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길 위에서

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 ㅎ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다.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쉿,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6)- P225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창비 1993)- P258
시벽(詩癖)

이규보


나이 이미 칠십을 지나 보냈고
지위 또한 삼공에 올라보았네.
시 짓는 일 이제는 놓을 만한데
어찌해 그만두지 못하는 건지.
아침부터 귀뚜라미처럼 읊조려대고
저녁에도 올빼미인 양 노래 부른다.
어찌해볼 수 없는 시마란 놈이
아침저녁 남몰래 따라와서는,
한번 붙어 잠시도 안 놓아줘서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 도려내
몇편의 시를 쥐어짠다네.
내 몸의 기름기와 진액일랑은
살에는 조금도 안 남았다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나니
이 모습 정말로 웃을 만하다.
그렇다고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 만한 것도 없다네.
손바닥을 비비며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옮는다.
살고 죽음 반드시 이 때문이리
이 병은 의원도 못 고치리라.

정민 한시 미학 산책」(휴머니스트 1996)- P281
겨울밤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먼 바다』(창비 1984)-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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