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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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을 한번 조사하고 해부해보는 것도 권할 만한 일이다

 

학자들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심지어 가장 존경할 만한 것도 손으로 만지고 해체하는 데 익숙해진 이상, 그들을 한번 조사하고 해부해보는 것도 권할 만한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로 표현한다면, 내 명제는 다음과 같다. 학자는 매우 다양한 충동과 자극이 서로 얽힌 직물로 되어 있고, 그는 극히 순수하지 않은 금속이다. 사람들은 우선 강하고 점점 더 커지는 호기심, 인식의 모험을 향한 욕구, 오래되고 지루한 것과는 반대로 새롭고 희귀한 것이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힘을 취한다. 거기다 변증법적인 추적 본능과 게임 본능, 사상의 교활한 여우 통로를 찾으려는 사냥꾼의 의욕이 더해져서 결코 진리가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추구 자체가 추구되고 주된 쾌락은 계략을 써서 몰래 잠입하고 포위하여 공격하고 기술적으로 살해하는 데 있게 된다. 게다가 모순에 대한 충동이 첨가되어, 인격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대항하면서 자신을 느끼고, 느끼게 내버려두고자 한다. 진리를 위한 투쟁은 단지 구실일 뿐, 투쟁은 쾌락이 되고 개인적 승리는 목적이 된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에게는 어떤 특정한 '진리'를 찾으려는 충동도 섞여 있다. 즉 그들은 지배적 인물이나 계급, 지배적인 의견, 교회나 정부에 대한 복종심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는데, 그것은 그가 그 "진리"를 자기편으로 만들면서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느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종종 학자들에게서는 다음의 특성이 나타난다. 첫째 우직함과 단순한 것에 대한 감각인데, 그것이 단순히 위장에서 서툴거나 미숙한 것 이상을 의미한다면, 아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위장에서의 서투름과 미숙함에는 약간의 기지도 포함된다. 실제로 기지와 능숙함이 아주 눈에 띄는 곳에서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하며, 성격의 솔직성을 의심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저 우직함은 별 가치가 없고 학문을 위해서도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우직함은 익숙한 것에 매달리고 단순한 사물이나 사소한 일에 관해서만 진리를 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진리를 감추기보다 말하는 것이 오히려 나태함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모든 것은 다시 배울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직함은 되도록 오래된 견해를 존중하고 새로운 것을 선포하는 자를 올바른 감각이 결여됐다고 비난한다. 우직함이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 반대한 까닭은 이 문제에서 외관과 습관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에게서 드물지 않게 보이는 철학에 대한 증오는 특히 긴 추론의 고리와 증거의 인위성에 대한 증오다. 그렇다. 근본적으로 모든 학자-세대는 허용된 명민함에 대해 비자의적인 척도를 가지고 있다. 이를 넘어서는 것은 의심했고 거의 우직함에 반대하는 혐의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ㅡ 둘째, 가까운 것을 예리하게 통찰하는 능력인데, 이는 먼 것과 보편적인 것에 대한 근시안과 결합되어 있다. 그의 시야는 보통 아주 협소하고, 눈은 사물에 아주 밀착되어 있어야 한다. 학자가 철저하게 연구한 한 지점에서 이제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려 한다면, 그는 전체 시각-장치를 저 지점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는 하나의 그림을 온통 반점들로 분해해야 한다. 마치 무대를 보기 위해 오페라글라스를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이 먼저 머리를 보고 그 다음 의상을 보지만,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없듯이 말이다. 그는 하나하나의 반점이 합해진 모습을 보지 못하고 단지 그 연관성만을 추론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보편적인 것에서는 어떤 강한 인상도 받지 못한다. 예컨대 그는 어떤 저서를 전체적으로 개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몇 장이나 몇 문장 또는 오류들을 가지고 그 저서를 평가한다. 그는 유화는 거친 얼룩 정어리라는 엉터리 주장을 할 것이다. ㅡ 셋째, 애착과 혐오라는 점에서 그의 천성은 냉정하고 평범하다. 그는 이 특성으로 특히 역사학에서 운이 좋았다. 그것도 자신이 아는 동기에 따라 과거 사람들의 동기를 탐지하는 한에서 그랬다. 두더지 구멍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두더지인 것이다. 그는 갖가지 인위적이고 과도한 가설을 경계한다. 그가 고집이 있다면, 그는 과거의 모든 일상적인 동기를 파헤친다. 그는 스스로 같은 종류의 동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체로 희귀한 것, 위대한 것, 비범한 것, 다시 말해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을 이해하고 존중할 능력이 없다. ㅡ 넷째, 감정의 빈곤과 메마름. 이런 특성은 그에게 생체를 해부할 능력을 준다. 그는 많은 인식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알지 못하며, 그래서 다른 사람이라면 가슴이 떨릴 그런 분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차갑고 그래서 잔인하게 보이기 십상이다. 그는 대담하다고 여겨지는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현기증을 모르는 노새가 대담하지 않은 것처럼. ㅡ 다섯째, 낮은 자기 평가, 겸손함. 비참한 구석으로 쫓겨나서도 그들은 희생이나 낭비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깊숙한 마음 한 곳에서 자신들이 나는 짐승이 이나리 기어 다니는 짐승임을 안다. 이런 특성으로 그들은 스스로 감동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ㅡ 여섯째, 자신들의 스승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 그들은 정말 진정한 마음으로 이들을 도우려고 하며, 진리를 가지고 가장 잘 도울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혼자 힘으로 결코 올 수 없는 이 학문의 장엄한 전당에 그들은 스승과 지도자의 도움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은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다. 현재 선생으로서 머리가 좋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분야를 개척할 줄 아는 사람은 단기간에 유명해질 것이다. 몰려드는 무리가 곧 엄청나게 불어날 것이다. 물론 이 충실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시에 스승에게는 불행이다. 그들은 모두 스승을 모방하고, 스승의 결점이 그렇게 왜소한 개인들에게서 나타나기 때문에 지나치게 크고 과장되게 보일 것이며, 반면 스승의 미덕은 거꾸로 똑같은 비율로 작아지면서 그들 각각의 개인에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ㅡ 일곱 번째, 학자는 한번 우연히 들어선 궤도를 습관적으로 달려가며, 한번 길든 대로 무사상에 기초한 진리 감각을 따른다. 그런 천성은 수집가, 해설자, 색인이나 식물 도감 제작자다. 다른 분야가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분야에서 이것저것 배우고 찾는다. 그들의 근면은 중력의 엄청난 무지몽매함과 같은 면이 있다. 그들이 종종 많은 일을 해내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ㅡ 여덟 번째, 지루함으로부터의 도피. 진정한 사상가는 오로지 한가한 여유만을 바라지만, 평범한 학자는 그것으로부터 도망간다. 여유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위안은 책이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달리 생각하는지를 듣고 이런 방식으로 긴 하루를 즐긴다. 특히 그가 고르는 책은, 자신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약간 흥분되고, 어떤 식으로든 그의 개인적 관심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그 자신이 고찰의 대상이 되는 책, 그의 정치적 또는 미학적인 학설이나 또는 단지 문법적인 학설이라도 그의 관점이 고찰되는 책이다. 그 자신의 학문이라도 있으면, 그에게는 지루함을 물리칠 파리채나 오락 수단이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것이다. ㅡ 아홉 번째, 밥벌이의 동기. 즉 저 유명한 "괴로워하는 위장의 꾸륵거림"이다. 진리가 임금과 높은 지위로 직접 승진시킬 수 있을 때 또는 적어도 빵과 명예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 때, 진리에 봉사한다. 그러나 오로지 이 진리에만 봉사한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하는 유익한 진리와 무익한 진리 사이에 경계가 그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무익한 진리를 위해서는 단지 소수의 사람이 헌신하는데, 이들에게는 위는 재능의 부여자ingenii largitor venter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ㅡ 열 번째, 동료 학자에 대한 존경심. 그들의 경멸에 대한 두려움, 앞의 동기보다는 드물지만, 더 고귀한 동기다. 그러나 자주 볼 수 있다. 빵, 관직, 명예처럼 많은 것이 달려 있는 진리가 적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도록, 학계의 동료들은 서로 심하게 질투하고 감시한다. 그들은 타인이 발견한 진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데, 이는 자신이 한번 진리를 발견할 경우 다시 그 존경을 돌려받기 위해서다. 동업자의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허위, 오류는 시끄러운 소리로 폭파당한다. 그런데 종종 여기저기서 진짜 진리가 폭파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적어도 한동안 고집 세고 몰렴치한 오류를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실제로 어디에서도 그리고 여기에서도 "악행"이라 불리는 "도덕적 백치"는 빠지지 않는다. ㅡ 열한 번째, 허영심에 기초한 학자. 아주 드문 변종이다. 그는 가능한 한 자기 혼자만의 분야를 가지려고 하며 그래서 진귀한 분야를 고른다. 특히 그것이 보통을 넘는 경비, 여행, 발굴, 여러 나라와의 무수한 접촉을 필요로 할 경우, 그것을 고른다. 그는 대개 자신이 진귀한 것으로 경탄의 대상이 되는 명예로 만족하며 학자적 연구를 수단으로 생계를 꾸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ㅡ 열두 번째, 게임 본능에 기초한 학자. 그의 희열은 학문에서 매듭을 찾고 그것을 푸는 데 있다. 이때 그는 놀이를 한다는 느낌을 잃지 않기 위해 너무 힘들게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깊이 파고들지 않지만, 생계형 학자가 힘들게 천천히 움직이는 눈으로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을 종종 인지한다. ㅡ 내가 마지막 열세 번째로 학자의 동기로서 정의를 향한 충동을 든다면, 사람들은 이 고상한,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충동은 다른 충동과 구분이 안 되며 인간의 눈에는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내가 이 마지막 번호에다 경건한 소망, 즉 저 충동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학자들에게 더 자주 나타나고 더 효과적이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첨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의의 불에서 나온 불씨 하나가 학자의 영혼에 떨어지는 것으로도 그의 삶과 노력을 타오르게 하고 정화의 연소를 시키기에 충분해서 그는 더 이상 쉬지 못하고 평범한 학자들이 하루의 일과를 행하는 미지근한 또는 꽁꽁 얼어붙는 듯한 기분에서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요소들 또는 여러 요소들이나 하나의 요소를 서로 섞어 흔든다고 한번 상상해보라.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리의 하인의 탄생을 볼 것이다. 순수하고 결과도 없고 그래서 충동도 없는 인식이라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벗어난 초인적인 사업에 유리하게 아주 왜소한 인간적 충동과 작은 충동들이 한데 부어져 화학 결합이 일어나고 그 결과인 학자는 저 천상적이고 고귀하고 극히 순수한 사업의 광채 아래에서 너무나 미화되어 그를 산출하기 위해 필요했던 혼합과 화합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고 상기해야만 할 순간이 있다. 다시 말해 문화를 위해 학자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때 그러하다. 다시 말해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은, 학자가 그 본질상 비생산적이라는 것을 ㅡ 그의 탄생의 결과! ㅡ 그리고 그가 생산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자연적인 증오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대나 천재와 학자는 서로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학자는 자연을 죽이고 분해하고 이해하려 하지만, 천재는 활기찬 새 자연을 통해 자연을 증대하려 한다. 그래서 신념과 활동의 충돌이 발생한다. 태평성대는 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를 알지 못하지만, 병들고 불만이 팽배한 시대는 학자를 가장 고귀하고 가장 존엄한 인간으로 평가하고 그에게 첫째 서열을 부여한다.

 

건강과 병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시대는 어떠한지, 그걸 알 만한 의사가 누가 있겠는가! 물론 현재도 많은 사안에서 학자의 평가는 지나치게 높고 그래서 특히 장래의 천재의 관심사에 유해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학자는 천재의 고난에 대해 무정하고, 그에 관해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로 간단하게 논하면서, 마치 관심을 쏟을 시간도 흥미도 없는 기이한 것, 정신 나간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듯이 너무 빨리 어깨를 들썩인다. 그에게서도 문화의 목적에 관한 지식은 찾을 수 없다. ㅡ

 

 - 『반시대적 고찰 』,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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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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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괴테, 쇼펜하우어, 바그너

 

근래 어느 영국인이 평범한 것에 묶여 있는 사회에서 사는 비범한 인간에게 닥칠 가장 일반적인 위험을 이렇게 서술한다. "그런 이질적 성격의 소유자는 먼저 기가 꺽이고 그 다음 우울해지며, 그 후 병들고 마침내 죽는다. 셸리 같은 인물은 영국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셸리와 같은 인종은 틀림없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횔덜린과 클라이스트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은 자신들의 비범함 때문에 죽었고, 소위 독일 교향의 기후를 견디지 못했다. 베토벤, 괴테,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처럼 강철 같은 천성을 가진 인물들만이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극도로 피로한 투쟁과 긴장의 영향이 얼굴 곳곳에서, 주름살에서 나타난다. 그들의 호흡은 점점 힘들어지고 그들의 목소리는 쉽게 거칠어진다. 괴테와 아주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저 노련한 외교관은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Voilà un homme, qui a eu de grands chagrins!" ㅡ 괴테는 이것을 독일어로 이렇게 번역했다. "그도 몹시 고생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의 얼굴에서 극복한 고통, 수행한 활동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을 때, 우리와 우리의 노력이 남긴 모든 것이 똑같은 흔적을 지니고 있다면, 그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괴테다. 우리의 교양 속물들이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행복이 가능하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가장 행복한 독일인으로 지적하는 인물이 바로 그다. 그들의 속셈은 자신들 사이에서 불행하고 외롭다고 느끼는 자가 있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고독 속에는 항상 은밀한 죄가 숨어 있다는 공리를 잔인하게 정립했고 실천적으로 해설해왔다. 그렇게 불쌍한 쇼펜하우어도 은밀한 죄, 즉 자기 철학을 동시대인들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는 죄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거기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그것의 목숨을 구하려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동시대인의 무시에 대항해 방어해야 한다는 사실을 하필 괴테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무척 불행했다. 괴테의 판단에 따르면 독일인들에게는 숙달된 일종의 이단 심문, 즉 신성불가침의 침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의 주저의 첫 판이 대부분 휴지로 파기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위대한 행위가 단순히 무시로 인해 다시 무위로 돌아갈지 모든다는 임박한 위험은 그를 침기 힘든 끔찍한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이렇다 할 신봉자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이 남들에게 알려진 흔적이 없을까 하고 추적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리고 자신이 마침내 정말로 읽힌다는 것에 크게, 너무 크게 승전가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감동적이다. 철학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바로 그런 그의 모습들이 모두 자신의 고귀한 소유물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고통 받는 인간을 보여준다. 이렇게 자신의 작은 재산을 잃지 않을까, 그리고 철학에 대한 자신의 순수하고 진정으로 고대적인 태도를 더 이상 견지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그는 항상 다시 우울한 눈으로 자신에게 충실한 개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동정하는 인간을 제대로 갈망하지도 못했다. 그는 완전한 은둔자였다. 그를 위로해주는 마음이 맞는 친구 한 명도 없었다. ㅡ 한 명이 있다는 것과 한 명도 없다는 것 사이에는, 유와 무 사이가 그렇듯이, 무한의 간격이 놓여 있다. 진정한 친구가 있는 사람은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설령 주변의 전 세계를 적으로 만들지라도, ㅡ 아, 나는 잘 안다. 너희는 고독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강력한 사회, 정부, 종교, 여론이 있는 곳에서, 즉 전제 정치가 지배하는 곳에서, 고독한 철학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철학은 인간에게 어떤 전제 정치가 침입할 수 없는 피난처, 내면의 동굴, 가슴의 미로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독재자들을 격분시킨다. 고독한 사람들은 거기에 숨는다. 그러나 거기도 고독한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는 큰 위험이 잠복해 있다. 자신의 자유를 내면적인 것 안으로 피신시킨 사람들도 외면적으로 살아야 하고 눈에 보여야 하고 스스로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은 탄생, 체류, 교육, 모국, 우연, 치근거리는 타인들로 인해 무수한 인간 관계 속에 얽혀 있다. 마찬가지로 이 관계에서는 수많은 의견들이, 단지 지금 여기서 지배적이라는 이유로, 그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다. 부정하지 않는 표정은 모두 동의로 여겨진다. 때려 부수지 않는 모든 손동작은 찬성으로 해석된다. 이 고독한 사람들,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은 알고 있다. ㅡ 자신들은 어디에서든 항상 생각과는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와 정직성인데, 그들 주변에는 오해의 그물망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아무리 강력히 원해도, 그들의 행동 위에 서려 있는 잘못된 견해, 순응, 어정쩡한 용납, 관대한 침묵, 잘못된 해석의 안개를 막을 수 없다. 그로 인해 그의 이마에는 멜랑콜리의 구름이 모여든다. 그런 천성의 사람들은 허식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죽음보다 미워하기 때문이다. 가식에 대해 끊임없이 분노하기 때문에 그들은 화산처럼 폭발적이고 위협적이 된다. 그들은 때때로 강압적인 자기-은폐, 강요된 자제에 대해 복수한다. 그들은 무서운 표정으로 동굴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폭발하고, 그로 인해 그들 자신이 파멸할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위험하게 살았다. 바로 그런 고독한 사람은 사랑이 필요하고, 마치 자신을 대하듯 마음을 열고 단순해질 수 있는 그런 동무들, 그들이 있으면 침묵의 긴장과 위장이 멈추는 그런 동무들이 필요하다. 이 동무들을 떼버려 보라. 그러면 그대들은 증가하는 위험을 초래한 것이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이와 같이 사랑을 못 받아서 파멸했다. 이 버범한 인물들에 대한 가장 끔찍한 해독제는, 그들을 그들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몰아넣고 그들이 다시 나올 때마다 매번 화산처럼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런 끔찍한 조건의 삶도 견디고 승자처럼 살아갈 수 있는 반신(半神)이 있기 마련이다. 그대들이 그의 고독한 노래를 듣고 싶으면,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된다.

 

 - 『반시대적 고찰 』,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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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레싱, 몽테뉴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쇼펜하우어의 거칠고 약간 곰같이 미련한 영혼은 훌륭한 프랑스 작가의 유연성이나 궁정풍의 우아함이 없지만, 이를 한탄하기보다 오히려 경멸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독일 작가들이 좋아하는 척하는 모방된, 은도금한 사이비 프랑스풍을 찾아볼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의 표현은 군데군데 괴테를 연상시키는 것 외에는 독일의 본보기를 상기시키지 않는다. 그는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을 단순하게, 감동적인 것을 수사학 없이, 엄격하게 학문적인 것을 현학성 없이 말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그가 어떤 독일인에게 배울 수 있었겠는가? 또 그는 억지를 부리거나 지나치게 민첩하고 ㅡ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ㅡ 상당히 비독일적인 레싱의 수법에서도 자유롭다. 이는 얼마나 대단한 업적인가. 왜냐하면 레싱은 산문적 표현에 있어 독일인들 가운데 가장 유혹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묘사법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단적으로 말하려면, "철학자는 어떤 시적인 또는 수사학적인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정직해야 한다"라는 그의 명제와 그를 연관시키면 된다. 정직함이 중요하고 더욱이 미덕에 속한다는 것은 여론의 시대에는 금지된 사적 의견이다. 따라서 내가 쇼펜하우어가 정직하며, 작가로서도 정직하다고 거듭 말한다면, 그것은 그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특징을 규정하는 것이다. 정직한 작가는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단 글을 쓰는 인간들을 모두 불신하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정직이라는 문제에서 쇼펜하우어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정직한 작가 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바로 몽테뉴다. 그런 사람이 글을 썼다는 사실로 인해 이 지상에 사는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이 가장 자유롭고 가장 힘찬 영혼을 알게 된 이후, 적어도 나로서는, "그를 한번 보자마자 내게 발이나 날개가 돋아났다"라고 그가 플루타르코스에 관해 한 말을 그대로 그에 대해 해야만 할 정도가 되었다. 이 지상을 고향으로 삼고 살라는 과제가 주어질 경우, 그와 함께라면 나는 견뎌나갈 것이다.

 

정직함 외에 쇼펜하우어와 몽테뉴의 공통점이 또 있다. 그것은 정말 기분을 즐겁게 만드는 명랑함이다. 타인에게는 명랑함을, 자신에게는 지혜를. 그것은 명랑함에도 두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상가는 그가 진심을 말하든 농담을 하든, 또는 인간적 통찰을 표현하든, 신적인 관용을 표현하든, 항상 흥겹게 하고 생기를 북돋아준다. 불만이 잔뜩 밴 몸짓, 떨리는 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아니라 확실하고 단순하게, 용기와 힘을 가지고, 기사처럼 강하게, 어쨌든 승리자로 행동한다.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즐거움을 주는 것은 그가 싸웠던 모든 괴물들 옆에서 바로 승리하는 신의 모습을 보는 일이다. 그에 반해 평균치 작가들이나 퉁명스러운 사상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명랑함은 책을 읽는 우리 독자들을 비참하게 만든다. ……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승리가 있는 곳에만 명랑함이 있다. 이는 진정한 사상가의 작품이나 모든 예술 작품에 해당된다. 물론 그 내용은 현존재의 문제가 항상 그렇듯이 무섭고 진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쪽 사상가와 반쪽 예술가가 자신들의 불만의 증기를 작품 위에 널리 퍼뜨릴 때, 그 작품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고통을 줄 것이다. 저 승리자 중 한 사람의 가까이에 있다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즐겁고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승리자들은 가장 깊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가장 생동적인 것을 사랑할 것이고 현자로서 결국 아름다운 것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그들은 진실로 말을 하지, 더듬지 않으며 흉내 내어 지껄이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 활동하고 살지,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가면을 쓰고 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 곁에 있으면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기분이 되고 괴테처럼 소리치고 싶어진다. "살아 있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 귀한 것인가! 그 상태에 얼마나 꼭 들어맞고 얼마나 진실되고 얼마나 실재적인가!"

 

 - 『반시대적 고찰 』,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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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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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마치 나를 위해 책을 쓴 것처럼 그를 이해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독자다. 그의 책의 첫 페이지를 읽은 후 확고하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을 것을 알았고, 그가 한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독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는 곧 그를 신뢰했고, 지금도 9년 전이나 똑같이 신뢰한다. 나는 그가 마치 나를 위해 책을 쓴 것처럼 그를 이해했다. 물론 여기저기서 작은 오류들은 발견했지만, 그에게서 한번도 역설(逆說)을 발견한 적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역설이란, 저자가 진정으로 믿지 않으면서 주장하기 때문에, 그가 그 주장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 하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그럴 듯하게 꾸미려 하기 때문에 신뢰를 주지 못하는 주장 이외의 무엇이겠는가? 쇼펜하우어는 결코 꾸미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세상에 기만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적어도 '아무도 속이지 마라, 너 자신도 속이지 마라'를 자신의 법칙으로 만든 철학자임에야! 거의 모든 대화의 결과로 나타나며, 저술가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모방하는 호의적인 사교상의 기만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연단에서 청중을 내려다보며 수사학적 기교를 부리면서 저지르는 의식적인 기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대신 쇼펜하우어는 자기 자신과 말을 한다. 또는 한 명의 청중을 생각한다면,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는 아들을 상상하면 된다. 사랑으로 경청하는 청중 앞에서 하는 말은 성실하고 소박하고 선의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런 작가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화자의 힘찬 쾌감이 우리를 감싼다. 마치 교목(喬木) 숲으로 들어가 깊이 숨을 들이쉬면 갑자기 다시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와 비슷하다. 여기에는 항상 변함없이 기운을 붇돋아주는 공기가 있다고 우리는 느낀다. 여기에는 모방할 수 없는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 있다. 집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내면에 느끼는 사람, 부유한 집의 주인 같은 사람들이 지닌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다. 스스로 한번 기지를 발휘해서 그 연설이 그로 인해 불안하고 부자연스러워질 때 본인이 가장 놀라는 그런 작가들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 『반시대적 고찰 』,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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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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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으로 생각해야만 할 선생이며 엄한 규율 감독자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어두운,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다. 토끼의 껍질이 일곱이라면, 인간은 일흔 번 곱하기 일곱 번씩이나 껍질을 벗겨야 하며, 그래도 "그게 정말 너야, 이제 껍질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없다. …… 너는 이제까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무엇이 너의 영혼을 끌어당겼고 무엇이 너를 지배하는 동시에 행복하게 했는가? 이 일련의 소중한 대상들을 상상 속에 떠올려보라. 그러면 아마 그것들은, 그 본질과 그 결과를 통해 하나의 법칙, 즉 네 진정한 자아의 근본 법칙을 너에게 알려줄 것이다. 이 대상들을 서로 비교해보라. 하나가 다른 것을 어떻게 보완하고 확장하고 능가하고 미화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 대상들이 네가 이제까지 너 자신에게로 기어 올라갔던 사다리가 되었는지를 보라. 왜냐하면 너의 진정한 본질은 네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너보다 훨씬 높이, 적어도 네가 보통 너의 자아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이 있기 때문이다. ……

 

 

 

우중충한 구름 속을 떠다니는 듯한 마비 상태에서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교육자, 형성자를 기억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나는 자랑으로 생각해야만 할 선생이며 엄한 규율 감독자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기리고자 한다 ㅡ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기억할 것이다.

 

 - 『반시대적 고찰 』,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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