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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님의 서재
  • 그림자 왕
  • 마자 멩기스테
  • 17,100원 (10%950)
  • 2025-05-09
  • : 2,075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스테르는 여자의 말에 격노한 나머지 그 기묘한 햇빛을 보지 못했지만 뭔가 변했음을 감지한다. 그녀는 다시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경청을 당연시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그저 누군가의 아내나 누이나 어머니로 치부할 때가 아닙니다. 아스테르가 말한다. 우리는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마지막 말은 악사들이 멋들어진 마센코의 현에 활을 그으며 찬가 혹은 후렴처럼 노래할 것이다. 우리는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p.177


'보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말은 아마도 기록된 역사에서 가장 잘 보여지는 아이러니일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굵직한 사건과 영웅들과 주요 인물들이지만, 실상 그 서사를 채우는 것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삶이니 말이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남자들 옆에서 함께 싸운 에티오피아 여자들, 지금까지도 빛바랜 서류 속에서 엇나간 선으로만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전쟁 이야기는 늘 남자들의 이야기였지만, 그 어떤 형태의 투쟁도 남자들만의 이야기였던 적은 없다'고 말하며, '그곳에는 늘 여자들이 있었다'고 이 작품이 시작된 계기에 대해 말한다. 그리하여 수년에 걸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쓰인 이 작품은 역사의 격동기를 뚫고 지나온 여성의 삶을 생생하게 소환한다.


1935년, 부모를 잃은 히루트는 어머니의 친구였던 군 총사령관인 키다네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한다. 키다네의 아내 아스테르는 사사건건 히루트의 행동에 트집을 잡는데, 어느 날 목걸이가 사라졌다고 히루트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품인 소층을 빼앗기게 된다. 아버지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물건이었기에, 소중히 보관하며 만지작거리다 잠들기도 했던 낡은 소총이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었고, 어떻게든 무기를 모아야 하는 시점이었다. 키다네는 황제께서도 누구나 무기를 기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총을 가져간다. 그 일로 인해 히루트는 작은 물건들을 계속해서 훔치고, 그것들을 마구간 옆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둔다. 결국 아스테르에게 발각되어 혼쭐이 나기 전까지 그 일은 계속된다. 히스테리컬한 성격으로 등장하는 아스테와 일방적으로 당하는 히루트의 관계는 이후 전쟁이 시작된 뒤 적군의 포로로 만나게 되면서 달라진다. 히루트와 아스테르를 비롯한 마을 여자들이 밤낮으로 훈련에 매진해 전사로 성장하는 과정 또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머리를 때리고, 그는 제대로 보기 이해 눈을 깜박인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현실이다.

쏘지 마! 사격 중지!

이게 뭐지? 에토레는 군모가 획 젖혀질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든다. 저 여잔 누구지?

혼자 달리고 있는 병사는 이목구비가 섬세한 군복 차림의 소녀다. 홀로 풀밭 위에서 기병들 사이를 날듯이 달리는 매혹적이고 초현실적인 아비시니아인.                    p.471


1935년 10월 2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권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시작한다. 당시 무솔리니는 아프리카 확장을 통해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이탈리아군의 화학 무기 사용은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이 전쟁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으로 여겨진다. 작가는 남동생을 대신해 전쟁에 나간 증조모의 실화에 착안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주인공인 소녀 히루트뿐만 아니라 총사령관의 아내와 첩자로 활동하는 매춘부, 자유를 꿈꾸는 요리사 등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작품의 제목인 '그림자 왕'은 에티오피아 황제가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패색이 짚어지자, 황제를 닮은 병사를 대신 그림자 왕으로 내세우는 계획을 뜻한다. 계획을 세운 것이 히루트였고, 그림자 왕의 호위병이 되어 활약한다.


불타는 도시와 불붙은 산, 폐허가 된 집과 허물어지는 교회, 누렇게 마른 들판과 끓어오르는 강물, 독으로 오염된 땅과 쓰러진 나무, 펑펑 터지는 폭탄과 질식하는 사람들, 갈가리 찢긴 사지.. 이토록 참혹하고 끔찍한 전쟁의 풍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야 했다. 부모를 잃고 에티오피아군 총사령관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던 어린 소녀가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고, 죽음의 공포와 여성에게 가해지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어엿한 전사로 거듭나는 과정은 우리를 역사 속 한 장면으로 데려간다. 1974년 현재와 1935년 과거가 교차되는 구성으로 숨가쁘게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수척하고 굶주린 얼굴의 어린 소년, 두려움에 일그러진 젊은 여자 등 사진으로만 보았던 전쟁의 풍경들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만들어 준다. 특히나 이 작품이 돋보이는 지점은 서사 그 자체보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고대 그리스 연극을 연상시키는 구성과 서정적이고 시적인 문체가 독보적인 매력을 발휘한다.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현실의 개연성과 픽션의 재미를 모두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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