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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방식
거리의화가  2025/06/11 15:33
  • 걷기의 인문학
  • 리베카 솔닛
  • 17,550원 (10%970)
  • 2017-08-21
  • : 5,704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걷기는 여러 효능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햇빛 아래에서 걷는 일은 우울감을 떨쳐버리는 데 정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어떤 일에 부딪치거나 관계상으로 어려움이 생길 때면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걸었다. 그런데 나뿐 아니라 과거의 문인들이 걷기를 예찬하고 있다.

어쩌다보니 솔닛의 에세이를 오랜만에 읽었다. 처음 그녀의 에세이를 추천 받아 읽고 반해서 더 많은 작품을 읽어봐야지 했었다. 그러나 다른 책들을 읽느라 또 한동안 방치 상태가 되었다. 무심코 책장에 꽂아둔 이 책(구입한 것은 한참 전인데)을 발견한 것은 아마도 얼마 전 짧게나마 여행을 갔기 덕분인 것 같다. 걷는 것은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나를 들여다보고 세상을 만나는 또 하나의 여행이다. '한 편의 이야기와 한 번의 여행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걷기 예찬론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어떠한 이유로 걷기를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확인하는 일은 꽤나 흥미로웠다. 나는 걷기하면 나처럼 스트레스를 받거나 해서 도피용으로 휴식을 위한 걷기만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이 다가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고백록을 지은 루소는 걷기를 하며 사유에 천착한 전형적인 경우다. 그는 평생에 걸쳐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는데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고 한다. 편집증이 있어 관계에 늘 어려움을 겪어서 걷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화시켰다고 보인다.

키르케고르는 루소처럼 다양한 지역을 유랑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역지(코펜하겐)에서 지내며 틈틈히 걷기를 행했다. 그는 걷는 동안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기에 걷기와 생산 노동에 비슷한 점이 있음에 자연스레 주목했다. 그는 알려져서 사람들 눈에 띄기를 원했으나 스스로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죽는 순간에도 걷고 있었다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결말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루소, 키르케고르는 행동 패턴과 방식은 달라도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18세기에 접어들면 걷기의 목적이 진화한다. 이때 이후 다양한 여행 코스와 안내서, 여행자 모임이 만들어지게 된 덕분이다. 앞선 사람들의 여행기를 통해 여행의 욕망을 키운 상태에서 여행 코스마저 다양해지니 다양한 루트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다양한 사람이 오가고 교류하니 자연스레 수많은 예술 작품도 쏟아져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남성에 비해 공간적, 사회적 활동의 제약이 컸던 여성들은 이때 조금씩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워즈워스는 걷기가 여행의 수단이 된 대표적인 철학자다. 그는 자연과 시골, 유년기를 예찬한 시를 많이 지었다고 한다. 평생 걸은 거리가 29만 킬로미터에 육박한다니 참으로 놀라웠다(나는 과연 최후의 날이 되면 측정할 수 있는 걸음수가 얼마나 되려나 궁금해졌다^^;). 반면 디킨스는 전형적인 도시의 산책자였다. 그의 작품 배경이 런던이었던 만큼 오랫동안 그는 런던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19세기에는 떠돌이와 방랑자들의 자기 고백이 이어지며 보행수필이 시장의 주류가 된다. 특히 장거리 보행자가 늘어나면서 공간의 확장에 따른 이야기의 상상력은 더욱 극대화된다. 등산 서사시와 등산 회고록 등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발터 벤야민은 파리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며 관련 책을 쓰기 위한 수집을 하고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벤야민이 연구를 진행할 때만 해도 파리는 보행자들을 위한 천국 같은 도시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솔닛이 가보았을 때는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도시에 보행자들을 위한 기능이 많이 줄어서 아쉬웠다고. 다만 조금씩 파리가 산책자들을 배려하는 방식을 다시 도입중이라고 하니 다행스런 일이다. 


20세기 이후 도시의 개발화가 진행되면서 교외화가 심화되었다. 지금의 서울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서울은 주거비용이 비싸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심에서 벗어나 교외로 이동한다. 도심은 업무 시간이 끝나면 텅 빈다. 울산, 포항 같은 산업 도시는 공장 지역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된다. 저자는 공장화, 기계화로 육체 기능이 점차 퇴화하지 않을까 우려를 표한다. 하긴 자동차가 생기고 나서는 가까운 거리도 자동차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도시에 헬스장이 생긴다는 것은 과연 날씨가 안 좋아서 야외에서 부득이하게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선택해야 하는 대체장소이기만 할까. 저자는 헬스장이 근육과 피트니스를 생산하는 공장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부식을 막기 위한 미봉책이라고 말한다. '보행은 여러 가지 자유와 기쁨, 예컨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 닫혀 있지 않은 멋진 공간, 구속 받지 않는 육체라는 생태계의 지표종이다.'


여기까지였으면 이 책이 다른 책과 별반 다른 책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솔닛은 역시 달랐다. 그녀는 자신을 위한 걷기가 아닌 모두를 위한 걷기를 이야기한다.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일, 환경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서며 걷는 일 등등 말이다. 이때 걷기는 낯선 사람과 함께 걸으며 하나가 된다는 인식으로 걷게 되기에 앞선 걷기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나 이 책에 언급되어 있는 1977년 5월 아르헨티나 광장에서 벌어진 어머니들의 행진은 뭉클했다. 마치 세월호 투쟁을 떠오르게도 했다. 사라진 자식을 돌려내라는 외침은 연대가 되어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이 혁명(육체가 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전히 온전한 사고 원인 규명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되서다.

또한 이제는 너무나 많은 곳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여성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일에 대한 시선에 여전히 불편함이 따른다. 과거에는 단순히 치마를 입고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형벌에 처해지거나 성폭행 등에 노출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남성도 거리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지만 여성은 그 빈도면에서 압도적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걸어도 아무 문제 없는 사회가 정상이지 여성이 홀로 길을 걷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걷기는 문화적 행위이기도 하는 동시에 인간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걷기가 연대이며 걷는 행위는 읽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이야기에 가장 크게 공감이 되었다. 나 스스로도 걷는 행위는 나를 일구어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이자 경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두 발로 읽는 것은 두 눈으로 읽는 것보다 실제적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걸으며 나와 세상을 만나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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