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피에르는 이미 오래전에 공장에서도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길고도 단조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곳은 부자도 빈민도 없고 공장은 노동자의 소유이고 노동은 구속이 아니라 찬양이며 해방된 신체의 건강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믿지 않았다. 괴물 같은 기계를 제자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미 땅속으로 몇 미터나 뿌리를 내렸다. 기계는 이미 기억할 수 없이 오래전부터 작동하기 시작해서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맨손으로 톱니바퀴를 붙잡겠다고? 기계는 멈추지 않고 손만 뜯겨나갈 것이다. p.49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프랑스, 공장들은 일주일에 며칠씩만 가동했고, 인력을 줄였다. 피에르 역시 하루 아침에 공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로 다시 일자리를 찾아 다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무도회에 가기 위해 새구두가 필요하다고 말한 여자 친구 자네트에게 해고당한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집세가 밀려 집에서도 쫓겨나고 보니 갈곳이 없었던 피에르는 거리를 배회하다 자네트가 잘 차려입은 남자와 호텔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격분해 주먹을 휘둘렀다가 그대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뒤, 굶주림에 지쳐 쓰레기통을 뒤지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다 벤치에서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손짓에 눈을 뜬다. 경찰관인줄 알았던 그는 친숙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친구 르네를 통해 피에르는 드디어 일자리를 찾게 된다.
시립 정수장 수압관리탑에서 근무하게 된 피에르는 르네가 일하는 세균 연구소에 실험실에 있는 미생물들의 정체에 대해 듣게 된다. 세상에 알려진 모든 전염병이 시험관 안에 있었던 것이다. 르네는 그 기구들을 매일같이 정성스럽게 돌보고 먼지를 닦고 광을 내면서 자신의 부주의한 손가락이 단 한 번 조심성 없이 움직이기만 해도 깨져버릴 물체들의 존재를 느끼고 마음을 쓰게 되었다고, 자신의 생각을 피에르에게 말한다. '굉장하지 않아? 상상해봐,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이 시험관에 든 형제들을 전부 뿌리면 어떻게 될지.. 어떻게 생각해, 우리 파리에 남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의 말은 세상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던 피에르를 자극했고, 결국 그는 파리의 수압관리탑에 흑사병 균을 살포하게 된다. 다음 날인 7월 14일, 프랑스의 혁명기념일에 파리에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도시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자기 손으로 진흙을 이겨서 자기 집을 만들 벽돌을 굽고 건물의 토대를 닦고 땅 위로 한 층 한 층씩 쌓아 올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형은 알아? 새롭고 단단하고 더욱 완벽해진 삶을 건설한다는 것… 나 자신이 그 엄청난 인간 눈사태의 핵심이 되어 날아올라 미래를 향해 간다고 느끼는 것… 그 눈사태는 내 위로 더욱 커져서 눈덩이가 뭉치듯 굵은 덩어리가 돼. 그리고 내가 그 심장인 거야…내 몸이 그 피가 돼서 혈관에서 혈관으로 스며들어...” p.274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폴란드 작가 브로노 야시엔스키는 이 작품에서 전염병으로 자본주의 도시가 붕괴된 뒤 새로운 유토피아적 공동체가 건설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대도시의 생존이 위협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이 작품은 작가가 당시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온 것처럼 매우 파격적인 형태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문학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20여 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발견한 정보라 작가가 기획, 번역을 맡았다. 정보라 작가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브루노 야시엔스키가 어떤 작가인지에 대한 정보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수록했는데, 작품을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작품은 출간당시 강렬하고 선동적인 내용 때문에 출판사를 찾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파리의 출판계에 인맥이 닿아 잡지 <뤼마니테>에 연재하게 되었고, 결국 이 작품은 야시멘스키가 프랑스에서 추방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우리가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팬데믹을 겪었기 때문에 이 작품 속 상황이 더 와닿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허구의 상황이지만 실제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겪어냈던 기억이 있기에 더 공감되고,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실직한 공장 노동자가 흑사병 균을 살포하게 된 과정은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낸 헤프닝 같은 사고였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염병이라는 재난으로 인해 사회는 점차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파리를 꿈꾸는 공산주의 활동가, 미국 자본가에게 접근해 탈출을 꿈꾸는 유대인 구역의 지도자, 볼셰비키 혁명 이후 파리로 망명해 빈곤한 생활을 이어가다 권력을 잡게 되는 러시아 고위 장교의 아들, 등 이 작품은 국적과 계급, 정치성향이 다른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시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각기 다른 야심을 품은 이들이 자치정부를 세우고, 흑사병이 파리에서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게 된 뒤, 탈출한 일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토피아가 만들어지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20세기 어느 혁명가가 뜨겁게 상상했던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다. 거의 백년 전에 쓰였지만 여전히 현대 사회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도발적인 작품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