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사건의 연쇄 또는 연결은 정확히 말하면 자의성(즉 특정 사건들 사이의 특정 연결을 특권적 연결로 삼는 다소 임의적인 선택)을 적용할 때만 나타나는 환원적 설명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시장에 출시된 최신형 스마트폰을 원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부유한 동료에 대한 열등감의 희생자여서, 혹은 그 스마트폰의 특정 기능이 그에게 필요해서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사실일 수 있으며, 위계질서 없이 공존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 사건들 사이 특정 연결에 특권을 부여하는 선택은 자의적일 수 있으며, 이 자의성은 현실의 왜곡이므로 가능한 한 적어야 좋다.
ANT는 라투르가 비서구 문화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 문화(특히 과학기술)에 인류학적 분석을 적용하면서 시작되었다. 라투르는 여기에 그레마스의 기호학적 접근을 결합해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벗어난 탈인간중심적 사회과학의 길을 처음 열었다.
‘번역’이란 용어는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헤르메스(Hermes)≫ 3권에서 빌려 온 것이다. 세르는 정보 이론을 바탕으로 번역이 신호를 전송하고 왜곡하는 의사소통 행위라고 보았지만, 칼롱과 라투르는 이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재해석해 특정 존재가 다른 존재들의 대표자 또는 대변인으로 등장하는 끊임없는 재배치를 설명한다.
행위자와 연결망은 항상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하이픈이 붙는다(actor-network). 행위자는 분해될 수 있으며, 그 구성 요소들은 해체되고 재조립될 수 있다. 따라서 행위성(agency)은 개별 행위자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망 또는 ‘집합체’ 내에 분포해 있다. ‘누가 또는 무엇이 행위 하는가’는 특정 연결망에서 어떤 효과가 생산되는지 조사해야만 파악·결정할 수 있는 경험적 문제다.
라투르는 근대성에 대한 학계의 상식과 달리 "우리는 결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다"는 도발적 명제를 제기했다. 근대인들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녔음에도 ‘번역’ 작업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을 계속 혼합했지만, ‘정화’ 작업으로 이러한 하이브리드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하이브리드들의 증식을 가속해 왔다.
근대적 헌법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물의 의회’ 개념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세계인 코스모스를 점진적으로 구성하는 정치, 즉 ‘코스모폴리틱스’의 제안으로 이어진다. 이는 어떤 존재든 당혹→협의→위계화→제도화의 정당한 절차를 거쳐 집합체의 구성원이 되는 제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코스모스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 그리고 비인간 존재들과 공유하는 하나의 지구를 나타낸다. 코스모스 개념은 지구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존재들이 있으며,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들에게도 정치적으로 고려해야 할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라투르는 사회를 잘 식별되고 분리된 영역으로 간주하면서 ‘사회적 행위’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사회학적 용어로 제공하는 과학인 전통적 사회학을 ‘사회적인 것의 사회학’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 대안인 ‘결합의 사회학’은 다양한 결합들을 추적하고 그 결합들의 안정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분석해 사회적인 것을 형성하는 집합적 과정을 재조립하는 데 관여한다. 이런 결합의 사회학을 가리켜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라고 부른다.
라투르는 과학을 ‘상대화’하지 않으며, 과학이 ‘단지 다른 형태의 믿음’, ‘또 다른 문화’라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는 탈근대주의자도 아니고 상대주의자도 아니다. 다양한 존재양식들을 각각 ‘그 자체의 용어로’ 조사할 수 있도록 허용할 뿐이다. 라투르의 존재론은 과학의 가치를 격하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다른 가치들을 격상한다. 그것들은 각각 그 자체의 용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이아’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소설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은 과학자인 제임스 러브록에게, 생명체들이 지구의 대기(더 구체적으로는 지구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산소 수준과 이산화탄소 수준의 균형)를 조절한다는 그의 가설을 부를 이름으로 ‘가이아’를 제안했다. 유기체들 대신 생물권을 자연 선택의 단위로 간주한 것에 대해 진화생물학자들에게 비판받았던 러브록은 나중에 가설을 수정해 가이아 이론을 발전시켰다. "간단히 말해 유기체들과 물질적 환경은 단일한 결합적 시스템으로 진화하며, 현재의 생물군이 무엇이든 그들이 거주 가능한 상태에서 기후와 화학의 지속적 자기조절이 이 시스템으로부터 창발한다."(Lovelock, 2003: 769
러브록이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의존해 이 존재들의 집합체를 인간 활동에 의해 방해받을 수 있는 자기조절시스템으로 이해했을 때, 라투르는 러브록을 따라하기를 완전히 멈추고 그러한 ‘메타디스패처’는 없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타자로서의 존재들’, 즉 "공약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든 것은 결합될 수 있고 결합되어야만 하는가"(Latour, 2013: 461)라는 질문을 자극하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다원적 집합체(plural collective)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가이아’에 대한 호소가 우리를 통합시켜 주거나 인간과 비인간의 가장 포괄적인 공동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인종적 우월성의 수사학을 주장하는 서구 정당들의 대두는 단순히 낡은 파시즘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이들 현상은 우리의 근대적 제도와 습관이 지구가 인간 활동에 폭력적으로 반작용(react)하고 있다는 사실에 응답할 능력을 결여하기 때문에 초래되는 독특한 결과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라투르는 인류에게 "우리의 정치적 정동이 새로운 목표로 향할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촉구한다(Latour, 2018: 2).
생태화 정치는 더 이상 마르크스의 생산 시스템 분석을 통해 사유할 수 없는데, 그 분석이 자연을 인간 활동의 맥락이자 자원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관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라투르는 우리가 생성의 실천들(practices of engendering)을 통해 사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은 자원들로 이루어진 주어진 세계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로부터 시작하지만, ‘생성’은 먼저 이들 자원과 그것들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태어난 이 세계가 계속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무엇일지 고려하는 가이아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기후변화가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생산’(즉 경제 성장)에 충격을 가할 뿐 아니라 가이아의 거주 가능성 조건을 급격히 변형해 ‘생성’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슐츠는 라투르가 말한 ‘생성의 실천들’ 속 계급들이 생산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에서 차지하는 영토적 위치에 의해 정의된다고 본다(Schultz, 2020). 따라서 단지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접근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적 계급들과 달리, 지구사회적 계급들은 사회 집단들의 번영과 생존을 허용하는 더욱 광범한 존재의 물질적 조건들(땅, 식량, 물, 옷, 집 등)에 대한 의존과 접근에 의해 정의된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생존과 재생산은 모든 사회와 그 역사의 제1원칙이었다. 따라서 인간 사회와 사회적 역사에 대한 분석의 첫 번째 단계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인간 집합체들이 생존할 수 있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사람들이 먹는 음식, 마시는 물, 입는 옷, 사는 집 등)과 그것들이 출현하게 된 과정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재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을 생산하는 것을 사회적 역사의 토대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인간 존재들의 재생산에 한정된 것이었다.
계급 투쟁은, 오늘날 다시 명백해지듯 언제나 지구사회적 갈등의 얽힘이었다. 경제화를 통해 이를 협소하게 틀 짓는 것은 지구적 존재들(인간 포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생태계급은 경제화 대신 거주 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신학은 현대의 공적 공간 한복판에서 작동하는 종교에 대한 비전으로, 자신의 행위성이 남긴 발자취에 민감하고, 더 크고 새롭게 출현하는 전체의 구성 요소로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며, 따라서 세계에서 완전한 정치적 행위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 주체들을 생성한다.
라투르는 종교의 존재양식을 ‘생존’의 관점에서 정의하면서 종교가 세상에 내재된 자신의 상황에 대한 ‘돌봄’과 ‘주의’라는 윤리적 태도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종교는 존재의 내재적 조건들에 충실한 행위를 요구하며, 미래의 궤적을 결정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키워 준다고 본다. 라투르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한 생태적 도전 때문에 종교가 만들어 내는 이러한 윤리적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직 종교적 존재양식만이 인류세 시대에 필요한 정치 활동 양식을 창출하고 배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