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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연극과 시, 두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는 김수열은 거기에 따라 서로다른 미의식을 보여준다. 민족예술상을 수상한 작품 「목마른 신들」이 보여주듯이, 그가 연출한 연극들이 군사 파시즘의 혹독한 억압 속에서 민중의 역사적삶을 풍자·해학. 요설로 용기있게 형상화해낸 작품들이라면, 그의 시들은 그러한 집단의식의 치열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외되기 마련인 개인의식 · 감정의 애틋한 내면 풍경을 잘 보듬어 안아주고 있다. ‘공동체와 나‘ 라는 어려운 명제를 조화롭게 실천하는 그의 예술에 축복이 있기를.
-현기영(소설가)
내가 한때 시인의 꿈에 부풀어 애타고 있을 때였다. 1982년 실천문학에 실린 그의 등단작 「어머니」라는 시를 보고 무릎을 치던 일이 있었다. 문득문득 그의 안부가 궁금했었다. 십여 년이 훨씬 넘어서야 그를 만났고 그와 함께 제주 바다를, 크고 작은 오름을, 마라도와 우도 섬을 걸었다. 흰빛이 일렁이는 산호의 사장에 누워 우리는 쪽빛 제주 바다와 그 하늘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때 그 오름의 길에서 만났던 보랏빛 갯쑥부쟁이 꽃밭의 눈부심이라니.
김수열의 시를 들여다보면 그때 그 오름의 길에서 만났던 갯쑥부쟁이가 떠오른다. 쪽빛 그 싱싱한 바닷물에서 갓 건져올려 피우는 그의 해맑은 웃음이떠오른다. 왜 그리운 것들은 이처럼 멀리 있는 것이냐. 더디고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냐.
-박남준(시인)
후기


어중간하다
살아온 나날이 그렇고 가늠하기 힘든 내일이 그렇다

흩어졌던 글들을 한 코에 꿰면서
문득 시에도 피가 있고 살이 있다는 걸 생각한다
허나 묶어놓고 보니
이건 피도 아니고 살도 아니다
내 삶이 그러했던 탓이리라

지나친 욕심이겠지만
한때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벗들
그러나 너무 멀리 떠나왔다는 생각에
돌아오기를 주저하는 그런 벗들에게
부끄러움의 시편들을 고백처럼 바치고 싶다
나 또한 너무 멀리 왔다고
그래서 이렇게 망설이고 있다고

경진년 초겨울 화북에서
김수열
나는 왜 몰랐을까


책을 정리하는 일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고
아이들은 호호 불면서 유리창을 닦고
나는 책장 앞에서 책을 정리하는데
한나절을 꼬박 매달려도
위칸의 책이 아래칸으로 내려오고
아래칸에 있던 책이 옆칸으로 자리이동을 했을 뿐
너저분하고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진데
책을 정리하는 일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
나에게는 소중한 것부터
버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부터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는 걸
미련이 남아 있을 때- P11
미련 없이 버려야만
마음의 빈칸 하나 가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왜 여태껏 몰랐을까
그 빈칸 있어야 누군가 찾아와
잠시나마 머물다 갈 수 있다는 걸
나는 왜 바보같이 몰랐을까- P12
바람까마귀


하늘이 낮게 가라앉은 날
바람까마귀도 새벽바람을 이기지는 못한다

마음이 깊게 내려앉은 날
사람 사는 일도 사랑을 이기지는 못한다- P17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지상에 나와 있는 모든 것들을 
밤새도록 흔들어놓은 바람이
잠깐 숨 고르고 있을 즈음 나는
바람을 만나러 바람 속으로 간다
바람의 잔해들은
허리 잘린 나무 그 찢겨진 몸통 위에
뿌리째 뽑혀나간 아름드리 가로수 그늘 아래
하얀 이 드러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신호대기선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고
신호등을 쳐다보는데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신호등이 없다
꼬라박아 자세로 엎드려 아무 말이 없다
문득 길이 없어지고
나는 가야 할 곳을 잃었다
갑자기 나는 아무 데도 없다- P20
길 없이 길을 나설 수 없는 나는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

바람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가
바람 속에서 까마득히 길을 잃었다- P21



깊은 산
붉은 노을이 진다

그윽한 섬
파란 물살이 인다

오름마다 물매화 핀다
거기 사람들이 산다

깊고그윽한- P33
갯쑥부쟁이


마음으로야 골백번 넘게 떠났지만
정작 떠남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너는
외돌개 해안 절벽에
아스라히 매달린 너는
사람 없는 섬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에 매달려 한 뼘이나마
그대 곁으로 다가서려고
섬 끝에 발을 내린 채
이미 야위어진 몸으로
섬을 밀고 밀었던 것이다
꽃이 지기 전에
계절이 가기 전에
한순간이나마 함께하려고
파르르파르르 온몸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석 달 열흘 기나긴 날을 애태웠지만 결국
더는 다가설 수 없음을 안 너는
언제부터인가 머리 풀어 보랏빛 꽃향내를- P70
그리운 그 사람에게
하염없이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꽃은 이미 지고
계절도 벌써 가버렸지만
외돌개 해안 절벽에
아스라히 흔들리는 너는
산산이 부서지는 살점들을
애타게 그리운 그 사람에게
오늘도 하늘하늘 날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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