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점 ★★★★ A-
당신은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당신도 그림의 창작자다. 먼저 마음에 드는 그림에 다가가자. 완성된 그림은 창작자인 당신을 위한 캔버스다.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라. 이제 당신의 마음이 움직일 때이다.
그림에 당신의 느낌을 색칠하라.
그림을 보면서 마음대로 느낀 것도 좋다.
칠해라, 당신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림 속에 서성이고 있는 화가에 기죽지 말자. 화가와 눈을 마주쳐도 아는 척 하지 말자. 어떤 그림은 온통 화가의 생각으로 도배되어 있다. 당신이 화가를 좋아하더라도 그림에 칠해진 화가의 생각을 말끔히 지우시라. 화가에게 맞춰진 팬심은 당신의 창작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가가 그림의 주인이라면 당신은 그림의 주인공이다.
창작자는 그림을 소유할 수 없지만,
그림을 무궁자재(無窮自在)로 그릴 수 있다.
창작자가 새로 그린 그림은 무궁화(無窮畵)다.
무궁화는 화사하다. 창작자의 그림은 특별하다. 그 속에 화가가 처음에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지 못했던 새뜻한 아름다움이 피어 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그려도 된다. 얼마든지 새로 그릴 수 있다. 당신의 느낌을 칠해라, 당신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러면 무궁화는 매일매일 새로운 매력을 드러낸다.
미국의 뇌과학자 에릭 캔델(Eric Kandel)은 미술에 조예가 깊다. 그의 관심사이자 연구 주제는 ‘우리가 미술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미술을 경험하는 것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활동을 뜻한다. 그러나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면서 즐거웠던 경험이 없으면 작품 감상을 어려워한다. 미술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자신은 절대로 예술과 친해질 수 없다고 단정한다. 2016년에 나온 그의 책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이한음 옮김, 프시케의숲, 2019년)는 난해한 현대 추상 미술이 의외로 우리 뇌와 친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주1]
캔델은 추상 미술이 우리 뇌를 멈추게 할 정도로 어렵지 않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뇌는 난해한 예술 작품을 만나면 평소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인다. 뇌는 어려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러면서 어려운 예술 작품을 만나면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우리를 다독인다.
“괜찮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뭐 어때서?
작품에 대해서 몰라도 돼.
네가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떠올려 봐.
그림을 보면서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도 좋아.”
이처럼 과거의 경험과 감정들을 모아서 정보를 해석하는 뇌의 반응을 뇌과학에서는 ‘하향 처리(top-down processing)’라고 한다.
작년에 출간된 《미술, 마음, 뇌》는 ‘미술을 바라보고 즐길 줄 아는 뇌’를 주제로 한 일곱 편의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캔델의 국적은 미국이지만, 태어난 곳은 예술의 도시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빈(Wien)이다. 빈에는 나이가 젊고, 다양한 국적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빈은 근대(modernism) 문화의 중심지였다. 오늘날 예술사가들은 ‘빈 1900(Wine 1900)’라고 부른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와 에곤 실레(Egon Schiele)는 빈 1900을 대표하는 예술가다. 이들은 전통을 과감히 거부하면서 새로운 예술을 선보였다. 보수적인 예술을 선호하는 대중과 비평가는 자유분방한 신진 예술가들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이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지원하는 지식인들과 동료 예술가들이 많았다.
저자가 주목하는 빈 1900의 매력은 예술과 학문을 구분 짓는 경계가 희미한 사회적 분위기이다. 빈의 예술가와 과학자들은 서로 어울리면서 생각을 자유롭게 주고 받았다. 빈 1900에 활동한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은 ‘예술과 과학의 만남’을 주도했다. 그가 선호한 과학은 인간의 복잡미묘한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심리학이었다. 빈에서 활동한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자신이 정립한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여겼다. 리글은 개인의 무의식적 감정을 중시한 프로이트에게 공감했다. 그는 예술 작품을 보고 느끼는 ‘감상자의 참여’가 부족하거나 외면받으면 미술이 불완전한 상태로 발전된다고 주장했다. 예술은 예술가들의 머리와 손에서만 태어나지 않는다. 예술은 감상자를 만나야 한다. 감상자의 참여가 예술 작품을 완성한다. 미술과 심리학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춘 리글의 연구 주제는 그의 두 제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에른스트 크리스(Ernst Kris)와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가 이어받는다.
《미술, 마음, 뇌》는 미술을 어려워하는 독자들을 자극하고, 영감을 준다. 우리는 무조건 화가에 대한 정보와 전시 해설가(docent)가 알려주는 지식에 끼워 맞추면서 감상할 필요가 없다. 계속 관련 연구를 해야 하겠지만, 뇌과학은 예술 작품을 만난 감상자의 뇌가 예술가의 뇌에서 일어나는 창작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즉 감상자의 참여는 예술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는 창작 행위이다. 감상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은 예술 작품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물감과 붓이다.
그림에 당신을 색칠하라.
칠해라, 창작자가 된 감상자의 마음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그림을 다시 그려 보자.
미술관에 무궁화(無窮畵)를 피우자.
[주1]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서평
<어려운 추상 미술,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2019년 5월 10일에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0848491
<cyrus가 만든 주석과 정오표>

* 32쪽

클림트는 서양 미술의 에로티시즘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했다. 그는 감상자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실제 여성을 묘사했다. 전통적인 나체 그림은 세 가지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 첫째, 그림 속 여성은 신화적 존재다. 비너스, 마이아(마하), 올랭피아. [주2]
[주2] ‘신화적 존재’는 현실의 인간이 아닌 상상의 인물, 즉 말 그대로 신이다. 비너스(Venus)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이라서 신화적 존재다. 그러나 마하(maja)와 올랭피아(Olympia)는 신화적 존재라 할 수 없다. 그녀들은 현실 속 여성이므로 ‘근대적인 나체 그림’으로 분류한다.

마하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의 누드 그림 『옷을 벗은 마하』(1798~1805년경)를 가리킨다. 마하는 18세기 스페인에 새로운 유행을 받아들이고, 옷을 세련되게 입는 젊은 여성을 뜻하는데, 젊은 남성은 ‘마호(Majo)’라고 한다. 이 그림 속 여성의 정체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많지만, 마하는 현실의 여성이다. 여신이 아닌 실제 여성의 몸을 그린 그림이라는 이유로 고야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을 정도로 곤혹을 치렀다. (참고 문헌: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은희 · 최지영 함께 옮김, 《고야, 영혼의 거울》, 다빈치, 2011년, 27쪽)

고야의 마하 못지않게 유명한 누드 그림이 에두아르도 마네(Édouard Manet)의 『올랭피아』(1863년)다. 그림 속 올랭피아는 매춘부다. 올랭피아는 ‘신화적 존재’가 아니다. 이 그림이 공개되자 비평가와 언론인은 성스러운 여신이 아닌 매춘부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벌거벗은 여성의 정체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델로 알려진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이다. 그녀도 화가였으며 그녀의 작품은 살롱에 여러 번 전시되기도 했다. (참고 문헌: 제임스 H. 루빈, 하지은 옮김,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 권으로 보는 인상주의 그림》, 마로니에북스, 2017년, 222~223쪽)
* 137쪽

올림피아 → 올랭피아
마네의 그림 제목을 영어식으로 표기하면 ‘올림피아’다. 그러나 ‘올랭피아’가 더 유명하고, 이 책의 32쪽에 ‘올랭피아’로 적혀 있기 때문에 그대로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