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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의 서재
  • 십자군 이야기 2
  • 시오노 나나미
  • 14,250원 (5%600)
  • 2011-11-03
  • : 4,907
예루살렘에 입성에 성공한 십자군은 이제 방어를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예루살렘 초대 왕은 고드프루아가 맡았으나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인 보두앵이 18년 간 예루살렘 왕을 지켰다. 그 기간동안 십자군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부근 정복을 끝낸 뒤 에데사,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예루살렘으로 세력이 쪼개지면서도 통합 세력을 유지했다.

제2차 십자군의 발단은 에데사를 잃은 일 때문이었다. 그곳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 부근의 십자군 세력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중요했던 것이다. 사태를 심각하게 여긴 로마 교황도 자신이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대리 자격으로 수도사인 베르나르두스를 보내기로 한다. 1차 십자군이 민중들과 봉건 제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번에는 최고 권력자인 프랑스 왕(루이 7세)과 독일 황제(콘라트 3세)가 직접 참전했다. 이는 베르나르두스의 설득이 먹혔기에 가능했다. 또한 1차 때 부족했던 물자 보급 문제를 위해서 이번에는 이탈리아 해양 세력을 이용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다.
다만 규모는 1차 십자군에 비해 소수였는데 그래도 정예병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소아시아를 지나면서 투르크군의 게릴라 작전에 당해 상당수의 병력을 잃고 황제가 부상을 당하는 손실을 입는다. 프랑스군도 적의 기습으로 병력을 일부 잃고 한동안 고립을 겪었다.
그래도 목적지인 다마스쿠스를 위해 남은 병력은 이동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군량도 부족해지고 십자군에게 특히나 익숙하지 않았던 극심한 더위는 그들을 곤란하게 했던 것 같다. 게다가 이슬람의 우누르였던 알레포 지역의 누레딘(그의 아버지인 ‘장기‘가 지략가였다)이 다마스쿠스에 온다는 소식을 듣자 십자군은 다마스쿠스에서 철수를 결정한다. 이로써 2차 십자군 입장에서는 전쟁이 실패했다.
독일 황제와 프랑스 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유럽으로 돌아간다. 로마 교황도 실패의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 교황 대리로 떠났던 베르나르두스가 그럼에도 성인에 올랐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다치고 죽은 병사들은 자신의 고향도 아닌 외국의 어느 산야에 묻혔으나 책임을 지지 않았던 사람은 정작 성인에 오른다는 것이...

당시 이슬람의 시아파 주류는 셀주크투르크족이었고 수니파 주류는 아랍족이었다.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힘이 약해지자 재상인 샤와르의 아들 카릴이 수니파 권력자였던 누레딘에게 군대를 요청한다. 이때 장군 시르쿠의 조카였던 살라딘이 이집트로 향했다. 샤와르가 급사망(!)하면서 살라딘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 누레딘은 카이로(시아파)까지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고 권위자는 누레딘이었지만 살라딘은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전진기지를 세우고 길을 나선다. 이때 유럽 세력은 올 여력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위해 나선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종교 기사단,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병사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세력 중심의 군대가 아코를 떠난다. 다마스쿠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목을 막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갈릴리 지방을 손에 넣는다. 사실상 팔레스티나 지방의 항구도시를 수중에 넣는 쾌거를 거둔 것이다.

1차 십자군 방어를 맡게 된 발리앙 이벨린은 60여명 정도로 예루살렘을 맡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는 기지를 발휘해 예루살렘 내 있던 16살 이상의 장정들을 모두 기사로 임명한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에서 그는 회담을 택한다.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생각이었기에 그의 결정은 현명했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이슬람 세력은 그렇게 88년 만에 예루살렘 성도를 자신의 영역으로 얻게 되었다.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수도사와 기사의 겸업 집단인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의 산물이다. - P.34

중근동에 건설된 십자군 사이의 성채는 대표적인 것만 해도 백개가 넘는다. ‘성채가 아니라 요새‘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 소규모 건축물과 감시원만 두고 있던 탑까지 더하면 2백개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방어 시설이 근동 서쪽 절반의 좁은 지역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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