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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함순례咸順禮


1966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으며 1993년 「시와사회」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 시인의 말


지난 한 해 숨가쁘게 달려왔다. 작품으로만 흠모해오던 시인들의 시집 여덟 권을 묶어내는 동안 입에서 단내가 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교정을 핑계삼아 그들이 갖고 있는 詩力을 들여다보면서 무릎 내려치기도 하고 고개 주억거리기도했다. 가야할 길이 어렴풋하게나마 가닥 잡히기도 했다. 과연 일 년을 넘길 수 있을까? 만류하는 이들이 많았다. 안 되는쪽에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딱 일년이다. 그들이 그토록 염려하던... 일 년을 무난히 넘겼다.


이제... 내 피붙이와도 같은 여덟 권의 시집에 또 한 권을 보태려 한다. 나를 세우려 한다. 까마득한 후배를 위해 먼길 한달음에 달려와 구들장 다숩게 덥혀 놓으신 선배님들 계셔서 두렵지 않다. 춥지 않다. 두 발이 뜨겁다.

2006년 성하盛夏 대전에서
함순례
시의 맛과 파장은 아주 싱겁고 엷어서 무미한 진동에 가까워야 하고 그 소극적 운동성이 미세하지만 깊고 먼 여운을 남길 것이라 믿는다. 함순례의 시는 결연한 의지에 차 있지도 않고 세계를 토막내고 비틀지도 않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조용히 스며드는 울림이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가족과 이웃, 자연에 대한 깊고 진솔한 고백들은 순박하고 순정하며 담백하다. 자칫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로 흘려듣기 쉬우나 그것들은 사실 우리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망각 속에 방치해 두었거나 뿌리쳤거나 ‘요금별납‘ 도장을 찍어 멀리 날려 보낸 것들이다. 그 기억들이 지금 다시 살아나 시인의 오늘을 깨우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시인의 손아귀에 쥐어진 분노와 두려움의 「돌멩이」는 물살에 깎여 따스해졌다. 서정시의 미덕은 이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지 않고 멈추거나 뒷걸음질치며 모든 기억들을 치유하고 얼싸안는데 있다.
최영철(시인)
어서 오게. 여기 시가 한상 차려져 있네.
이 자리에서 자네는 고향산천의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자란 풀꽃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네. 그 모진 비바람 속에서 척박한 땅을 일구어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던 사람들이 있었네.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읽다 보면 눈물이 날 거네. 참 어려웠던 시절의 암담했던 풍경과,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 설움과 쓰림까지도 외면하지 말기를. 우리는 모두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서 합쳐질 것이니. 함 시인의 시세계는 허황된 관념의놀이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실체와 풍속의 세계를, 인간과 자연의 참 모습을보여주고 있기에 문학적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네. 마음껏 들고 가시게.
이승하(시인, 중앙대교수)
꼴림에 대하여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 칠흙 어둠을 끌고 간다
한번 하고 싶어 저리 야단들인데
푸른 들녘마저 점점이 등불을 켜든다

내가 꼴린다는 말 할 때마다
사내들은 가시내가 참… 혀를 찬다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는 것
마음속 냉기 풀어내면서
빈 하늘에 기러기 날려보내는 것

물오른 아카시아 꽃잎들
붉은 달빛 안으로 가득 들어앉는다

꼴린다,
화르르 풍요로워지는 초여름 밤- P11



바위 위에 누워 젖은 몸 말린다 인적 없는 숲은 마음껏 엎드려 있기에 좋다 개미들이 발가락 새 파고들다가 옆구리 쪽으로 기어올라 손등에 달라붙는다 허기로 가득찬 몸놀림, 움직이지 않으면 밥 한 그릇 먹을 수 없는 내 생애와어찌 그리 닮았는지, 한 끼 밥이 지닌 무게를 생각하며 개미 한 마리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손, 손금을 훑는다 나도 너처럼 바람과 햇살 따스한 곳으로 항상 까치발 세우며 살고 있으리라 서른 아홉 늦은 저녁,- P21
화인火印


요금별납, 印을 찍는다
반액 할인 위해 우편번호대로 분류한
책들 풀고 또 묶는다
행간을 열지 못한 채 구석으로 밀려날 지 모르는
받는 즉시 폐기될 지 모르는

낙인을 찍는다
낱낱의 환부만을 건드리는 건 아닌지
멈칫 멈칫 흔들리지만
질긴 누군가의 생에
요금이라도 대신 내주고 싶어
힘주어 꽝! 찍는다- P31



안개 깔린 이른 아침
느리게 차를 몰면서 새들이 걷는 걸 본다
시속 30km 틈새로 찍히는
새들의 발자국
얼음 물 속에 콕!콕! 부리를 적신다

사방 숲으로 날아오르기 위해
제 뼛속 비우고
먹은 것 땅에 내려놓았구나

아프다, 라는 말
잇몸새 누르고 계신 골다공증 어머니
병문안 가는 길이다- P85
폭포


여기부터 시작이라는 것인가

내리꽂히는 황홀함에 길들여져 왔으나
물이 뛰어내린 자리에 발 담그며 환호했으나

폭포는
물의 계단

폭발하는 바닥의 빛!-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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