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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정낙추

1950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났다. 
1989년부터 지방문학동인지 『흙빛문학』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2002년 내일을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태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 시인의 말


다섯 마리의 일소를 부리다가 푸줏간으로 보냈고

세대의 경운기를 몰다가 고물상으로 넘겼다.

그래도 땅은 늙지 않는다.

이제 내 차례다

태안모항에서
정낙추
단식중인 대나무 같은 낙추 형님은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삽니다. 흔들림의 자리에서 자신의 발자국에다가 씨 뿌리고 가꿉니다. 세상붙이 짠한 심성으로 창을 열고 소박함으로 외투 삼고 결연함으로 낫을 벼리는데 하여 그에게 딱 맞는 호칭이 이 땅의 옳은사람이요, 옳은 시인입니다.
오늘도 형님은 불 놓은 들판을 깊게 바라보다가 차마 어쩌지 못한 마음으로 시한편 이부자리처럼 덮어주고 있을 겁니다.
한창훈(소설가)
정낙추는 진짜 농사꾼이다. 주말에만 빠꿈이 흙을 찾는 농사체험가가 아니란말이다. 게다가 그는 서해 뻘물을 끓여 자염을 만드는 소금장수다. 생명을 키우고싱거운 세상에 간도 맞춘다. 그가 삶의 질곡을 눙치거나 두툼한 해학으로 조선구들장을 놓을 때마다, 나는 명천 이문구의 소설 속 장삼이사張三李四)를떠올린다. 그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의 오기와 배짱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생명에 대한 오체투지와 끝없는 쓰다듬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시집을 낸적 없으나 사람들은 그를 큰 시인으로 우러렀고, 수렁배미와 개펄에서 늘 소금꽃이나 피우고 있었건만 우리들은 그를 당대의 어른으로 여겨왔다. 그것은 저당산나무 한 그루가 한 마을 온 집안의 구들장 밑에 뜨거운 뿌리를 서려두고푸르게 숨쉬는 것과 같음이라. 어찌 그의 우람하고 두터운 말씀에 작디작은 내 펜촉 보습을 들이 밀 수 있으랴. 십수 년 동안, 한창훈 유용주 이경호라는 풋것들과 진달래빛 노을을 그러안고 망연해 하던 서해의 장관을 떠올릴 뿐이다.
이정록(시인)
득도得道


봉지 속에
한 사내가 있다
꽃 떨어지자마자 봉지 속에 유폐된 사내
얼마의 내공을 쌓았기에
독방에 갇혀서도
부처님 몸빛보다 더 찬란할까

봉지를 벗기자
눈부신 가을 햇살이 황금빛에 튕겨 깨진다

몸 안 가득 채운
단물은
사내의 땀방울이다 그리움이다
세상에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고 고인
눈물이다

눈물이 매달린 배 나뭇가지 사이에서
사내가
잘 익은 자기 얼굴을 웃으며 따고 있다- P11
갈꽃비


아버지께서 갈꽃비를 만드신다
지난 가을
당신처럼 하얗게 늙은
갈대꽃을 한 아름 꺾어 오시더니
오늘은 당신 몫의 생애를
차근차근 정리하여 묶듯이
갈꽃비를 만드신다

나이 들어 정신도 육신도
가벼워진 아버지와 갈대꽃이
한데 어우러져 조용히 흔들린 끝에
만들어진 갈꽃비
평생 짊어진 가난을 쓸기엔 너무 탐스럽고
세상 더러움을 쓸기엔 너무 고운
저 갈꽃비로
무엇을 쓸어야 할까- P12
서러운 세월 다 보내신
아버지의 한 방울 눈물을 쓸면
딱 알맞겠는데
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으신다- P13
감기


늦가을비 맞으며 불청객이 찾아왔다
반갑지 않은 손님
독한 소주 한 잔에
고춧가루 푼 뜨거운 콩나물국을 대접해도
돌아가지 않고 곁에 누워
일년 농사 얘기나 하자며 자꾸 조른다

빚 얻어 빚 갚고도 모자라
가을마저 저당 잡힌 몸뚱이
으실으실 춥다가 펄펄 끓는다
밤새 휑한 가슴을 쓸고 나온 마른기침에
노란 은행잎이 무더기로 떨어져
머릿속 가득 어지럽게 쌓이는 밤

쉬 떠날 기미 보이지 않고 자꾸 시비 거는
손님이 귀찮아 눈감으면
보인다, 보여- P14
텅빈 벌판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별을 피해
가쁜 숨 몰아쉬며 도망가는
초라한 사내가- P15
갯벌에서


물 빠진 갯벌에 태양이 드러눕는다
무수히 많은 바다의 숨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간간한 바람이
제방너머 산으로 올라가 송화가루를 몰고 내려온다
하얗게 핀 소금꽃이 노란색으로 변한 갯벌
하루 종일 농게들이 천천히 소금꽃을 뭉쳐
집을 손질하다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먼 바다 물결 소리에 밀물 때를 계산한다
달이 차면 바다가 되고
달이 기울면 땅이 되는
네 것과 내 것이 없는 갯벌에서
기다림의 고통 없이 마감하는 생은 축복이다
그 축복 속에 몸을 풀고 스스로 생을 접는
무수한 생명들이
바다의 숨구멍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갯벌엔
물의 갈대도 적당한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갈매기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P24
끊임없이 생과 죽음이 반복되어도
슬프지 않음을 모르는 건 사람들뿐이다
오늘도 제 숨구멍을 틀어막는 어리석음을
밀물과 썰물이 조용히 증명한다- P25
밥 한 사발


세상천지 만물들이 생겨날 때에 허투루 생긴 것 하나 없듯이 쌀도 마찬가지여, 금방 방아를 찐 쌀 알갱이를 자세히 들여다 봐, 뽀얗고 둥그스름한 것이 꼭 어린놈들 고추 끄트머리 닮았지, 옛날에 쌀 한 톨 만들려면 따뜻한 봄날 모를 심어 뙤약볕 자글자글 끓는 여름 한 철 동안 애벌에 두 벌 세 벌 논을 맨 까닭은 벼 뿌리를 자꾸 긁어주고 건드려야 벼 포기가 단단해져 가을에 개꼬리같이 치렁치렁한 벼이삭이 매달리기 때문이여, 그래서 쌀은 양陽이고 男子여, 아닌 말로 사내 꼭지들 뿌리도 자꾸 만지작거려야 무슨 노릇을 해도 하지 그냥 놔둬 봐, 동네 장정들 다불러 역사役事 한다고 그 물건 일으켜 세울 수 있나,

가운데 금이 그어진 보리쌀 좀 보게나, 
꼭 女子들 귀한데 닮았지, 해 짧은 가을에 심어 겨울을 넘기자면 자꾸 북을 주고 다독여 줘야 하는 보리 싹처럼 여자도 그저 아껴주고 살펴줘야 되는 겨, 툭하면 여자를 보리 찬밥 취급들하는데 그러면 못 써! 옛날에 흉년 구제는 보리가 하고 보- P26
릿고개 넘긴 놈이 쌀밥 구경한 것처럼 엄동설한에도 죽지않고 새끼 쳐 한여름에 익어서 사람뿐 아니라 날짐승들짐승 먹여 살린 보리는 자식을 키우는 어미를 닮았단 말이지, 그래서 보리는 음이고 女子여, 보리꺼럭이 왜 붙었는지 알아? 여자를 얕보지 말라는 뜻이여,

밍밍한 쌀밥과 깔깔한 보리밥을 섞어 먹어야 밥맛 나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얼크러져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게 바로 음양陰陽의 이치理致여, 그러니 기름 잘잘 흐르는 쌀밥이나 구수한 보리밥을 아무 속내 없이 퍼 처먹지들 말고곰곰 생각하며 먹으란 말이여, 이 잡것들아!-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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