동시에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간섭성 빛이 모임으로써 다른 것, 즉 입체의 환영이라는 제3의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 두뇌에 있는 각각의 신경 단위, 개미집에 있는 각각의 개체는 저마다 정보를 통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의식, 즉 <입체적인 사고>가 나올 수 있으려면, 신경 단위가 모이고 개체가 모여서 집단을 형성해야 한다.
날아오르고 싶지만 아직 날개가 젖어있다. 기다려야 한다......
파리보다 더 청결한 게 무엇이 있을까? 파리는 끊임없이 제 몸을 씻는다. 그것은 다른 개체에 대한 의무 때문이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더듬이들과 낱눈들이 티 하나 없이 청결하지 않으면, 파리는 멀리있는 먹이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고, 자기를 죽이려고 덮쳐 오는 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 곤충의 세계에서 청결은 생존에 꼭 필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이다.
거미줄은 피브로인이라는 섬유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피브로인이 질기고 방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어떤 거미들은 먹이를 제대로 먹었을 때 지름 2마이크로미터의 실을 7백 미터나 뽑아낼 수 있다. 그 실은 같은 굵기의 나일론과 맞먹을 정도로 질기며 탄력성은 나일론의 세 배이다.
거미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일곱 개의 분비샘에서 각각 다른 실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즉, 그물의 테두리 줄을 만들기 위한 실, 퇴각 줄을 만들기 위한 실, 그물 가운뎃줄을 만들기 위한 실, 신속하게 먹이를 잡는 데 쓰이는 끈끈물이 묻어 있는 실, 알을 보호하기 위한 실, 은신처를 마련하기 위한 실, 먹이를 감싸기 위한 실 등이 있다.
거미가 뽑아내는 실은, 알고 보면 개미의 페로몬과 마찬가지로 호르몬의 연장선 위에 있다. 즉, 거미의 실은 호르몬이 실 모양으로 발전한 것이고, 개미의 페로몬은 호르몬이 기화하기 쉬운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거미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그물을 만든다. 이 세상에 똑같이 생긴 거미그물은 없다. 사람들의 지문이 똑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마른 실로 그물을 짤 때는 실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저 손님이 왔다 가듯 곤충들이 걸리지 않고 빠져나가 버릴 것이다.
시간이 꽤 걸리는 그 일을 하느라고 거미의 기력이 다 빠졌다. 거미는 당장 뭔가를 잡아먹어야 한다. 그건 하나의 악순환이다. 그물을 짓느라고 힘을 다 빼고는, 그 그물로 먹이를 잡아 허기를 메운다.
그물이 마이크 진동판처럼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덕분에, 거미는 눈이 여덟 개나 되면서도 눈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공간을 지각하며, 다리 사이에 지극히 미세한 공기의 파문이 일어도 그것을 감지한다.
거미에게는 이름이 없다. 독립생활을 하는 탓에 종족들끼리 서로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참고 기다리면 사냥물이 미쳐 날뛰면서 스스로 제 몸을 옭아맨다. 거미 세계의 철학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은 이런 것이다. <최상의 병법은 적이 제 풀에 쓰러질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리석은 곤충들은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이 스스로에게 가장 해롭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날개 달린 개미가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그물에 옭매인다. 그 와중에 그물이 망가져 거미를 언짢게 한다.
하얀 고치 안에서 태어나 이제 거미줄이 만든 하얀 고치 안에서 죽게 될 판이다.
거미는 먹이를 지나치게 칭칭 감는 법이 없다. 독이 든 실을 두 번 뱉어서 죽이지 않고 그냥 겁만 준다. 사실 거미류는 그물에 걸린 먹이를 바로 죽이지 않는다. 거미류는 살아있는 고기를 먹기 때문에, 사냥물을 죽이기보다는 마취 효과가 있는 독으로 혼절을 시킨 다음, 조금씩 갉아먹고 싶을 때만 깨우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미류는 아주 신선한 고기를 실로 싸서 감춰 놓고 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일주일 동안 신선한 맛을 유지할 수 있다.
하루뿐인 삶이 하루살이의 삶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허비하지 않고 바쁘게 살아야 하는 삶이다.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채우게 될까?
애벌레로 2년을 살고 나면 하루살이는 바로 자기 재생산을 하기 위해 암컷을 찾아 떠난다. 자식을 통해 불멸을 누리려는 덧없는 노력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단 하루의 삶을 하루살이는 교미의 상대를 찾는 데 바친다. 그래서 하루살이는 먹거나 쉴 생각을 안 하고 상대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루살이의 천적은 <시간>이다. 1초, 1초가 하루살이의 적이다. 거미가 무섭다 해도 <시간> 그 자체에 비하면, 단지 시간을 잠복시키는 요인일 뿐 온전한 의미에서의 적은 아니다.
거미그물에 걸린 하루살이는 제 몸속에서 노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느낀다. 몇 시간 후면 하루살이는 늙어 버릴 것이다. 이제 그 하루살이에게는 희망이 없다. 태어나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다.참담하게 실패한 삶이다.
마음의 한쪽에는 사회의 질서에 대한 갈망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또 한쪽에는 남의 의지에 따라 살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질서에 대한 갈망이 자유를 향한 욕망을 눌렀다. 그래서 그는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지금 공격해야 한다! 늑장을 부리면 부릴수록 저놈이 힘을 더 얻을 것이다!
어떤 적이든 약점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오로지 그 약한 부분만을 공격하라.
개미집에 다른 종이 섞여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미는 저마다 자기 도시의 고유한 냄새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만큼 그렇게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개미 세계에서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어떤 종이 도시 안에 게토와 같은 특별 보호 구역을 만들어 다른 종을 격리시키는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