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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서림(道談書林)

  '슬픔'에 관한 시가 많다. 


  '슬픔'


  이는 자신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세상과 불화할 때, 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 찾아오는 감정 아닌가.


  무언가가 틀어져 있다는 마음. 그런 슬픔이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이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슬픔을 느끼는 주체가 자신이고, 이는 자신을 중심에 놓는 행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든 슬픔은 이기적인가? 아니다. 타인을 위한 슬픔이 있다. 연민이라고도 할까? 무릇 종교는 그러한 연민, 즉 남을 위한 슬픔에서 오지 않았던가. 나만이 아니라 남도 나와 같이 고뇌, 번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느끼는 마음, 슬픔.


시인은 '이기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남보다는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충족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제목과 비슷한, 접미사 '-들' 하나 차이인 시를 보자.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김경미,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95년. 16쪽. 


이 시를 보면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 꽃은 생명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고, 물을 먹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조차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슬픔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자신만이 지니고 있으려 한다. '벽 위의 박수근'은 박수근 그림을 의미할 텐데, 가난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박수근의 그림.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이 가난하고, 그 가난함이 슬픔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러한 가난함을 이겨낼 마음은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기적인' 슬픔이 된다.


오로지 자신만의 슬픔을 간직하겠다는 것. 이는 사회적인 관계를 떠나 자신의 세계 속에만 머무르겠다는 선언이 될 텐데... 그러한 슬픔은 정호승의 '슬픔'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이 말하는 슬픔은 그 힘으로 다른 존재들에게 다가가겠다는 것,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슬픔으로 치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김경미의 시에서 슬픔은 오로지 개인적인, 자신에게만 머무는, 그 슬픔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그러한 슬픔이다.


이러한 슬픔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자신을 유폐시킬 수밖에 없다. '굴원의 불빛'이란 시를 보면 이 점이 더 잘 드러난다. 세상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결국 자신 속에 빠져버리는 것. 그래서 시인은 '그냥 가만히 귀양갈까 해요'('굴원의 불빛' 중에서. 49쪽)라고 하는데, 아니다. 그래선 안 된다.


아마도 시인은 지독한 슬픔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나 보다. 그러한 슬픔을 이겨내는 시보다는 슬픔에 빠져 있는 그러한 시들이 많은 것을 보니. 하지만 우리는 시인의 슬픔에 빠져 함께 허우적 댈 수는 없다. 


시인과 더불어 슬픔에 푹 빠져버린 경험, 그 경험을 통해서 슬픔의 밖으로 나가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 그것이 이 시집을 읽는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 아닐까? 어쩌면 시인은 자신의 이기적인 슬픔을 통하여 사람들이 슬픔에서 벗어나 홀로가 아닌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시인이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본다'고 한 것은 이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고. 따라서 이기적인 슬픔은 나 자신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존재에게로 확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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