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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헌법 읽기와 필사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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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 - 2025-05-30
: 220
우리나라 현행 헌법은 제9차 개정의 산물이며 최초로 여야 합의를 거쳤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사실 "여야 합의"는 당시에 강조하던 의의이며, 지금은 그보다는 6월 시민항쟁의 산물이라는 쪽을 더 내세우는 듯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시대에 잘 안 맞는 점도 노출되었지만, 제헌 이후 39년 동안 9차나 개정되던 헌법이 1987년 이후로는 38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은 걸로 보아 규범력만큼은 그 어느때보다도 강해진 헌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운용의 묘를 살려, 구태여 개정에 국력을 소비하기보다 지금 있는 헌법을 잘 살리고 적극적, 건설적 해석을 통해 문언을 존중해 나갔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안 지키고 악용하려는 사람이 문제지 법이 문제겠습니까.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필사책이라고 해서 지난번 대통령 탄핵 결정문처럼 크라운판형에 반양장인 줄 알았는데 하드커버라서 받아보고 좀 놀랐습니다. 확실히 고급스럽게 보이긴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두 10장으로 이뤄졌고 앞에 전문(preamble)이 있으며 말미에는 부칙이 달렸습니다. 전문은 그간 여러 차례 개정절차에 따라 바뀌기도 했습니다만 대체로는 유진오 박사의 원문이 풍기는 박력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제1장 총강에는 그 유명한 제1항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나옵니다. 고종, 순종 황제의 후손을 세워 복벽한다거나 하지 않고, 이제 국민의 손에 놓인 주권(sovereign)이 영원히 국민의 것일 뿐임을 장엄하게 선언합니다.
p28에는 행복추구권이 선언되는데 이 부분은 8차 개헌 때 들어갔다고 합니다. pursuit of happiness는 원래 미국 헌법이 아니라 독립선언서에 나오는데(광의의 헌법이기는 합니다), 이게 지금처럼 추상적인 행복 추구를 포괄적으로 규정했다기보다 (그 당시 기준으로) 사유재산을 열심히 노력한 끝에 취득하고, 그걸 권력에 의해 부당히 빼앗기지 않을 권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돈 벌 권리, 그렇게 번 돈 내 맘대로 쓸 권리인데 점잖으신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기독교 신자들이 말을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저렇게 돌려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36조는 혼인과 양성존엄 평등에 기초한 가정의 보호를 규정합니다. 또 2항은 특별히 모성(母性)의 보호를 선언하는데 모성은 출산과 양육 기능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1항에 양성평등을 이미 선언했으므로 이게 소위 독박육아의 옹호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특이하게도 보건권이 이 조에 놓였는데 이건 시대에 좀 뒤떨어진 듯 보이기도 합니다. 보건권이 뭐 어쨌다는 게 아니라 이 조(條)에 배치된 게 체계상 어색하다는 뜻입니다. 9차 개정 당시의 시대 감각으로는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p188의 제86조 1항을 보면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동의라는 건 사전동의를 말하며 사후동의는 동의가 아니라 승인입니다. 이 조항은 제헌 당시부터 계속 이어져왔는데 한국 헌법에서 확고한 내각제적 요소(대통령제 하라고 해도)로서, 만약 국회가 총리 임명 동의를 안 해 주면 대통령은 국정을 운영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YS 이전에는 대체로 대통령의 당이 국회다수당이거나 의석수 1당(과반은 아니더라도)이었기 때문에 큰 의의가 없었고, 국회 동의가 없어도 서리(署理)라는 형식으로 임명하여 국무총리의 직무를 사실상 수행했습니다. 이는 엄밀히 말해 위헌이었는데, 과거에는 지금처럼 상시 개원(사실상) 국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합리화되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p228에 105조가 나오는데 대법관과 대법원장의 임기 등을 규정합니다. 우리 나라는 특이한 게, 헌법재판관은 9인이라고 헌법에 규정된 반면, 대법관의 정원은 법원조직법에서 정할 뿐이므로 국회에서 일반 법률의 개정 절차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112조에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기 등이 규정됩니다. 농업 경영 합리화를 위해 농지를 임대한다거나 융통성 있게 정책을 펴지 못하고 오로지 거주자, 직접 경작자에 한해 소유를 허용하는 건 p268의 121조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때문인데, 해방 직후에는 이 조항 아니었으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에 중요했겠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좀 변화가 필요하지 싶습니다. 그런데 말을 이렇게 하고 보니, 서평 초두에 제가 개헌하지 말자고 했던 것과 꽤나 모순되네요 ㅋㅋ
편제가 고급스럽고 필사란도 기능적으로 짜여져 아주 만족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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