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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의 서재
  • 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
  • 브뤼노 라투르.니콜라 트뤼옹
  • 15,300원 (10%850)
  • 2025-03-12
  • : 4,700

브뤼노 라투르는 새로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은퇴하고 편안히 늙다가 평화로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들의 어릴 적 여름과 그들 손자 세대의 여름은 비슷할 수도 있었다. 물론 기후는 유동적이었다. 그러나 기후가 어느 한 세대의 노화와 나란히 가지는 않았다. 현재 나의 세대, 즉 베이비부머세대의 쇠락은 기후의 쇠락과 함께 가고 있다. 나는 내 세대의 역사에서 8월을 떼어내어 내 손주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고 늙어가고 죽을 수가 없다.” - P36


작년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을 독서 모임을 통해서 읽었던 적이 있다. 시간이 없어 입문서를 읽지 못하고 그 책을 바로 읽었기에 책을 소화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 입문서를 읽어보자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 또 수개월이 지나가버렸다. 최근에 이 책이 나온 것을 계기로 읽어보자 싶어 선택했다. 

우선 책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판형은 작은데 양장본이고 안의 글자 크기도 작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책의 제목을 잘 선정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의 내용이 브뤼노 라투르가 타계하기 전 인터뷰를 담은 기록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라투르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력과 사상에 대한 소회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20세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무엇이 근대적이고 근대적이지 않은지 진술한다고 해서 명확해지는 것은 없다. 

“근대인은 끊임없이 자기가 처한 상황을 부인했습니다.”


과학 기술과 근대 문명은 인간 주체를 강조하면서 세계를 분리하고 구별하면서 이를 유지, 가속화해왔다. 라투르는 근대 문명을 유지해온 이 합리론은 세계적 변화로 인해 더는 지속될 수 없다고 말한다. 기후 위기와 바이러스의 공격은 이제 더는 우리가 예전처럼 살 수 없음을 자각하게 했으니까 말이다. 과연 앞으로 인간 생존이 가능한 조건으로 지구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너무나 큰 명제 앞에 서면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 든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활양식을 좀 바꾸어볼까.’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여진다. 근대화는 맹목적이어서 문제였다고 라투르는 지적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 의문을 품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구성’은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 선법과 악법을 가려내는 역량을 말합니다. … 구성의 대안적 메시지는 논쟁에 뛰어들고, 진보와 옛 것의 분리를 포기하고, 거주 가능성이라는 근본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생산보다는 거주 가능한 조건을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할일이 많지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도 없지만 이제 우리가 근대인이었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작업장은 완전히 열려 있어요. - P60~61


라투르는 영국의 생리학자이자 공학자인 제임스 브룩이 구상한 개념인 가이아 이론을 가져왔다. 원래 가이아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가져온 개념으로 가이아는 모든 신들을 품은 모신에 해당한다. 그는 변한 지구적 환경에 맞춰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곳의 이름을 ‘가이아’라고 명명했다. 


기술한다는 것은 앉는다는 것,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 토대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철학과 존재론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 나는 늘 실용적이고 경험적이라고 할 만한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래서 내가 찾은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의존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적어보시오." 혹은 "당신이 무엇에 의존하느냐가 영토를 정의할 겁니다." - P77~78

세계를 인식할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생각해보기를 당부했다. 여기서 라투르는 존 듀이의 말을 인용하는데 신발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어디에 뭐가 있어서 발이 아픈지 안다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이 어디이며 내가 기대어 살아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해나가는 작업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학파를 만들지 않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 맞는 진정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학문 분과들이 집합적으로 작업하는 모델 말입니다. 그 학문 분과들은 매체도 각기 다르지만같은 문제에 접근하지요. 이러한 모델은 과학적 생산물을 내놓고 A급 혹은 B급 학술지에 발표한 후에 대중에게까지 확산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연구자 못지않게 혼란에 빠져 있는 대중을 향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모델이지요. - P110 

라투르가 오늘날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완전히 다른 학문 분과들 간에 집적 결과를 내놓기 위해 하는 노력들을 강조했던 점이라고 본다. 특히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 하나의 학문의 이론과 실험 결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대학에 각종 융합 학부가 생기고 학과와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은 어느새 우리에게 자연스러워졌다.


"여러분은 과학자니까 사실을 생산해내십시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이자벨 스텡거스가 자기 방식대로부단히 보여주었잖아요. 사실들은 희박하고, 과학적 발견은 정말 희소하지요. 어디서나 통하는 과학적 방법에 대한 관념, 그러니까 하얀 가운을 걸치면 아무 말이나해도 과학적 권위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관념은 완전히 허구입니다. 그런 건 사기예요. - P131

그는 근대를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과학(적 증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알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과학은 반증가능성이 있는 만큼 어떤 가설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 ’팩트’로 남아있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이는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을 접근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라투르는 철학이 여러 구성원들이 가진 다양한 양식들이 유지되기 위한 방식을 제공해준다고 말한다(구성원들이 충돌하고 갈등할 때 어떤 방식으로 상호 존중하며 나아갈 수 있을지 알려준다).

어떤 존재가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다른 무엇을 거쳐야 하지요. 내가 여기 와서 당신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 그전에 아침부터 먹어야 했던 것처럼. 아주 평범한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나는 삶의 끝까지 나를 지속하기 위해 계속해서 타자를 집어삼킵니다. 이러한 성질을 지니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시간 속에서 지속할 수 없어요. - P169

그것은 존재로서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토대를, 나머지 모든 것을 떠받치는 기저를,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그것을 정의해주지 않습니다. 철학은 겸손한 실행이요. 더욱이 그 또한 글쓰기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철학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P172


라투르 입문서로 제격인 책이었다. 내용이 쉽고 친절하게 쓰여져 있어 저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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