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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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커다란 용기와 지혜

 

이론적 문화의 품 안에서 졸고 있는 불행이 서서히 현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동안, 현대인이 경험을 총동원하여 자신도 별로 믿지 않는 위험 방지 수단을 사용하는 동안, 그리고 그가 자기에게 돌아올 결과를 예감하기 시작하는 동안, 보편적 재능을 가진 위대한 인물들은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하게 인식의 한계와 제약을 성명하고 또 그럼으로써 보편타당성과 보편적 목적에 대한 학문의 권리 주장을 결정적으로 부인하기 위해 학문 자체의 무기를 사용할 줄 알고 있었다. 이를 증명함으로써 인과론에 이끌려 오만하게도 사물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규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망상이 망상으로서 인식되었다. 칸트쇼펜하우어의 커다란 용기와 지혜는 힘겨운 승리를 얻었다. 즉 논리의 본질 안에 내재한 낙천주의, 다시 말해 우리 문화의 토대인 낙천주의에 대해 승리한 것이다. 낙천주의는 확실해 보이는 영원한 진리에 의거하여 모든 세계 수수께끼를 인식하고 규명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시간, 공간과 인과성을 보편타당한 절대 법칙으로 다루었다. 반면 칸트는 시간, 공간과 인과율의 목적은 단지 단순한 현상, 즉 마야의 작품을 유일한 최고의 실재로 승격시키고, 사물의 가장 내밀하고 진실한 본질을 현상으로 대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본질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르면 꿈꾸는 자를 더 깊이 잠들게 만드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1권, 498쪽) 데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런 인식과 더불어 내가 감히 비극적 문화라고 표현하는 문화가 시작된다. 이 문화의 중요한 특징은 최고의 목적으로 학문의 자리에 지혜가 들어서며, 지혜는 학문의 유혹적인 유인에 속지 않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세계의 전체상을 조명하고, 동정과 사랑을 통해 영원한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자라나는 다음 세대가 이처럼 대담한 시선으로, 괴물을 향해 영웅적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완전히 "결연하게 살기 위해" 저 낙천주의의 나약한 교리에 들을 돌린 악룔 퇴치자의 대담한 용맹성과 당당한 발걸음을 상상해보자. 자기 학습을 통해 진지함과 공포를 익히는 이 문화의 비극적 인간이 새로운 예술, 즉 형이상학적 위로의 예술, 다시 말해 그에게 어울리는 헬레나로서의 비극을 열망하면서 파우스트처럼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가? 가장 커다란 동경의 힘으로

오직 하나뿐인 인물에 생명을 부여해서는?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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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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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옆에 파우스트를 세우고 비교해야 한다

 

여기 영원한 현상 하나가 있다. 탐욕스러운 의지는 사물 위에 펼쳐진 환상으로 피조물을 삶에 얽어매고 생존을 강요하는 수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인식과 망상의 소크라테스적 쾌락에 사로잡혀 그것으로 실존의 영원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눈앞에서 하늘거리는 예술의 유혹적인 미의 베일에 휘감겨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현상의 소용돌이 밑에서 파괴할 수 없는 영원한 삶이 계속 흐른다는 형이상학적 위로에 붙잡혀 있기도 하다. 물론 의지가 매 순간 마련해주는 더 강력하고 더 비속한 환상에 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앞서 말한 세 가지 환상의 단계들은 고귀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그들은 존재의 짐과 부담을 무척 불쾌하게 느끼고 어렵게 찾은 자극제를 통해 이 불쾌함을 애써 잊어버리려 한다.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은 이 자극제들로 이루어졌다. 혼합률에 따라 우리는 소크라테스적 문화를 가지기도 하고 또는 예술적 문화, 아니면 비극적 문화를 가지기도 한다. 역사적인 보기를 찾아도 좋다면, 알렉산드리아 문화 또는 그리스 문화나 불교 문화가 있다.

 

우리의 현대 세계는 알렉산드리아 문화의 그물에 사로잡혀서 최고의 인식 능력을 갖추고 학문을 위해 봉사하는 이론적 인간을 이상으로 알고 있다. 이 이론적 인간의 원형이 바로 소크라테스다. 우리의 모든 교육 수단은 원래 이 이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 외의 다른 존재는 비의도적이었지만 허락된 존재로서 그 옆에 한 자리 잡으려고 힘들게 투쟁한다. …… 그 자체로 이해하기 쉬운 현대적 문화 인간 파우스트가 그리스인에게는 얼마나 이해하기 힘든 존재일까. 모든 학부를 다 돌아다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지식욕에 목말라 마술과 악마에게 몸을 파는 파우스트. 현대인이 저 소크라테스적 인식 욕망의 한계를 예감하기 시작했고 지식의 망망대해로부터 해안에 도달했다는 점을 인식하려면 소크라테스 옆에 파우스트를 세우고 비교해야 한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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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말 속에서는 적절하게 구현되지 못한다.

 

신화는 말 속에서는 적절하게 구현되지 못한다. 장면의 구조와 구체적인 이미지들은 시인이 말과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한층 더 깊은 지혜를 드러낸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셰익스피어에게서도 관찰할 수 있다. 예컨대 이와 유사한 의미에서 햄릿의 대사는 행동보다 더 피상적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햄릿론은 그의 말로부터가 아니라 극 전체에 대한 깊은 고찰과 개괄을 통해 얻어졌다. 우리는 그리스 비극을 단지 언어 연극으로서만 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암시했듯이 신화와 말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그리스 비극이 실제보다 더 단순하고 무의미하다고 잘못 생각하기 쉬우며, 고대인들의 증명에 따르면 그리스 비극이 실제로 가졌을 그런 영향보다 더 피상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언어의 시인이 실패한 일, 신화를 최고의 정신과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을 창조적인 음악가는 어느 순간에든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 아닌가! 진정한 비극이 소유하고 있을 위안,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위안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음악적 효과의 강한 힘을 학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 강력한 음악의 힘도 단지 우리가 그리스인일 경우에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우리 현대인은 그리스 음악을 듣고는 ㅡ 우리에게 낯익고 익숙한, 그래서 훨씬 더 풍부한 음악에 비해 ㅡ 음악적 천재가 청년 시절 수줍은 힘의 감정에 맞춰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집트의 사제들이 말했듯이 그리스인은 영원한 아이이고, 비극적 예술에서도 아이에 불과하다. 그들은 고상한 장난감이 자신들의 손에서 생겨나 ㅡ 장차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 불과한 것이다.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계시에 이르고자 하는 음악 정신의 투쟁은 서정시의 초기부터 아티케 비극에 이르기까지 계속 강해지다가 갑자기, 다시 말해 풍성한 만개(滿開)의 단계를 어렵게 쟁취한 이후 곧 꺾이고 만다. 그리고 그리스 예술의 표면으로부터 사라진다. 반면 이 투쟁에서 탄생한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은 비밀 의식 속에 생존해서, 멋지고 기이한 변형과 변종을 거듭하면서 진지한 정신을 멈추지 않고 매혹한다. 이 세계관이 언젠가 신비스러운 심연으로부터 솟아올라 다시 예술로 떠오르지 않을까?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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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동정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자들이다

 

우리는 생성하는 모든 것이 고통스러운 몰락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개별 실존의 공포 속을 들여다보지만 ㅡ 그러나 그것에 너무 놀라 마비되어서는 안 된다. 형이상학적 위로가 당분간 변화하는 형상들의 덧없는 세상사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준다. 우리 자신은 진정으로 짧은 순간 동안 원초적 존재 자체가 되며 그 존재의 억제하기 어려운 실존에 대한 탐욕과 의욕을 느낀다. 삶 속으로 몰려들고 부딪치는 수없이 많은 실존 형식들을 보면서 또 세계 의지의 넘쳐나는 생산성을 접하면서 우리는 투쟁, 고통, 현상의 파괴가 필연적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실존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원초적 욕망과 하나가 되는 순간, 디오니소스적 황홀경 속에서 이 욕망은 파괴될 수 없고 영원하다는 것을 예감하는 순간, 이 고통의 사나운 가시가 우리를 찌른다. 두려움과 동정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자들이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하나의 살아 있는 것의 생식 욕구와 하나로 용해되어 있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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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현상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이다

 

그 자체로 분리된 아폴론의 예술적 힘과 디오니소스의 힘이 서로 나란히 활동하게 되면 어떤 미학적 효과가 발생할까? 좀더 간단히 말해, 음악은 그림과 개념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ㅡ 이에 관해선 쇼펜하우어가 가장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도 이 문제에서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고 투명한 서술을 했다고 칭찬한 바 있다. 그가 서술한 부분 전체를 나는 여기서 인용할 것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309쪽. "이 모든 것에 따라 우리는 현상 세계, 또는 자연이나 음악을 동일한 사물의 서로 상이한 두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물 자체가 둘의 유사점을 유일하게 매개하는 것이고, 유사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매개체를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에 따르면 음악은, 세계의 표현으로 간주될 경우, 최고로 보편적인 언어다. 심지어 이 언어는 개념의 보편성에 대해서도, 개별적인 사물에 대한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음악의 보편성은 추상의 공허한 보편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며 일반적이고 명확한 내용과 결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음악은 기하학적 도형이나 숫자와 비슷하다. 즉 모든 가능한 경험 대상의 보편적인 형식으로서 모든 것에 선험적으로 적용 가능하지만,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가능한 모든 노력, 흥분과 의지의 표출, 즉 이성이 부정적이고 광범위한 개념인 감정으로 치부하는 인간 내면의 모든 과정이 무수히 가능한 선율 속에 표현된다. 그러나 소재 없이 항상 단순한 형식의 보편성 속에서 표현되며, 마치 육체 없이 육체의 가장 내적인 영혼을 따르듯이 현상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물 자체를 따른다. 음악이 모든 사물의 진정한 본질과 맺는 이 친밀한 관계로부터 다음 현상이 설명될 수 있다. 즉 어떤 장면, 줄거리, 사건, 환경에 적절한 음악이 흐르면, 음악은 그것의 가장 은밀한 의미를 해명해주는 것 같고 그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주석을 알려주는 듯한 까닭이 설명된다. 이는 어떤 교향곡이 주는 인상에 완전히 몰두한 사람이 음악을 들으면서 마치 삶과 세계의 모든 가능한 과정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 그는 자기 눈앞에서 떠다니던 사물들과 저 음악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진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말했듯이 음악은 현상의 모사가 아니라,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의지의 적절한 대상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이며, 세상의 물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것, 모든 현상에 대해 물 자체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과 구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구체화된 음악이라 불러도 되고 구체화된 의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왜 음악이 모든 형상, 즉 실질적 삶과 세상의 장면이 좀더 높은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도록 만드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물론 선율이 주어진 현상의 내적 정신과 유사하면 할수록 그 의미는 그만큼 더 명료해진다. 바로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시를 노래로서, 구체적인 묘사를 무언극으로서 또는 이 둘을 오페라로서 음악에 종속시킬 수 있다. 음악의 보편적인 언어에 종속된 인간의 삶의 모습들이 필연적으로 음악에 연결되어 있거나 음악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습들과 음악의 관계는 보편적인 개념들과 임의의 사례들과의 관계와 같다. 그 모습들은 음악이 단순한 형식의 보편성 속에서 표현하는 것을 현실의 명확성 속에서 묘사한다. 선율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 개념처럼 현실의 추상화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실은, 즉 개별적인 사물의 세계는 개념의 보편성과 선율의 보편성에,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것, 특수하고 개인적인 것, 개별 사건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개념과 선율의 두 보편성은 어떤 측면에서는 서로 대립된다. 개념들은 관조로부터 추상화된 형식, 즉 사물에서 벗겨낸 겉껍질만을 가지고 있어서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음악은 모든 형체들에 앞서 존재하는 가장 내밀한 핵심, 사물의 심장을 제공한다. 이런 관계는 스콜라 학파의 언어로 잘 표현될 수 있다. 즉 개념들은 사물 이후의 보편universalia post rem이지만 음악은 사물 이전의 보편universalia ante rem이고 현실은 사물 속의 보편universalia in re이다. 그러나 작곡과 구체적인 묘사 사이에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이 둘은 세상의 동일한 내적 본질의 상이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별적인 경우에 그런 관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다시 말해 작곡자가 어떤 사건의 핵심이 되는 의지의 활동을 음악의 보편적 언어로 표현할 줄 안다면, 그 노래의 선율, 그 오페라의 음악은 표현력이 풍부할 것이다. 그러나 작곡가가 발견한 둘 사이의 유사성은, 그의 이성이 의식하지 못한 채, 새계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으로부터 얻어져야 하며,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개념들을 통해 매개된 모방이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음악은 내적 본질, 즉 의지 자체를 표현하지 못하고 의지의 현상만을 불충분하게 모방할 뿐이다. 원래 모방하는 모든 음악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ㅡ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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