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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곳의 山水를 닮는다. 그럴 것이다. 탄생의 배경이되며 거기서 나온 것을 먹고 자란 데다 사람은 가장 오래 바라보는 것을 닮으니까. 베두인족 눈에 사막의 지평선이 있듯 김수열 시인의 두 눈에는 제주의 푸른 수평선이 들어 있다. 그곳에서 쉬지 않고 출렁인다. 그의 큰 키 또한 한라산에서 왔다. 수직의 산세와 수평의 물결, 그 거대한 두 세계가 붙어먹어 새로운 DNA를 만들었으니 그게 이번 시집 「빙의」이다. 그가 높고 깊은 어떤 지경까지 갔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한창훈(소설가)
맹물 같은 시다. 오래된 소갈증이 사라진다. 시원하고 담박하다. 근데 이놈의 맹물 시가 다시 갈증을 불러온다. 속이 탄다. 좋은 시는 당연 조감이 있어야 한다. 시인은 키가 훤칠해서 당연 눈이 높다. 거시적 통찰이 기본적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키 큰 사람은 싱겁다. 이 말을 하루하루 실천하며 산다. 맹물로 가장 키가 큰 게 강물이다. 그는 강을 세워 논 것같다. 사막에 사는 포아풀도 맹물 한 모금 먹으려고 600미터나 발돋움한다. 그는 또 골목길 가로등과 닮았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늦은 귀가와 훌쩍임과 배웅이 있다. 모퉁이와 구석이 있다. 그 골목 끝자락에 집이 있고, 마루가 있고, 아랫목 이불 속에는 따뜻한 밥그릇이 있다. 나물이 있고, 비린것이 있고, 맹물 한 그릇이 있다. 한국 시 가운데 제주도 국어 선생이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시다. 설명할 게 없어서 멀뚱멀뚱 종 치기만 기다리는데, 눈시울은 젖고 가슴은 먹먹하다.
이정록(시인)
시인의 말


네 번째에서 다섯 번째 시집으로 넘어오는 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한 가지만 꼽으라면 아버지의 죽음이 그것이다.

하여, 이 시집에는 그분의 흔적이 드문드문 박혀있다.
살아생전 아들의 자잘한 글에 돋보기 들이대고 꼼꼼 읽으시곤 했는데…….

부끄러운 이 글에도 눈길 한번 주십사 하면 지나친 욕심일까?
나이가 들수록 내 글의 눈높이가 그분을 닮아간다.

2015년 1월
김수열
빨래


어제를
빨아

오늘
넌다

내일은
마를까- P11
사랑을 배우다


성산포 광치기해안 모래밭
일출봉 배경으로
오리 한 마리
상처 받은 정물처럼 앉아 있다

인기척 있어도 미동하지 않는다
가만히 다가선다

아,
그 곁에
반쯤 해체된
오리 한 마리

죽은 사랑을 껴안은
아픈 사랑의 날갯죽지 위에
아침 햇살이
시리다- P12
아내의 건망증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며칠 전 출근하는데 아무 생각 없더란다 문득 정신 차려보니 차는 삼양검문소 지나 함덕으로 가고 있어 갓길에 세우고 멍하니 있다가 차 돌려 부랴부랴 출근했다며 힘없이 숟가락 내려놓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한마디 거드는데 걱정 말라고 나이 들면 다 그런 거라고 나도 얼마 전 아무 생각 없이 봉개 지나 명도암 입구까지 갔다가 차 돌려 신엄으로 갔다고 심상하게 말해주었다

살다 보면 가끔씩 샛길로 빠질 때도 있다고 말할까 하다가 밥만 먹었다
나무의 시


바람붓으로
노랫말을 지으면
나무는 새순 틔워
한소절 한 소절 받아 적는다

바람 끝이 바뀔 때마다
행을 가르고
계절이 꺾일 때마다
연을 가른다

이른 아침
새가 노래한다는 건
잠에서 깬 나무가
별의 시를 쓴다는 것

지상의 모든 나무는
해마다 한 편의 시를 쓴다- P20
파문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비는
잊지 않고
원만한 것들을 손수 가지고 오신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사는게 이런 거라고

지상의 못난 것들에게
비는
한 번도
모난 걸 보여준 적이 없으시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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