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行星)
외줄로 몸을 묶은 페인트공이
아파트 외벽을 타고 내려온다
글자 하나를 칠하는데 십오 만원
내가 아는 오래전 시세는 그러했다
삶을 칭칭 묶고 내려오는 절박함이
당신의 글에는 있는가
페인트공의 행성이 나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평생 소설을 쓰고 싶어했으나
단 한 줄도 남기지 못했다
진정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아스팔트 바닥에는 까악까악 까마귀가
아흔 살 할머니의 행성은
무료한 궤도를 돌고 있다
나는 할머니의 행성에 잠깐 갔다가
얼른 빠져나온다
외로움의 수렁은 지겹고 깊다
점잇기를 좋아하는 엄마는
오늘 점잇기 하는 법을 까먹었다
1번 점에서 2번 점으로 선을 이어야 하는데
엄마는 점마다 동그라미를 그렸다
까만색 볼펜으로 칠해진
엄마의 행성은 천천히 내게서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