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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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속물 문화

 

내면적 침잠의 능력과 수호신에게 순수하게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또 우리 시대로부터 도망간 악령을 불러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충분히 가진 인간을 우리는 여기서 어떤 등불을 들고 찾아야 하는 것인가! 외면적으로 관찰하면, 우리는 물론 저 장소에서 문화의 호화로운 장관을 발견한다. 그 장소들은 감탄을 자아내는 부속품을 가지고 있기에 무시무시한 화포와 무기가 든 병기고와 같다. 마치 하늘이 공격을 받고 진리가 가장 깊은 샘에서 길어 올려져야 하는 것처럼, 장비를 준비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그렇지만 전쟁에서는 가장 큰 기계들이 가장 쓸모없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문화는 투쟁할 때 저 장소들을 옆으로 제쳐놓고, 거기에는 문화에 희망을 줄 만한 것이 두려워할 것만 많다는 사실을 가장 빼어난 본능으로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학식 있는 노동자 신분이 충혈된 눈과 둔감해진 사고 기관으로 종사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의 문화는 바로 속물 문화이기 때문이다.

 

- 『반시대적 고찰 Ⅰ』,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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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현실적 경험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통찰의 결여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슈트라우스의 책처럼 그토록 피상적인 책들이 학자 신분의 현 문화 수준을 만족시킨다고 생각해도 된다면, 우리는 학자 신분이 야만의 방향으로 이미 무섭게 전진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이 책에서 저 불쾌한 휴식의 욕구를 발견하고, 또 철학과 문화와 무릇 실존의 모든 진지함 사이에서 어설픈 주의력으로 귀를 기울이는 저 타협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대화가 그쳤을 때 단지 피로에 관하여,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고 갖고 싶은 오락의 기쁨에 관하여, 쥐어뜯듯 얻어낸 기억에 관하여, 상관없는 삶의 경험에 관하여 증언하는 학자 신분의 회합을 상기하게 된다. 슈트라우스가 삶의 문제에 관해 하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결혼 문제에 대해서든 전쟁 혹은 사형 제도에 대해서든, 그는 일체의 현실적 경험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통찰의 결여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모든 판단은 마치 책처럼 획일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문과 그대로 일치하기까지 한다. 문학적 회상들은 현실적 착상과 통찰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표현 방식에서 나타나는 짐짓 꾸민 듯한 절제와 노련함은 우리에게 지혜의 결여와 사유적 원숙함의 결여를 보충하려 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대도시에서 떠들썩함에 둘러싸여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독일 학문의 정신에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부합하는가. 이 정신은 저 정신에게 얼마나 호의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 『반시대적 고찰 Ⅰ』,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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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수천의 "우리"의 표현

 

대담함과 연약함, 무모한 말과 비범한 순응의 합일, 어떻게 또 어떤 문장으로 속물을 감탄시킬 수 있을까, 또 어떤 문장으로 속물을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를 섬세하게 생각하는 이러한 신중한 검토, 겉보기에 힘과 성격이 있어 보여도 실제로는 결여된 성격과 힘, 경험의 우월함과 성숙을 잘난 체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혜의 결함 ㅡ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이 책에서 증오하는 바다. 젊은 사람들은 이러한 책을 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높이 평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는 슬프지만 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단념할 것이다. 형편없고 절망적이며 참으로 경멸할 만한 속물 근성의 이러한 고백은 슈트라우스가 말하는 저 수천의 "우리"의 표현이어야 하고, 그리고 이 "우리"가 다시금 다음 세대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후세를 도와 현재가 가지지 못한 것 ㅡ 즉 참다운 독일 문화를 성취하도록 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소름끼치는 전제들이다. 이런 사람에게 대지는 재로 덮여 있고, 모든 천체는 빛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죽어버린 모든 나무, 황폐화된 모든 들판은 그에게 외친다. 번식력이 없는 불모다! 상실되었다! 여기에는 더 이상 봄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는 청년 괴테가 자연 체계의 음울한 무신론적인 반야(半夜)를 들여다보았을 때 품었던 기분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그 책이 너무 회색으로, 호메로스의 킴메르족처럼 너무 암흑적이며, 너무 죽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는 그 책의 존재를 견디려고 애썼으며, 그것을 보고 유령을 보는 것처럼 전율했다.

 

- 『반시대적 고찰 Ⅰ』,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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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그에게 미소를 던져주지 않았다

 

누가 다음과 같은 심리학적 설명을 분개하지 않고 읽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러한 설명은 저 비열한 쾌적함에 관한 이론의 줄기에 붙어서 성장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피가로>나 <돈 조반니> 같은 곡을 결코 작곡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삶은 그에게, 삶을 굉장히 명랑하게 바라보고 또 삶을 사람들의 온갖 약점과 함께 굉장히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소를 던져주지 않았다"(360쪽). 그러나 여기에서는 저 비열한 심정의 비속함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예를 인용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즉, 슈트라우스는 초기 몇 세기 동안 기독교가 보여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부정의 욕망과 금욕적 정화의 경향을 달리 설명하지 못하고 오직 앞서 일어난 온갖 종류의 성적 향락과 그로부터 산출된 역겨움과 메스꺼움을 통해서만 설명한다는 것이다.

 

- 『반시대적 고찰 Ⅰ』,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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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와 칸트

 

우리는 슈트라우스가 간질이고 찌르고 때리는 쇼펜하우어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가를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우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명확한 호의의 표시도 우리를 더 이상 놀라게 하지 않는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저서들에서 사람들은 그저 책장을 넘기기만 하면 된다. 물론 책장을 넘기기만 하지 않고 그것들을 연구하는 것이 여하튼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등등"(141쪽). 속물의 수령은 대체 누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그 자신은 쇼펜하우어를 결코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데, 반대로 쇼펜하우어는 그런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연구는커녕 책장을 넘길 만한 가치도 없는 저자다." 쇼펜하우어가 그의 목구멍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그는 헛기침을 함으로써 쇼펜하우어를 떨쳐버리려 하고 있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찬사의 양을 가득 채우기 위해 슈트라우스는 게다가 늙은 칸트를 감히 추천한다. 그는 칸트의 1755년 저작 《천체의 일반 역사와 이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항상 내가 그의 후기 이성 비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긴 저작. 여기에서 통찰의 깊이에 경탄하면, 저기에선 전망의 넓이에 경탄한다. 제한되었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인식을 소유한 노인이 여기 있다면, 저기서는 정신적 발견자와 정복자의 넘치는 용기를 지닌 장년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칸트에 관한 슈트라우스의 이러한 판단이 항상 내게는 쇼펜하우어에 관한 판단보다 더 겸손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여기서 판단이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그 판단을 말하는 데는 특히 확실성을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가 있다면, 저기서는 심지어 칸트에 대한 무지에도 용감무쌍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칭찬의 정수를 쏟아 넣는 유명한 산문 작가가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슈트라우스가 칸트의 이성 비판으로부터는 자신의 근대적 이념의 성서를 위해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또 슈트라우스가 어디서나 매우 조야한 사실주의의 마음에만 들게끔 말하고 있다는 황당무계한 사실은 이 새로운 복음서의 두드러지 특징들 가운데 하나다. 아무튼 이 복음서는 끊임없는 역사 연구와 자연 연구가 힘들게 이뤄낸 성과라고 자평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적 요소 자체를 부인한다. 속물의 수령 및 그의 "우리"에게는 칸트의 철학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관념론의 기초적 이율배반에 관해, 그리고 극도로 상대적인 일체의 학문 및 이성의 의미에 관해 전혀 예감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성을 통해 물 자체에 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이성이 그에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를 이해하는 것이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슈트라우스처럼 청년 시절에 "거대한 정신" 헤겔을 이해했거나 또는 이해했다고 잘못 생각한 사람, 더군다나 슈트라우스의 말대로 "너무나 많은 통찰력을 지닌" 슐라이어마허를 다루어야 했던 사람에게는 그렇다. …… 일단 헤겔 병과 슐라이어마허 병에 걸린 자는 다시는 완쾌되지 않는다.

 

- 『반시대적 고찰 Ⅰ』,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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