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의 주된 논지는 모든 동물이 조상 세계의 기술 문서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자연선택이 가장 세세한 부분들까지 깊이 유전자 풀을 조각하는 엄청나게 강력한 힘이라는 숨겨진 가정에 토대를 둔다.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연선택의 힘을 말해 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위장의 완벽함이다. 동물이 자신의 (조상의) 환경이나 그 환경에 있는 어떤 대상을 세세한 수준까지 완벽하게 닮은 모습을 띠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점은 한 동물이 유연관계가 없는 다른 동물을 세세한 부분까지 닮는다는 것이다. 양쪽이 같은 생활 방식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p.125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에 이은 리처드 도킨스의 최신작이다. 그는 ‘사자의 유전서(genetic book of the dead)’라는 흥미로운 개념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당신은 하나의 책, 미완성 문학 작품, 기술적 역사의 보관소다'라는 첫 문장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데, 사자의 유전서는 유전자 풀 전체를 조각한 환경을 기술한 문서이자, 다른 여느 개체보다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어느 조상 개체의 세계를 기술한 문서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과 유전체가 오래 전에 살았던 조상들을 에워싸고 있던 세계들에 관한 종합 기록물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사자의 유전서는 동시에 미래 예측서이기도 하다. 동물의 유전체는 조상들의 자연선택을 거쳐 유전자를 통해 물려 받은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동물을 읽을 때 사실상 과거 환경을 읽고 있는 것이다.
도킨스는 이 책에서 각종 동물과 식물, 균류, 세균, 그리고 고세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유전자 중심의 시각에서 좀 더 나아가 과거의 연대기이자 자연선택에 의해 쓰이고 편집되는 한 권의 책으로서 진화를 바라본다. 모든 동물이 조상 세계의 기술 문서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다양한 도판들을 풀컬러로 수록해 시각적인 이해를 도와주고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야나 렌조바의 화려한 일러스트들도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확실히 전작들에 비해 읽기 수월한 책이었다. 사실 <이기적 유전자>도, <확장된 표현형>도 전문적인 개념들이 많아서 읽는 게 쉽지는 않았었으니 말이다. 자연선택과 진화론, 진화생물학이라는 장르에 관심이 있었지만 선뜻 시작하기가 어려웠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잘 풀어쓴 책인데다, 담고 있는 내용 자체도 풍부해서 아마 홀린듯 페이지가 술술 넘어갈테니 말이다.

그럴 것이다. 자연선택이 종들을 놓고 고르는 것이라면. 그러나 널리 퍼진 오해와 정반대로, 자연선택은 그렇지 않다. 자연선택이 고르는 것은 유전자다. 유전자가 개체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고른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차이가 빚어진다. 사려 깊은 계획 경제가 다윈주의적 수단을 통해서 출현하려면, 성비를 제어하는 유전자들의 자연선택을 거쳐야 할 것이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떤 유전자가 수컷이 생산하는 X 정자 대 Y 정자의 수를 편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어떤 수컷 태아를 선택적으로 유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갓 태어난 수컷 새끼들을 굶겨 죽이고 선호하는 소수만을 키우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p.332
뻐꾸기는 알에서 나오자마자 잔인한 행동을 한다. 새끼 뻐꾸기는 양부모의 주의를 독차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소중한 먹이를 놓고 경쟁할 상대들을 지체없이 제거해야 한다. 갓 부화한 새끼는 등에 작은 홈이 나 있는데, 둥지에 자신 외의 알이나 새끼를 그 홈에 끼운 뒤 꿈틀거리면서 위로 밀어 올려서 둥지 밖으로 내버린다. 물론 새끼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안다는 징후가 없으며, 죄책감이나 후회를 느끼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시계태엽 장치처럼 작동하는 행동이다. 조상 세대에서 이루어진 자연선택이 이러한 유전자를 만들어 냈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도록 한 것이다. 새가 지적 인지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깃털 달린 작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대단히 흥미롭다. 또한 뻐꾸기는 다른 종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서 자기 새끼를 키우게 하는 탁란 기생생물이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진화의 유전자 관점에서 보자면, 뻐꾸기는 정말 괘씸하지만 영리한 새임에는 분명하다.
유전자의 불멸성에 대해 다루는 장도 재미있었는데, <이기적 유전자>를 대신할 수 있었던 제목들 중에 '불멸의 유전자'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인과적 유전자', '협력하는 유전자', 그리고 '약간 이기적인 염색체의 큰 조각과 더욱더 이기적인 염색체의 작은 조각'까지 모두 내용에 들어맞는 제목 후보들이었다. 이 책은 전작들에서 설명했던 진화의 유전자 관점과 확장된 표현형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어 도킨스의 책들을 아직 만나보지 못한 독자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시선을 사로잡는 첫 문장에 이어 마지막 문장도 인상적이다. '당신은 득실거리고 뒤섞이면서 시간 여행을 하는 바이러스들이 빚어낸 위대한 협력의 화신이다.' 무슨 뜻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 책을 직접 읽어 보시라. 자,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진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