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참을 수 없는
초여름, 완독.
반유행열반인  2025/06/01 17:53
  • 첫 여름, 완주
  • 김금희
  • 15,300원 (10%850)
  • 2025-05-08
  • : 159,775
-20250601 김금희.


시각장애인복지관에 딸린 카페는 내가 잠깐의 시간이 생길 때 숨는 곳이다. 거기는 빵이 정말 맛있다. 탄수화물 기피자인 나도 딸기파이, 밤파이, 대파크림치즈베이글 같은 걸 먹고 놀랐다. 음료도 프랜차이즈 카페들에 비하면 특색 있고 원물 재료 비율이 높다.
카페 안쪽에는 도서관이 있다. 그 도서관에는 복지관 방문을 마치고 장애인용콜택시의 도착을 기다리는 시각장애인들이 머물러 쉴 때가 많다. 아는 목소리를 만나면 반가이 큰 소리로 안부와 근황을 주고 받는 사람들, 자주 듣다보니 이제 나도 아는 목소리네, 하는 사람들도 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할 일이 있으면 이어폰을 끼고 소음을 차단하긴 하지만, 하여간에 나는 거기가 편하다. 내가 있지만 있는 걸 알 테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냥 편하다.

김금희의 새 장편소설은 오디오북으로 먼저 나왔다고 들었다. 표지만 보면 그래픽노블이나 청소년소설 느낌이었는데, 낭독을 염두에 두고 대사 배치가 약간 희곡처럼 길게 이어지는, 실험적이라면 실험적이고, 이거 오에스엠유인가 그렇게 여러가지 매체로 옮길 만하게도 쓰인 것 같고, 그랬다. 가깝고 친밀하던 사람이 돈을 빌려 떼어먹고 나르는 일이 요즘 젊은 사람에게는 가장 비극일까, 싶게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 이야기가 여기에서도 이어졌다. 장의사 겸 매점인 공간, 정체 불명의 나무 정령 같은 어저귀, 열매가 할아버지와 만나는 꿈 속, 신파와 클리셰가 적당히 범벅된 한국 영화나 드라마 느낌이지만 또 주변 풍광을 묘사하는데 공들인 걸 보면 아...금희언니는 옛날에 시나리오를 쓰려고 시도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망상도 해 보고…

가상의 소읍 완평군, 완주 마을은 완주, 라는 말을 거듭 반복하기 위함인지 조금 뻔하지만 그래도 서사의 고갱이 마냥, 이 여름, 죽지 말고 달려, 온갖 우울증 환자와 빚쟁이들을 위로하려고 애쓰는 느낌이었다. 삶을 살아내는 일을 끝까지 달려 어딘가 도달하는 듯한 완주라는 말로 그리는 건 나는 좀 못마땅했지만 말이다. 꼭 다 달려내야 하는 거니... 가다 못 가면 쉬었다 또 가야 하는 거니, 아픈 다리 서로 기대어…

아직 여름은 이제 시작인 무렵 짧은 소설이라 금세 완독을 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사 놓은지 오래인데 꽂아만 두고 시작도 못하고선...며칠 전 ‘나의 폴라일지’(아마도 이미 다 읽은 내가 학교 도서관에 애들한테 극지방 배울 때 소개하려고 구매 요청해 둔 책) 읽는 동료를 보며 그 책, 저도 봤어요, 저 이 작가 소설 다 봤어요, 했는데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꽂힌 걸 보고 아차차...뻥쳤네… 첫 여름, 완주 또 보고선 아차차차...완전 거짓말 했네...하면서 이 주말 읽었다. 학교 아이들은 내내 싸우고, 사과를 원하고(그러면서 사실 앙갚음을 하려 들고), 따돌리고, 학교에 오기 싫어하고, 뭐 그런 속시끄러움으로 나는 메모장에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건넬 말을 적어 보고, 욕도 썼다 지우고, 챗지피티에게 내가 적은 걸 읊어주며 조언도 듣고...너무 방어적으로 보일 수 있으니 조금 부드럽게-가자는 버전도 친절하게 꺼내주고 혼자 앓지 말고 여기저기 의논해보라고, 고생했다고 위로까지 잃지 않는 에이아이여… 이 여름 가장 따뜻한 건 왜 에이아이인가… 왜 인간이 아닌 무엇인가..

사실 열매와 어저귀가 잠시 사랑하는 장면도 인간 아닌 존재라고 강조해서 그런가, 외계인보다는 에이아이 같은 정령이랑 교류하는 느낌이었다. 어저귀와 열매가 그렇게까지 속을 터놓기도 전에 말도 많이 안 나눠 보고선 친해지는 걸 보면, 정말 깊어지고 슬퍼지기 전에 너무 서둘러 둘이 다시는 못 보게 된 것도 같았다. 어저귀는 온장고 나르고 장의사 집 수리 열심히 한 정도지, 열매랑 그렇게 통할 만한게 있던가, 싶었는데, 꿀벌 분가하는 장면에서 급전개 해서 둘이 가까워지는 건 조금 작위적이랄까...그것만큼이나 어저귀를 치워버리는 장치도 예측가능하면서도 뭐여 이게...하게 되는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마을 인물 하나하나 생생하게 그려내서 정말 시나리오 읽는 느낌이었다.

난 뭐, 다 못 달려내더라도 천천히 걸어서 가는 데까지 가 보고, 딱히 가고자 하는 곳도 없고, 그냥 걷는 것처럼 그냥 사는 사람이 되려고 애써왔고 그게 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그러니까 재미있는 소설이 아직 많이 쌓여 있으니 그거나 짚으며 이 여름 보내면 되고...여름은 책이 잘 읽히는 계절이라 더워도 괜찮다. 더위에 나무가 쑥쑥 자라듯 종이도 죽죽 넘어간다.

+밑줄 긋기
-할아버지: 아이, 아이, 목청이 왜 이리 좋은 겨? 충남도청까지 날러갈 뻔혔네. 근디 지끔 열매 니는 피난 갈겨? 무신 짐이 이렇기 많댜?
손열매: (씁쓸하게 웃으며) 할아부지, 나 갈 데가 읎네.
할아버지: 우리가 보령 팔 대 토백이덜인데 워찌 갈 데가 없는 외톨백이라 허넌 겨?
손열매: 아녀, 지끔 암도 읎어. 친구도 읎구. 사투리 얼릉 고쳐서 성공할라는 동안 친구들 하나둘 떠내 부렸지. 아이, 서울말을 배야 헌게.
할아버지: 아이구, 서울말은 워디로 밴 겨. 삼십 년 무덤에 있던 나보다 보령 말을 더 잘허는디? 식구덜은 워뜨케 된 겨? 느이 에미 애비는 기어코 갈라선 겨?
손열매: 이.
할아버지:(혀를 차며)해여튼 간이 내가 낳은 자슥 새낑이지만 느이 애비가 원판 시절(얼간이의 충청도 사투리)이여. 개갈 안 나넌 화상이래니께.
손열매: 아빠가 시절이라 나도 시절인개 벼. 의사가 나 얼간이 됐다 그러대.
할아버지: 얼라리요, 니가 워째 시절이여? 너는 외탁이여. 생김새도 영 그짝 판이구. 기런 소리 말어. 열매 너는 어렸을 때부터 쫄대깃살마냥 야물딱지고 똑부러졌대니께.
손열매:(점점 감정이 격해지며 울먹인다) 아니여, 시절이여, 시절이 중에 시절이여. (025, 악마 같은 할배 뒀다 보니 저렇게 노인들이랑 친하고 정감 있는 장면은 늘 공감 못하고 픽션이여 픽션, 하게 되고...시절이 얼간이면 시절 인연은 얼간이 인연이네 충청도에선...하면서 워 사투리 제법인데, 이문구의 후예네, 하면서 제일 먼저 옮겨 적고 싶었던 부분이다.)

-간디: 야, 너 왜 자꾸 나 간디라고 불러?
양미: 너 인도 사람이잖아. 넌 간디, 니 찐친은 러시아에서 왔으니까 푸틴.
간디: 야, 그러면 너는? 응? 너는?
양미: 나? 난 윤석열이지. (위악 쩔고)
푸틴: (불만스러운 말투로 속삭이듯) 야, 재수 없어, 우리끼리 가자.
간디: 쟤 이번 주도 안 나오면 유급이잖아.
푸틴: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유급하냐? 오지게 인종 차별 하는 애를 우리가 왜 감싸?
간디: 학교 오지 않는 친구가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우리끼리 수업하는 건 수치라고 썜이 그랬잖어. 그 말 할 때 율리야 넌 뭐 했냐? 졸았냐? (37-38, 영화 초능력자에서 보던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 티키타카 장면 비슷해서 식상하긴 해도 간디는 역시 평화주의자로구만…그런데 여기선 좀 더 적극적이다...아 그리고 양미가 뭐임- 하는 말투 쓰는데 요즘 중학생들 ~임 하는 명사형 어미 말투 절대 안 씀...한 십 년 십오 년 유행 지난 듯...청소년 오리엔탈리즘...)

-손열매: 그러니까 그짝 얘기는 대가리도 꽁지도 없이 생선 가운데 토막이다, 그게 외계인의 삶이다, 이건가?
어저귀: 또 외계인...그리고 나는 삶이라는 말도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덩어리 같고 물질적이고 그냥 그거보다 ‘유효’쯤이 살아 있는 상태를 설명하는데 적당하지 않나? 인간, 나무 잎사귀, 물방울, 별 먼지까지 은은히 있다가 사라지는 모양을 다 담을 수 있잖아요. (102, 어쭈, 난 완주가 별로랬는데 삶을 살아낸다는 나한테 어저귀는 삶 별로, 하고 있었다. 이자식...없어져도 별로 안 아쉽더라...흥)

-달을 비추기 위해 기꺼이 더 어두워진 연못의 물결 소리.
뾰족한 전나무 잎들이 공기 중에 긋는 투명한 빗금 소리.
흙 알갱이를 짚으며 땅벌레들이 길을 찾는 소리.
부후된 통나무 껍질을 쪼개며 버섯이 피는 소리.
이불이 펼쳐지듯 밤안개가 너르게 이동하는 소리.
그러다 어저귀와 열매 위로 내려앉는 소리.
그렇게 밤이 존재하는 소리. (155, 아… 이렇게 힘준 부분엔 일부러 더 밑줄 안 긋는데 투명 형광펜으로 작가 언니가 여기야, 여기, 좍좍, 이래 놓은 걸 지나치면 너무 예의가 아니잖아...하고서 한 번 옮겨 적기로 했다.)

-열매는 울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저귀의 누룩 덕분인지 빵은 무섭게 팔려 나갔다. “감동 그 잡채의 천연 효모 빵”으로 어느 블로그에 소개되더니 사람마다 느끼는 맛이 다 다른 신기한 빵으로 입소문이 났다. 방문자들의 별점도 매겨졌다. 국가 권력급 사워도우, 시간 잘 맞추면 향냄새 나는 장의사 컨셉 카페, 노랑이 믹스커피에 담긴 인생 찐맛, 나이 있으신 사장님은 레알 장례 지도사라고 함, 아무것도 안 넣었다는데 바닐라, 치즈, 트러플향까지 남, 완평의 숨은 맛집, 알바생 성깔 있음. (176, 마침 ‘음식의 영혼, 발효의 모든 것’에서 사워도랑 곡물 발효 음식 읽고 있는데 딱 아퀴가 맞게 빵 굽는 이야기가 나와서 재미있었다. 난 뭐 어제 냉동 생지 녹여서 버터크로와상을 구워 내가 거의 다 먹었지...천연 효모 빵은 그냥 어디 가서 사 먹을게…)

+비디오 테이프 감성인가, 주인공 이미지랑 썩 맞지도, 끌리지도 않는 표지 감성… 밀짚모자 뭐냐고… 캐리어 왜 허공에 떠 있음… 아 그런데 손열매네 할아버지 역할 오디오소설에서는 최양락 씨구나...표지 보니까 최양락 얼굴로 그려놨다… 충청도 사투리니까 인정…

+독후감 쓴 꼬라지를 돌아보니 내가 T여,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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