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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저자 최은영

문학동네

2021-07-27

소설 > 한국소설




나는 나의 밤이 영영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밤은 결국 나를 밝히는 빛이 되었다.




■ 책 속 밑줄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사찰에서 나던 향 냄새, 계곡의 이끼 냄새와 물 냄새, 숲 냄새, 항구를 걸어가며 맡았던 바다 냄새, 비가 내리던 날 공기 중에 퍼지던 먼지 냄새와 시장 골목에서 나던 과일이 썩어가는 냄새, 소나기가 지나간 뒤 한의원에서 약을 달이던 냄새…… 내게 희령은 언제나 여름으로 기억되는 도시였다.



어린 내 눈에 희령의 하늘은 서울에서 보던 것보다 더 높고 푸르렀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건 할머니와 함께 본 희령의 밤하늘이다. 나는 그때 은하수를 맨눈으로 처음 봤는데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희령에 내려가던 날, 서른두 살의 나는 자동차 뒷좌석에 살림살이를 가득 싣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폭설이 내리는 2017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아가씨, 내 손녀랑 닮았어. 그애를 열 살 때 마지막으로 보고 못 봤어. 내 딸의 딸인데."

할머니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손녀 이름이 지연이에요, 이지연. 딸 이름은 길미선."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할머니는 나와 우리 엄마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서울 사는 애가 여기에 내려올 일이 없잖우."

할머니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려왔네요, 여기."

내가 말했다.

할머니는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증조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잠시라도 뒤돌아보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십칠 년 동안 살던 집, 누린내가 가시지 않던 집, 똥지게꾼도 상대해주지 않아 스스로 오물을 퍼내야 했던 집, 해질녘 구석에 핀 꽃이 예뻐 바라보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아야 했던, 무엇 하나 좋은 기억이 없던 집. 그 집을 떠나 기차역으로 가는데 그 짧은 길이 천릿길 같았고, 걸음걸음이 무거워 납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것 같았다. 그래도 떠나야 했다. 그게 사는 길이었으니까.



"가족이니까 무조건 참아야 해, 하는 말은 난 옳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널 사랑하는 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냥 받아줘."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상실과 불행은 누구의 잘못도 아닐 수 있어. 하지만 그것과 싸우고 싶을 땐, 그 마음만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꼭 말해주고 싶어."



■ 끌림의 이유


『밝은 밤』은 '나-엄마-할머니-증조모'에 이르는 네 세대의 삶을 비춘 이야기입니다.

그녀들의 기억과 시간을 따라가며 개인의 서사와 감정을 세심하게 포착해냅니다.

서로 다른 사정을 품은 이야기들이 촘촘히 엮여지는데 그 서사를 따라 읽다 보면 어느새 깊은 여운에 잠기게 됩니다.

한동안은 말조차 잊게 되는 그런 감정의 파동이지요.


가장 가까운 가족 안에서도 온전히 이해받기 어려운 마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진심이 간밤의 나를 오래도록 붙들었습니다.



■ 간밤의 단상


『밝은 밤』은 슬픔을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누구보다 성실히 살아냈지만, 충분히 위로받지 못한 그녀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읽는 내내 화가 났고 슬픔에 잠겼고 다시 화가 났고 또다시 슬픔에 잠겼습니다.

증조부가 조금만 더 다정했더라면 그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들의 인생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쉽사리 지워지질 않았습니다.


의식주를 제외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시선은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때로는 용기가 되기도 합니다.

삶의 어둠이 쉽게 걷히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잊히지 않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네가 너답게 살아가는 삶이 나는 좋았다."

그 말이 간밤에 깊은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 건넴의 대상


한국 현대사와 여성의 서사에 관심 있는 사람

가족 안에서의 감정 소모가 버거운 사람

일상에서 길어낸 문장으로 위로받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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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감상이 더해지면, 이 공간은 조금 더 깊고 따뜻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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