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
...과거의 자신을 올곧게 후회하고 이를 고쳐감으로써 미래의 나를 바꾸어가는 동력으로 삼는 힘인 것이다. 달리 말해 이상을 잊지 않고 현실을 사는 힘이요, 현실에 뿌리를 두고 이상을 품는 힘이다.
p12
자, 나이 듦이란 무엇일까? 나이 든다는 것은 젊었을 때의 과오를 '정정'해가는 것이다. 서른 살, 마흔 살이 되면 스무 살 때와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며, 쉰 살, 예순 살이 되면 또 달라진다. 같은 '나'를 유지하면서 예전의 과오를 조금씩 정정해간다. 이것이 나이 듦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변해가는 것이고, 정정해가는 것을 뜻한다.
일본에는 이 변화= 정정을 싫어하는 문화가 있다. 정치인은 사과하지 않는다. 관료도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번 세운 계획은 변경하지 않는다. 일본어로 '틀리다'와 '사과하다'는 모두 '아야마루'로 발음이 똑같은데, 이 둘은 원래 어원이 같다. 지금 일본인은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과도 하지 않는 것이다.
; 일본인이건 아니건 틀린건 틀렸다고 인정하고 사과하고 필요하다.
p25
유럽의 강인함은 이 정정하는 힘의 강인함에 있다. 이는 매우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개혁적인 힘이기도 하다. 규칙을 자주 변경해 꾸준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도 전통을 지킨다는 포즈도 취한다. 이것이 유럽의 능글맞음이자 현명함이고, 노련함이다.
p28
4. 페티시즘은 일종의 물신 숭배로, 어떠한 물건에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이를 숭배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깃털이나 나뭇조각, 돌조각에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는 원시 종교의 공통된 현상 중 하나다.
p30
공기에 저항해야 한다. 규칙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일본에서 이런 주장(물)은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곧바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새로운 공기의 문제로 인식되고 만다. 즉, "구칙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서 새로운 규칙으로 게임을 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만다.
그러면 이어서 이 새로운 문제제기를 아무 생각 없이 추종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아무리 찬물을 끼얹으려 해도 그것이 곧바로 새로운 공기가 되고 마는 구조가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권력 비판을 하는 사람이 도리어 공기(분위기)를 더 읽게 되는 구조가 있다.
p31
달리 말하자면 이렇다. 공기가 지배하고 물조차도 바로 공기가 되는 일본에서는 좋든 싫든 '어느새 변하는'방식만이 통한다. 명시적으로 '바꾸자'고 해봤자 그 물이 새로운 공기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어느새'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가 관건이 된다. 이에 대한 답이 이 책의 주제인 '정정하는 힘'인 것이다.
즉, 공기가 지배하는 나라이기에 어느새 그 공기가 바뀌어 있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는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상황 인식은 자크 데리다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내놓은 '탈구축'이라는 사고방식과 닮았다.
.......
...정면에서 기존의 규칙을 비판해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규칙을 정정하면서도 그 새로움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 원래 진짜 규칙이었다'라고 주장하여 현재 상황에 대처함과 동시에 과거와의 일관성도 유지하는 것, 이와 같은 양면 전략이 꼭 필요하다.
p35
...민주주의 기본은 논의다. 논의가 성립하려면 상대방이 의견을 바꿀 가능성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 누구의 의견도 바뀌지 않는 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정할 수 잇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의견은 바뀌기 마련이다. 우리의 의견도 바뀌고 당신들도 의견이 바뀐다"라는 인식을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 이는 교육과도 관련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의논하는 시간을 만들어 "어쩌면 당신 의견이 맞을지도"하고 깨달아 자기 의견을 바꾸거나 다른 사람이 의견을 바꾸는 것도 인정하는 경험을 쌓아야 한다. 이는 '논파'를 목적으로 한 논쟁과 언뜻 닮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p41
...정정하는 힘은 "나는 이 길을 간다", "나는 이 규칙을 이렇게 해석한다"라고 결단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판을 받아들이는 힘이기도 하다.
p42
모두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박수를 받고 환영받는다면 오히려 정정하는 힘이 기능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인간을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한 채로 '방치'하는 일종의 거리감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 사회는 마치 초등학교 교실처럼 유치한 공간이 되고 말았다.
p57
...정정하는 힘은 '기억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정하려면 과거를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정의를 내세워 큰 소동을 일으킨 다음 잊어버리는 것은 '정정'과는 반대되는 행위다.
p60
트위터 같은 SNS는 정보가 너무 적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가치전도가 일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동영상에서는 가치전도가 일어나곤 한다. 히로유키가 인기를 누리는 것도 그가 단순히 논리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말투가 개성적이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인간은 그런 면에 마음이 동하는 법이다. 언어만을 추려내 "이 사람이 저 사람을 논파했어"하고 떠들어봣자 대화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p62
글자만으로 형성된 공간에서는 이를 실현할 수 없다. 적어도 극히 어렵다. 그래서 SNS는 본질적으로 대화하는 수단에서 동영상이 탄생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일본의 경직된 언론 공간을 타파하는 데 동영상은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활동 중에서 예외적인 것
물론, 동영상이 널리 퍼지면 감정적인 동원에 휘말리기 쉽다는 부정적 측면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동물이다. 멋진 소리, 귀여운 몸짓 등과 같은 매력에 매우 약하다. 이를 부정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이 하는 소통의 근간에는 이와 같은 '생리적 호오 판단'이 있다. 논리, 증명 등은 그 위에 비로소 형성되는 요소에 불과하다.
이런 판단은 비과학적이라고 느끼겠지만, 원래 인간의 활동 전체에서 과학적 소통이 갖는 비중은 매우 적다.
과학자의 말은 수도승의 말과 같다. 인간의 말에서 정서적인 면을 모두 지우고 실증과 논리만으로 가치를 정하려 한다. 과학은 이런 약속에 동의햇을 때 비로소 성립한다. 애초에 '비인간적'인 것이다. 인간 전체가 과학자처럼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과학자도 연구와 업무 외의 영역에서는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정치다. 정치는 과학이 아니다. 매우 인간적인 소통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에서는 투표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호소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정책의 옳고 그름 이전에 '생리적 호오'를 얼마나 이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유권자는 미남미녀에 약하다. 이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로 귀결되고 만다.
p64
이런 시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인간은 별 것 아닌 정보에 약하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인간이 외모에 약하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인간은 외모에 잘 속으니 조심하자'는 메시지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도 좋겠다.
인간은 약한 동물이다. 감정에 휩쓸려 판단을 그르친다. 증거를 여럿 제시해 이성적으로 토론하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동영상과 SNS의 시대에는 이 경향이 더욱 거세질 것이다. 포스트트루스(탈진실)와 음모론이 퍼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정정하는 힘이 필요하다. 인간은 약하다. 오류를 범하는 존재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오류를 정정하는 것뿐이다. "저 사람은 외모만 그럴듯했어. 속았어"하고 반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이때 제대로 정정하지 못하면 점점 포스트트루스의 늪에 빠지게 된다.
p68
인터넷은 맥락을 지운다. 시간도 지운다. 모든 정보를 무미건조하게 제시하는 것은 인터넷의 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잉여 부분이 없으면 독해가 단순화될 수 밖에 없다. '이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고, 지금 이 시대에 맞게 해석하면 이런 얘기가 아닐까'하는 재독해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지고 만다. 지금은 이런 폐해가 늘어난 시대다.
정정하는 힘이란 '재독해하는 힘'이다. 메시지와 콘텐츠의 외부를 상상하는 힘이다. 그런 힘이 약해져 과거의 풍요로운 문화적 유산을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p71
정정하는 힘이란 과거와의 일관성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과거의 해석을 바꾸어 현실에 맞게 고쳐가는 힘을 말한다. 이는 지속하는 힘이고 듣는 힘이며, 나이 듦의 힘이고 기억하는 힘이자 재독해하는 힘이기도 하다.
p85
정정하는 힘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가는 힘이다. 테러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다면 사회도 바뀌어야 한다. 이는 테러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테러는 패배가 확정된 도박이다. 테러는 반드시 처벌된다. 그리고 테러로 사회가 바뀔지 여부는 결국 결과론에 좌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