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페이퍼를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주제는 '재생산권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 전제는 '재생산권을 통제한다' 혹은 '재생산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출산율, 이제는 출생률로 부르고 있는, 재생산 비율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획기적인 대안이 도출되지 않고 있음을 고려하면 아직은 우리 사회가 그 문제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는 하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길어야 100년 사는 우리가 고민하는 지구의 미래에 대해 나는 좀 회의적이다.
문제는 권력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더 좋거나 더 나쁜 재생산 후보로 분류하고 서열화할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재생산을 통제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부분적으로는 좌파, 진보적 사상가, 선의를 지녔다고 인정되는 개인, 국가 또는 기관이 이행하기만 한다면, 그런 관행은 허용될 수 있고 심지어 유익할 수 있다는 위험한 신념 때문에 우생학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이런 발상은 어떻게 아직도 할데인이 상상한 인공 자궁에 대한 잔재가 실현 가능한지, 우리가 얼마나 더 나아가야 체외발생이 화를 재촉하는 데 쓰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시사한다. (109쪽)
폭력으로부터 임신한 사람을 보호해 줄 자원을 제공하는 것보다, 그저 이들의 몸에서 태아를 적출하여 '더 안전한' 장소에서 자라는 편이 더 낫다는 발상은 지극히 충격적이다. 이런 주장은 태어난 어린이와 동등한 권리를 태아에게 부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임신한 사람이 임신에 최적화되어야 할 '환경'이자 인큐베이터에 불과하다고 암시하면서 이들의 권리를 침해한다. 그리고 이런 각각의 주장들은 인공 자궁을 우생학의 실현 도구로 활용하려는 과거의 잔재를 이어간다. (115쪽)
배아에 대한 실험적, 물리적 통제가 14일이었지만, 이제 그 기한은 이런저런 이유로 연장될 가능성이 크다. 초극소 미세아에 대한 돌봄 혹은 관리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경우, 두 개의 기술은 반드시 결합할 것이다. 의료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인공 자궁에 들어가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날 테고, 그 이후에는 '편리함'을 이유로 인공 자궁을 이용해 아이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에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기술의 적용에는 후진이 없다고 생각한다.
뒤쪽을 읽어갈 때는 '조산아'의 인종, 계급, 사는 지역에 따른 사망률의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보건 의료 자원을 보다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에는 임신한 사람, 엄마, 영아들의 건강 불평등이 인종차별로 인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있다. 미국의 경우 임신한 흑인 여성들의 사망률은 임신한 백인 여성들의 3~4배에 이른다. 또 임신 및 출산과 관련하여 '생명이 위태로워'지거나 신체적 손상이나 합병증으로 후유증을 겪을 확률도 실질적으로 더 높다. 원주민 여성들이 임신이나 출산과 관련된 원인으로 사망할 위험은 도시에 사는 백인 여성들보다 4.5배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 사는 흑인, 하와이 원주민, 미국 본토 원주민, 알래스카 원주민 아기들은 미숙아로 태어날 위험이 더 크고, 생후 일 년 이내에 사망할 확률도 더 높다. (144쪽)
적은 비용으로 치료가 가능한데도 건강 불평등 때문에 흑인, 원주민의 아기들이 목숨을 잃는 반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얻어진 최신 과학 기술 덕분에 생명을 '연장'하게 된 백인 아기들이 존재한다. 이는 명백히 자원의 배분과 연관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당연히 서열화일 것이다. 누가 누구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정치를 넘어 문화의 영역에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용인될 때, 사람들의 잘못된 신념은 구체적인 통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강제적' 평등이 강조되었을 때, 전체주의 사회의 도래를 막을 수 없게 된다. 로이스 로이는 소설 『기억 전달자』에서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차이를 'sameness'로 치환하려 했을 때, 그러한 강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여준다. 요는 '차이'를, '다름'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상을 우열로서가 아니라 차이로서 인식하는 것. 인류 문명이 다하는 날까지 어쩌면 그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부분에 재생산권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두 아이를 낳아본 입장에서 낳는 것보다 키우는 일이 몇 배 더 힘들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뱃속에 아이를 열 달 넣고 다니는 게 힘들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한 인간을 1인분으로 키워내고, 그 모든 과정에서 가능한(혹은 최대한)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나 자신을 반추해 나 자신이 먼저 성숙한 인간, 좋은 부모에 가까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부터라고 다락방님이 이야기해 줘서야 알았다. 같이 읽기를 시작했던 그 순간의 대화들도 기억이 또렷한데 7년이나 지났다고 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책 선정에서부터 리뷰와 페이퍼 쓰기, 완독 독려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을 이끌어주신 다락방님께 특히 감사드린다. 함께 읽고 함께 쓰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었던 모든 이웃님들 덕분에 새로운 것들을 많이도 배웠다.
완독의 기쁨을 5월 31일, 오늘 이날에 즐겁게 담아둔다.
기술로 만든 장치 안에서 자라는 아기의 경험은 인간의 자궁안에서 겪는 경험과는 어떻게 다를까? 또 우리가 결국 이런 계획을 추진해야 할 이유에 설득되어 동의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미래의 일을 넘겨짚는 대신, 1923년과 케임브리지의 북적북적한 학술모임에서 ‘체외발생‘이라는 말이 처음 생겨난 순간으로 돌아가 과거를 되짚어보면서 가능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자.- P85
달리 말하면 인공자궁은 ‘우월한 자‘만이 생존을 보장해준다는 이야기이다. 《오늘과 내일》 시리즈의 다른 저자들도 우생학이 완전히 실현된 미래가 더 나은 미래라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P102
헉슬리가 전체주의와 우생학이 지배하는 체제를 상상한 시기는 나치의 그야말로 극단적인 우생학 정책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하지만 당시 헉슬리는 영국, 유럽, 북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시행되고 있는 정책과 법률, 관행에서 정보를 얻었다. 이 책이출판된 지 3년이 지난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 인종법Nuremberg RaceLaws으로 홀로코스트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유럽과 북미에서는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불임화와 분리정책을 정당화할의도로 법규를 통과시켰듯이,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 로마인, LGBTQ, 흑인, 장애인, 혼혈인을 인간 이하로 분류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이 법은 이들 중 누구도 ‘아리아‘ 독일인과 결혼하거나 성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명시하고 사람들이 결혼 전에 건강적합인증서를 갖추도록 했다. 이러한 각각의 조치들은 미국에서 통과된 법규와 영국 우생학자들의 권고 및 저서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다.- P110
국가나 기관이 몸 안에 아기를 지니면 안 된다고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서 결정한다면, 이것은 우생학이다. 임신한 사람이 알코올이나 마약을 사용했든, 암 치료를 받았든, 학대에 희생되었든, 이런 행동 때문에 임신한 사람의 몸에서 아기를 적출되는 편이 아기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결할 권한이 판사에게 주어진다면, 이것도 우생학적이고 반페미니즘적 관행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이 같은 판결을 마주한 사람이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