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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 단 한 번의 삶
  • 김영하
  • 15,120원 (10%840)
  • 2025-04-06
  • : 208,716

나의 글은 매번 나를 향한다. 타인을 언급할 때조차 그를 거울삼아 나의 흔적을 찾는다. 리뷰를 써도 글의 정체성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읽고 쓰느냐 그냥 쓰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떤 책을 읽어도 도착지는 내가 되어버린다. 언제부터였을까. 글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200쪽도 되지 않는 한 권의 책에서 답을 발견한다.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은 세 사람의 삶을 덤덤하게 써 내려간 산문이다. '이 세상으로 나를 초대하고 먼저 다른 세계로 떠난 두 분'과 두 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의 삶이 담긴다. 본문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두 분'이란 글자가 시선을 붙든다.

당신들의 삶이 여든 해를 넘기면서 종종 마음의 준비를 하는 나를 돌아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세상에 덩그러니 던져진 아이마냥 자식은 아직 두 분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지 못한다. 과속 방지턱에 걸린 것처럼 두 글자의 둔턱을 넘지 못해 한참을 서성인다.

 

책의 문을 열고도 분량에 비해 오랜 시간 머물던 책이다. 4월 28일, 5월 1일, 5월 3일. 사흘 동안 대략 여덟 시간에 걸쳐 읽는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다. '단 한 번'이라는 문구가 건네는 간절함 때문일까, '삶'이라는 한 글자가 주는 무게감 때문일까.

작가는 이 책을 가리켜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글'이라 칭한다. 부모님을 떠나보낸 후 당신들과의 인연을 회상하며 자식의 관점에서 두 분의 삶을 돌아본다. 작가로서의 삶을 포함하여 신변잡기적인 일상을 그린다. 자서전을 보듯 작가 개인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순간순간의 사유들이 나의 삶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한 인간의 삶은 특별하면서도 보편성을 띄는가. 묘하게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김영하 작가와 함께 산책하며 지나온 삶을 주고받는 대화의 시간을 보낸 느낌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맞장구를 치고, 대부분의 문장 앞에서는 가만히 경청하며 나의 삶을 들여다본다.

 

모두에게 나쁜 문장은 없다. 모든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문장의 진동수가 내 삶의 파동과 얼마나 잘 맞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의미의 무게감과 문장의 속도감이 나와는 잘 맞았다. 공명의 순간들이 모여 심장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이 '미래'라는 발상이 인상적이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라는 해석에 동의한다. 무의미해 보이는 시도조차 미래의 어느 시점에선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지난 20여 년의 삶을 가만히 겹쳐본다.

엄청나게 거대한 의도가 있던 건 아니다. 리뷰를 한 번 써 볼까? 문장이 너무 길어지니 시를 한 번 써 볼까? 마음이 답답하니 글로 한 번 표현해 볼까? 사소한 선택 끝에 나의 글은 조금씩 흘러나왔다. 시작하면서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한 적은 없다. '해 볼까?' 생각이 들어 그저 한 것뿐이다. 김영하 작가의 말대로 지금에 맞춰보니 지나온 서사가 의미 있게 되살아난다.

 

'공양주로 일하던 / 어미의 소원은 / 이팝꽃처럼 솔솔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내 새끼 뱃속에 담아 / 배불리는 것이었다 // 부처님 공양하고 / 남은 밥 찐 도시락 / 어느 날 삭아버려 / 축 늘어진 이팝꽃 / 자식은 밥을 버리며 / 철없이 투덜댔다 // 30년 뒤 절 마당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이팝꽃처럼 솔솔 / 지어주고 싶었지 / 버려진 이팝꽃은 / 노모의 마음속에서 / 여전히 뜨겁게 / 피어나고 있었다' (시 '이팝꽃처럼 솔솔')

'평생 남의 차 바퀴만 / 만지작거리던 홍서 옹 / 나이 팔십에 자가용 생기셨다 // 좌석은 하나 / 몸통만한 두 바퀴 / 침대 옆에 얌전히 접혀 / 주차된 자가용 // 장애인 화장실로 운전하는 / 무면허 대리기사 채 여사 / 니 아부지 늘그막에 호강한다며 / 말간 웃음 지으신다 // 왼 다리엔 통통한 부츠 / 오른 다리엔 하얀 스타킹 / 우아하게 다리펴신 홍서 옹 / 말간 웃음 지으신다 // 천천히 흐르는 물줄기 / 보글보글 가벼운 비누거품 / 해사해진 얼굴 위로 / 이슬 머금은 은잔디 // 공간의 바퀴가 돌면 / 집이었다 병원이었다 / 벽이었다 커튼이었다 / 햇살은 빗살이 되지만 // 당신 멋지다 / 몸통 닦아주는 손길에서 / 안 아파 / 웃음짓는 얼굴에서 / 따뜻한 물감 흘러나와 / 서로 마음에 그림을 그리신다 // 시간의 바퀴를 / 함께 돌려오신 당신들은 / 사랑한다 말을 할 / 필요가 없으셨다' (시 '바퀴')

'심장에 담긴 얼음 가까스로 꺼내보니 / 뼛조각 부서지듯 허공 향해 우수수수 / 새하얀 사막을 타고 검은 강물 흐른다. // 막막한 종이 위에 하릴없이 서성이다 / 찐득이 흐르는 글 물끄러미 바라보니 / 시 안에 물컹한 얼굴 거울인 듯 나를 봐 // 칼바람 덩그러니 여전히 난 혼자지만 / 신문지 덮은 듯이 살포시 따스해져 / 또 다시 기대어보다 세상 향해 흐른다.' (시조 '거울 시')

 

닥치는 대로 글짓기 대회에 나갔을 때, 좋은 결과를 안겨준 시들은 경험의 결과물이었다. 절에서 공양주로 일하신 어머니의 고생스런 시간은 5월의 시 '이팝꽃처럼 솔솔'이 되어 훌훌 날아간다. 갑작스런 무릎 수술로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잠시 섬망까지 온 아버지의 고통은 '바퀴'라는 시와 함께 굴러간다. 외롭고 시린 순간도 시조 '거울 시'가 되어 말갛게 나를 비춘다.

고통은 현재를 힘겹게 만들지만 심장에 담긴 그것은 고스란히 시의 소재가 된다. 단지 나는 시어를 낚는 어부가 되어 고통의 언어들을 건져내 물기를 툭툭 털기만 하면 되었다. 정확하게 그리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느낌으로만 실체를 인지할 수 있는 마음을 꺼내고 싶었다.

고통은 매번 뜨겁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면 화상을 입는다. 반면 고통으로부터 너무 멀어지면 마음이 시리다. 삶이 어느 정도 흘러간 지금은 고통을 껴안을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듯하다. '글'이라는 장갑을 끼고 고통을 어루만지는 방식이다. 뜨거운 고통을 품은 글은 난로가 되어 시린 마음을 데워줄 수 있다. 글로 고통을 사랑하는 것, '글 러브'다.

 

고통 없는 삶은 없다. 인지를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의 체온처럼 고통에는 늘 디폴트 값이 존재하는 듯하다. 봄을 걸어가는 순간조차 공허의 형태로 서성이는 고통을 감지한다. 본능적으로 나를 향해 초점을 맞추는 셀카를 글로 찍으며 조금씩 심장을 데운다.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의 값은 0(1/∞=0)'이며,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 번의 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는 작가의 문장이 많은 위안을 준다. 내일을 향해 발걸음을 뗄 수 있게 해주는 도움닫기 판을 마주한 듯 든든하다.

글 쓰는 삶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요즘, 지난 시간을 종종 되감기 한다. 모든 날이 좋았다는 도깨비님의 대사처럼 모든 순간이 신의 한 수 인양 의미 있게 되살아난다. 그러니 노래 제목처럼 삶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고통이 담긴 삶을 글로 감싸 안으면, 고통은 따스한 꽃으로 피어나 심장을 데워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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