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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맨살 -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 비평선 ㅣ 시네마 4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박창학 옮김 / 이모션북스 / 2015년 8월
평점 :
야구 선수보다는 투포환 선수 :
선생님, 이젠 죽으셔야죠
문장의 첫 글자를 쓰고 난 후에 한 문장의 끝을 알리는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소요된 글자 수가 대략 삼백 육십 음절, 열 세 줄(한 줄에 대략 30字).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고,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고,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고, 이제는 정말 마침표를 찍겠지_ 라고 믿는 순간 다시 쉼표를 찍는 스타일. 난독과 오독을 유발하는 만연체로 악명 높은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에 대한 이야기'다. 어릴 때, << 보봐리 부인 >> 을 읽다가 플로베르의 만연체에 질려서 욕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시게히코에 비하면 플로베르는 김훈이요, 발자크는 고은1)이다.

ㅡ 한국 최초의 코리안 좀비 배우
< 만연체 > 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어 잠시 여러분에게 소개할까 한다 : 허장강이라는 배우가 계셨다. 전 세계를 구름처럼 떠다니면서 연기 배틀을 뜨신 분이지. 출연 분량에 대한 욕심이 워낙 많으셔서 이 양반이 필름통 여러 개 작살내셨다. 이런 식이다. 딱, 카메라 앞에 서면 말이야. 너 총알 ? 나 허, 허허허허허장강이야. 총알이 빗발치며 몸을 관통해도 가슴 부여잡고 무조건, 무조건, 카메라 앞으로 가. 그리곤 좆나게 애드립 치는 거야. 감독 뿔날 때까지 ! 그런 무대뽀 정신...... 그게 필요하다. "
총알이 심장을 관통하면 " 꼴까닥 " 하며 즉사(卽死)해야 마땅하나 곤조 하나로 버티신 몸. 총 맞고 비틀거리다 쓰러져 눈을 감나 싶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애드립을 치시고, 이제 끝나나 싶으면 다시 눈을 부릅뜨고 애드립을 치시고. 눈치고 코치고 닥치고 레디-고 외치면 연기를 불태우시는 분. 그렇게 < 즉사 - 씬 > 을 에로 영화의 < 정사 - 씬 > 보다 길게 연기하셔서 감독으로서는 애로 사항이 많았다고. 하스미 시게히코 문체가 영락없이 허장강을 닮았다. 맛보기로 한 문장을 소개하기로 한다. 놀라지 마시라. 지금 읽을 문장은 한 문장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애타는 갈망으로서 존재하는 비평 체험의 발걸음은 어느 특정 작품의 잔상과의 거의 우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우에 의해 계발되는 것이면서 그 발자국은 목표로 삼는 작품 자체의 표면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며, 말하자면 유동하는 무명성에 환원된 소위 작품 일반의 바다, 그것도 수면만이 아니라 밑바닥조차도 가질 수 없는 바다의 한복판인 것으로, 그러니까, 항적을 스스로 지우는 것으로써가 아니면 전진은 있을 수 없는 이 발걸음은 벽두부터 덮쳐 오는 존재의 붕괴 감각을 생의 유한성의 틀림없는 증거로서 받아들여 그것을 고뇌나 쾌락과 바꿔 치기 하고 싶어지는 유혹을 배제하면서 역시 보이지는 않는 스스로의 종식의 땅을 향해 오로지 미끄러져 가는 운동에 다름 아니게 되어 말하자면 침묵에 의한 침묵에의 거점이라고도 할만한 이 시도는, 인간의 온갖 행위 중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또 광포한 색조로 채색되어 있음에 분명한 어떤 것이다.
- 영화의 맨살 ㅡ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비평선, 26쪽
위 문장 속에는 < 허장강 선생 > 이 수없이 출몰한다. " 선생님, 이 씬은 즉사 장면입니다. 북조선 괴뢰군이 선생님에게 총을 난사.. 총알이 총..... 그러니까, 49방을 맞고 죽는 장면이란 말입니다. 즉사'라고요, 즉사 ! "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우리의 허장강 선생은 화면 욕심이 많아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카메라 앞으로. 이런 문장을 구사하는 대표적 한국 평론가로는 정성일로 문장 스타일이 서로 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하스미 시게히코, 정성일이 꽤 존경하는 인물이란다. 형만한 아우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통한다.
하스미 시게히코와 정성일의 결정적 차이'는 좋은 눈에 있다. 정성일이 < 게의 눈 > 이라면 시게히코는 < 매의 눈 > 이다. 시게히코는 한마디로 :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영화를 분석하고 걸작을 골라내는 선구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음정은 불안하지만 음색에 탁월한 슈퍼스타 k 도전자' 같다는 느낌. 그의 선견과 식견 앞에 무릎 탁, 치게 된다. 특히, << 영화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 라는 글은 그가 왜 일본 영화평론가의 대부인지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 글을 작성한 년도가 1980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평론이다.
한갓, 오락 영화 배우 혹은 감독으로 저평가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영화 작가적 야심을 가진 감독으로 평가한 것은 시게히코의 안목2) 이었다. 여기에 롤랑 바르트-적/혹은 -식 사유/혹은 기호'가 덧대어져 텍스트를 풍요롭게 만든다. 필름의 표층에 흐르는 기호를 낚아채는 식견이 탁월하다. 우려와는 달리 << 영화의 맨살 >> 은 뒤로 갈수록3) 악명 높은 만연체가 간결하게 변해서 읽기에 수월하다. 읽기 어려운(이해하기 어려운) 만연체라는 비판을 의식하고 그 비판을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장발을 짧게 자르니 얼마나 보기 좋아.
형도 비판을 수용하고 세월이 지날수록 문장을 다듬었는데 아우인 정성일은 비판을 수용할 생각이 아직까지는 없는 모양이다. 정성일은 여전히 시게히코의 초기 문장 스타일을 흉내 내고 다닌다. 정성일 평론을 읽다 보면 8월 복날에 한없이 늘어진 엿 같다. 무슨 " 똥 배짱 " 인지 모르겠다. 끝으로 허장강 선생은 훌륭한 배우'다. 그는 스크린에서 빛났다. 출연 분량은 주연 배우보다 적었지만 주연 배우를 압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를 스크린이 아닌 문장 속'에서 만나는 것은 그닥 반갑지 않다. 마침표를 < 공 ball > 으로 비유하자면 공은 무거울수록 좋다. 멀리 던질수록 결과는 좋지 않으니까.
야구선수보다는 투포환 선수가 더 좋은 문장을 만든다 ■
1) 만연체라면 플로베르보다는 발자크가 더 지독한 편이긴 하다만, 중2 때 << 보봐리 부인 >> 을 읽었으니 만연체 때문이라기보다는 텍스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그나저나 하스미 시게히코는 플로베르 연구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네 ?!
2) 시게히코는 << 영화 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 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 를 분석하면서 동시대성이 아닌 반시대성에 주목하면서 이 영화가 탈역사적'이라고 지적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의상은 계급, 젠더, 지위 따위를 철저하게 탈색시킨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옷을 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니라 맨살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이다_ 라고 시게히코는 지적한다. 탁월한 분석이다.
3) 70년대 글은 읽기 힘든 반면 80년대 이후부터는 문체가 간결한 쪽으로 변했다(옛날에 비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