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형상화하기, 자코메티가 종종 말했듯이 삶이라는 이 경이를 형상화하기, 그것의 움직임을 형상화하고, 눈이 아니라 눈길을, 눈길과 그 눈길이 바라보는 모든 하늘을, 그리고 그 눈길 안에서 질주하는 삶을 형상화하기?그는 인간이 하는 어떤 일도 눈길의 광채만큼 가치 있지 않다고, 자신은 오직 눈길을 재현하기 위해 조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실패를 계속해야 했고, 고꾸라져야 했다. 결과에 대한 보장 없이 실패해야 했고, 그 모든 암중모색과 망침, 후회, 망설임, 엉김, 돌출, 사고, 비틀림, 추함, 자신이 견뎌낸 모든 실패와 불확실성을 작품에 담아야 했다.
쉬지 않고 고집스레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건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저 자기 내면에서 나아가는 것일지라도.
그는 계속 걸어야 했다. 걷는 행위가 어쩔 도리 없이 그를 끔찍한 난파로 이끌지라도.
심장이 고동치는 한 걷고, 걷고, 걸어야만 했다.
허공에 사람들의 머리가, 공간에 에워싸인 머리들이 보였다. 내가 보고 있는 머리가 어떻게 정착될 수 있는지, 어떻게 시간 속에 확고하게 고정될 수 있는지 처음으로 명료하게 지각했을 때, 나는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워 몸을 떨었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은 더이상 살아 있는 머리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다른 오브제들과 마찬가지인 하나의 오브제였다. 아니, 그것은 어떤 오브제와도 닮지 않았다. 산 동시에 죽은 무언가를 닮았다. 나는 공포의 비명을 내질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이었다. 이 환영幻影은 자주 반복되었다. 지하철에서, 길에서, 식당에서, 친구들 앞에서….
〈걷는 사람〉은 나에게 최종 목적지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빠져나갈 수 없는 길을.
그동안 내가 보기를 거부해온, 출구 없는 길을.
종착역을.
그것은 〈걷는 사람〉이 이미 발을 들여놓은 땅으로 내가 돌아갈 차례가 곧,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주었고, 그 생각은 나를 공포로 짓눌렀다.
〈걷는 사람〉은 우리에게 인간의 취약성만 말해주는 게 아니라, 그가 걷고 있는 땅의 취약성도 말해주는 것 아닐까?
그날 밤 나를 사로잡았던 불안의 원인들이 밝혀지자, 기이하게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친근한 일들이 중요해졌다. 산책하는 것, 20구 거리를 거니는 것, 콜리브리 카페 테라스 자리에서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지막 커피 마시듯 마시는 것, 고양이 한 마리가 창가로 풀쩍 뛰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을 다시 읽는 것, 분홍빛 감도는 하늘로 날아가는 찌르레기 떼를 눈으로 좇는 것, 베르나르와 함께 아무 얘기나 나누고 르프레드Lefred의 그림을 보며 함께 웃는 것. 이 모든 사소한 일들이 나에게는 난생처음 접하는 행복처럼 보였고, 저녁까지 걷고 싶은 욕구를 안겨주었다.
예술은 사는 일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긴다는 사실에 맞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술이 우리의 기쁨과 삶에 대한 허기를 늘리기도 한다는 것. 예술이 죽음에 당당히 도전하거나 냉혹하게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하기도 한다는 것. 몸과 영혼이 포맷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거부를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 시대는 더이상 불가능을 희망하지 말라고 엄명하는데 예술은 불가능을 좇는 우리의 취향을 자극하기도 한다는 것. 유용한 목적만 좇는 정신이 곳곳에서 우세할 때 예술이 무용한 것에 대한 우리의 취향을 되살리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꿈을 꾸고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강렬한 욕망을 다시 솟구치게 하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유년기에 무척 좋아했던 색채들, 특히 빨강에 대한 취향, 잊어버린 취향을 우리에게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형태와 사물에 대한 취향, 그것들의 소재와 빛에 대한 취향,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주어진 단순한 사물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