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기, 이병철 그리고 중앙일보
이 발포로 민중들의 투쟁은 더욱 격화됐고, 4.19혁명이 마침내 성공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당연히 서울에서 발포를 최종 명령한 사람이 누군지에 대한 검찰 조사가 시작됐다. 사망자만 약 100명에 부상자만 450여 명이었다. 민중들을 폭도로 몰아 총질을 명령한 책임자를 찾는 일은 혁명의 뒤처리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검찰 수사 결과 경찰의 발포 최종 명령자가 바로 홍진기로 밝혀졌다. 1960년 8월 검찰은 홍진기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들어선 군사법정마저 홍진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홍진기는 항소심에서 무기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그리고 1963년 8월 홍진기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홍진기가 목숨을 건지고 특사로 풀려난 데에는 홍진기를 ‘평생의 동지’로 여겼던 이병철의 역할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이병철이 어떤 방식으로 홍진기를 감옥에서 ‘꺼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병철이 홍진기를 첫 만남 때부터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그를 출소시켜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1967년 이병철은 자신의 3남 이건희를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시키며 두 가문은 사돈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홍진기는 1968년 <중앙일보>의 사장에 오른 뒤 평생을 그 신문사에서 일하며, <중앙일보>가 ‘생명의 은인’ 이병철을 위한 신문이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한다. - <한국 재벌 흑역사 (상)>, 이완배 지음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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