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참을 수 없는
  • 대온실 수리 보고서
  • 김금희
  • 16,200원 (10%900)
  • 2024-10-04
  • : 64,864
-20250615 김금희.

같은 달에 같은 작가 소설을 두 권 읽게 된 건, 동료에게“나 이 소설가 소설 다 봤어요.” 하고 말한게 뭔가 거짓말 같이 되어 버려서였다. 거의, 라는 부사 하나만 붙였으면 교묘하게 빠져나갈 것을. 두 권 사 둔 거 안 본 걸 뒤늦게 떠올리며 이런 걸로 죄책감에 빠지는 나… 그렇다면 책임을 지는 나… 나는 소설 읽는 일이 즐겁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소설 말고 다른 책들을 기웃거리며 소설 읽기를 피하는 것 같다. 한 번 잡으면 너무 빠져버리는 게 괜히 쑥스러운가 보다.

내가 읽은 김금희 소설가의 소설 중 아마도 취재를 제일 많이 했겠지, 싶었고 작가의 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창덕궁, 창경궁을 찾았던 8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또 너무 많이 다르다. 땅에 떨어진 철쭉꽃을 집어 머리에 꽂고 사진 찍던 큰어린이보다 이제 한 살 더 많은 작은어린이가 그 사이 생겨났고, 이 작은어린이는 궁궐이란 데를 가 본 적이 없다. 청와대도 궁궐 비슷한 거라고 하면 뭐 거기는 얼마 전에 가봤지만. 여긴 정말 업무보던 곳이네, 싶은 창덕궁을 넘어, 산길따라 건너간 창경궁은 어떻게든 창경원 시절 모습을 벗고 일제 시대 이전의 궁궐 느낌을 내려고 애를 써서 조경해 놓은 것 같다는 인상 정도만 남았다. 기와 지붕 위의 어처구니 같은 것을 사진에 담아놓고 오래 잊었던 그 공간을 따라, 작가는 시대와 공간을 넘나들며 촘촘하고 두터운 이야기를 잘 짜 놓았다. 두께가 납득이 가고, 간만에 책장을 손바닥으로 지긋이 누르며 아...오랜만에 책 읽고 감동이란 걸 느낀다, 했다. 나는 소설가의 소설들을 생각보다 사랑하니까, 괜히 다른 장르 글 보고 깝치고 투덜대지 말아야 겠다. 집 한켠의 김금희 소설 코너에 간만에 재미있고 흠잡을 것 별로 없는 좋은 소설 읽었다, 하면서 꽂아 두었다. 친구에게 선물한 ’복자에게‘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부재중이지만 계속 안 읽으면 도로 빼앗아 와야겠다.

+밑줄 긋기
-까마귓과인 어치는 경계심이 많고 자기 영역에 대한 통제력도 강하다. 다른 새들을 자주 괴롭히는데 어미 소리를 내며 새끼를 유인해 잡아먹기도 하고 고양이 울음을 따라 해 작은 새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한다. 혓바닥이 발달해서 앵무새처럼 다양한 소리를 흉내 낼 수 있었다. (127, 난 물까치가 더 예쁘지만 떼지어 다니는 그놈들보다 어치에 더 가까운 것 같긴 해...그보다는 대놓고 더 시끄러운 탐욕의 까마귀…사마귀...마귀...귀마개…1절만...)

-나는 제갈도희가 지켜봤다는 데 당황했다가 원래 곤줄박이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니까 하고 이해했다. 그리고 제갈도희에게 곤줄박이 닮았다는 얘기를 해주자 그게 뭐든 새를 닮았다는 말 자체가 근사하다고 만족스러워했다. (146, 여기까지 사람 두 명을 새에 비유했는데 몇이나 더 그럴까 궁금해지는 지점이었다. 산에 다녀 본 적 있다면 새새끼한테 관심이 많아진다.)

-“뭐라고?”
나는 얘가 귓구멍이 막혔나 싶어서 어깨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사랑한다고, 안 들려?”하고 외쳤다. 순신은 양쪽 다리로 자전거를 지탱하더니 핸들바를 놓고 뒤돌아 나를 꽉 안았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물론 동대문시장까지 밤의 자전거를 타고 왔던 계절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156-157, 연애의 시작 한 문단 안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훅 치고 들어오는 이 정도 솜씨쯤 되려면… 하여간에 많이 쓰고 많이 지우고 많이 고치고 식물도 키우다 죽이다 해야겠지.)

-“구원에 대해 배워.” 나는 성당에서 늘 들었던 단어를 답했다.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다행이다.”
이후 원서동을 떠나오고 나서도 그 대화만은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우리가 주고받은 당연하고 다행인 구원에 대해서만은. (157-159, 구원은 셀프, 하던 나도 이제 가끔은 구원도 외주,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내가 만약에 네 앞에서 단무지를 먹으면 헤어지자는 신호인 줄 알어. 난 그만큼 그게 싫으니까.”
“괜찮네, 서로 예의도 지킬 수 있고.”
나는 일부러 단무지를 두개씩 집어 먹으면서 답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헤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약함을 감추는 건 내 마음과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순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최종의 마음까지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데 가까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 어려웠다. 슬프면 슬프다고, 상처가 있으면, 상처가 있다고, 떠날까봐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전적으로 머리를 자를게.“
”와, 정말 신선하다.“ 순신이 장난스럽게 놀렸다. (195, 너랑 헤어지는 것만큼이나 단무지가 싫어, 하는 풋풋 로맨스.)

-“그냥 내가 나인 게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점 남은 연어롤을 보다가 팔짱을 끼고 정작 마음과는 다른 말을 꺼냈다.
“대학은 안 가? 공부하면 되잖아.”
순신은 손을 풀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야.”
“노력하지 않는 거지. 노력하면 왜 안 돼, 변명이지.”
“운 좋은 사람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비꼈다.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왔고 안국역 출구로 나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우리가 만난 이래 가장 냉랭한 밤이었다. (201, 크, 드라마 같은데 또 뭔가 디테일한 연인들의 다툼과 멀어짐… 금희언니 언제부터 연애소설 장인이었더라…‘나의 사랑 매기’부터인가...)

-장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209-210)

-“머리는 무슨 의미야?”
밥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순신이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최대한 무심한 체하고 싶은지 시선은 식당 안 작은 텔레비전에 두었다.
“아는 대로잖아.”
순신은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다. 거기에는 내가 처음 보는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나도 이거 먹는다.”
순신이 단무지를 집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에 넣고 씹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나는 순신이 단무지를 씹을 때면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구나, 단무지를 씹을 때면 얘가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싶어서 나는 그냥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순신을 더는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몰아넣은 듯했다. 어떻게 이러냐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는 서울용 남친이고 강화 가면 강화용이 따로 있느냐고, 자기도 믿지 않으면서 억지를 썼다. 만둣집을 나오고 나서도 그 상처는 멈출 리 없었고 나중에는 내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야, 너 성당 다니는 애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도로 맞은편에는 그 여름 우리가 서 있었던 가회동성당이 눈에 덮여 있었다. 그 앞으로 수정테이프를 길게 그은 듯한 횡단보도의 흰 줄들이 보였다.
“성당 다닌다매, 구원이 있다매?”
순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머리는 왜 자르고 나타났냐고 대체 왜 이러느냐고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때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주지 못한 일을 나는 오랫동안 후회했다. (220-222, 미스터리 소설, 역사 소설, 누가 뭐라해도 나는 이 소설을 연애소설로 읽었다. 이 부분의 떡밥 회수와 찢기는 마음에 내 마음도 찢어졌다… 다들 온실만 말하지 순신이와 영두의 풋사랑의 기승전결은 아 내가 귀 기울이지 않았구나 스포일러 할까 봐…. 스포일러라서 죄송합니다…그렇지만 이래야 보고 싶지 않겠나. 유 스틸 마이 넘버원, 하는 이어폰 건네던 다른 소설의 장면도 왠지 생각난다.)

-왕주무관의 표정은 큰 결단을 내린 사람처럼 엄숙했고 어느 면에서는 거룩함까지 풍겼다. 텃새 중에 가장 작지만 벼랑을 오가며 용감하게 먹이를 찾는 굴뚝새의 오라가 풍겼다. (…)
“장과장은 어떻게 하고요?”
“기러기 아빠거든요. (…) (248, 세번째는 굴뚝새, 네번째는 기러기로세. 아니 참 장과장은 어치인 줄 알았는데 기러기이기도...수리 보고서라고 흰죽지수리 어쩌고도 나왔는데 우리 금희언니의 언어유희는 경애가 경애하고 사랑하는 매기도 부르고 갑자기 페퍼로니 출신도 되고 그렇다. 392쪽에서 산아 친구 스미는 벌새가 되었다.)

-부후(250):목재균이 분비한 효소로 목재성분이 분해되어 조직이 변하고, 변질, 파괴되는 것. (출처: 산림청 기관안내 색인 중. 한자어는 어려운데 영어로는 그냥 decay다. 궁금해서 구글링하니 부후가 뭔지 바로 ai가 알려주는데 불신의 아이콘은 산림청 홈페이지 기어들어갔다.)

-“산아야,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갇혀버리는 일 같아. 갇혀서 내가 나 자신을 해치는 것.”
산아는 고개를 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굴을 적신 눈물이 어둠 속에서도 눈길처럼 반짝였다.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산아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었다.
“그럼 하느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317-318, 김금희 소설가는 ‘나의 폴라일지’에서 뒤늦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내비췄고, 소설 곳곳에서 그런 종교적 흔적이 성당 다니는 아이, 내걸리는 시편 구절 같은 것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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