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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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의 세계 상징

 

서정 시인의 문학은 엄청난 일반성과 타당성을 가지고 이미 음악, 즉 서정 시인으로 하여금 형상의 언어를 떠올리도록 강요하는 음악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음악의 세계 상징은 바로 그 때문에 언어로써는 어떤 방식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근원적 일자의 가슴속에 있는 근원적 모순과 고통과 상징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현상의 위와 앞에 있는 어떤 영역을 상장화하기 때문이다. 음악에 비하면 모든 현상은 오히려 비유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상들의 도구이자 상징인 언어는 결코 음악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외부로 돌려놓을 수 없으며, 음악을 모방하는 즉시 언어는 음악과의 피상적인 접촉 상태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러는 동안 음악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아무리 유려한 서정적 표현을 통해서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올 수 없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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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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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떠나지 말게, 그리스인들의 민족적 지혜가 말하는 것을 듣게나."

 

"거기서 떠나지 말게, 여기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명랑성을 가지고 자네 앞에서 펼쳐지는 이 삶에 관하여 그리스인들의 민족적 지혜가 말하는 것을 듣게나."  미다스의 왕이 오랫동안 숲 속에서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현자 실레노스를 추적했으나 그를 잡지 못했다는 오랜 전설이 있다. 그가 마침내 왕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왕은 그에게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훌륭한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마신은 미동조차 없이 부동의 상태로 침묵했다. 그러다가 왕이 강요하자 마침내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가련한 하루살이여, 우연의 자식이여, 고통의 자식이여, 왜 하필이면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복될 일을 나에게 말하라고 강요하는가? 최상의 것은 그대가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이네.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無)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은 ㅡ 바로 죽는 것이네."

 

올림포스의 신들은 이 민족적 지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것은 고문받는 순교자의 황홀한 환상이 그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

 

지금 올림포스의 마의 산은 말하자면 문을 열고 우리에게 자신의 뿌리들을 보여준다. 그리스인은 실존의 공포와 경악을 알고 있었고 느꼈다. 그리스인은 살 수 있기 위하여 그 공포와 경악 앞에 올림포스 신들이라는 꿈의 산물을 세워야 했다. 자연의 거대한 힘에 대한 저 엄청난 불신, 모든 인식 위에 무자비하게 군림하는 저 운명의 여신 모이라, 인간의 위대한 친구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하는 저 독수리, 현명한 오이디푸스의 저 무서운 운명,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어머니를 살해하도록 강요한 아트레우스 일가에 대한 저 생식의 저주, 간단히 말해 우울한 에트루리아인들이 파멸에 이르도록 한 저 숲의 신의 철학 전체와 그들의 신화적 사례들 ㅡ 이 모든 것은 올림포스 신들의 저 예술가적 중간 세계를 통해 그리스인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롭게 극복되고, 아무튼 은폐되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살 수 있기 위하여 그리스인들은 이 신들을 아주 깊은 필연성에 의해 창조해야만 했다. 그 과정을 우리는 다음처럼 그려보아야 한다. 원래 있던 거대한 공포의 신의 질서가 저 아폴론적 미의 충동을 통하여 서서히 변화를 겪으면서 올림포스의 환희의 신의 질서로 발전되었다. 마치 장미꽃이 가시덤불에서 피어나는 것처럼. 만약 실존이 보다 높은 영광에 둘러싸여 그리스 신들 속에 표현되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민감하고 그렇게 격렬하게 탐하고 유일하게 고뇌하는 능력을 가진 그 민족이 실존을 달리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계속 살아가도록 유혹하는 실존의 보완과 완성으로서의 예술을 삶으로 불러들이는 그 충동이 또한 올림포스의 세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세계 안에서 그리스적 의지는 아름답게 변용시키는 거울을 앞에 들고 있다. 이렇게 신들은 스스로 인간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인간의 삶을 정당화한다 ㅡ 이것만으로 충분한 변신론이다! 그러한 신들의 밝은 햇빛 아래에서 실존은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호메로스적 인간의 본래 고통은 삶으로부터의 분리, 특히 머지않아 다가올 분리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실레노스의 지혜를 뒤집어, 그리스인들에 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나쁜 것은 곧 죽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나쁜 것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탄이 한번 울려 퍼지면, 그것은 단명한 아킬레우스에 관해서도, 나뭇잎과 같은 인간의 변화무상에 관해서도, 영웅 시대의 종말에 관해서도 다시 울릴 것이다. 설령 날품팔이로서라도 더 살아남기를 동경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영웅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아폴론적 단계에서 "의지"는 이러한 실존을 격렬하게 갈망하고, 호메로스적 인간은 이러한 실존과 하나됨을 느껴서 비탄 자체가 자신의 찬가가 된다.

 

… 그러나 소박한 것, 즉 가상의 아름다움에 저처럼 아름답게 얽혀 있는 상태는 얼마나 성취하기 힘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인 꿈의 예술가가 민족과 자연의 꿈의 능력과 맺는 관계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으로서 저 아폴론적 민족 문화와 관계를 맺는 호메로스는 얼마나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한가! 호메로스의 "소박성"은 오로지 아폴론적 환영에 대한 완전한 승리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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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전율이 뒤섞일 때

 

디오니소스적 주신가에서 인간은 자신이 가진 모든 상징적 능력을 최고로 고양시키도록 자극을 받는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 즉 마야의 베일을 파괴하고 종족의, 즉 자연의 수호신으로서 하나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표현되기 위하여 밀려 나온다. 이제 자연의 본질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새로운 상징의 세계가 필요하다. 우선 입, 얼굴, 말의 상징적 표현뿐만 아니라 몸의 부분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춤의 몸짓까지도. 그 다음에는 다른 상징적 힘들, 즉 리듬과 강약과 화음을 통한 음악의 상징적 힘들이 갑자기 격렬하게 솟아오른다. 모든 상징적 힘들의 이러한 총체적 발산을 파악하려면, 인간은 이미 저 힘들 속에서 상징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자기 포기의 높이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열광적 송가를 부르는 디오니소스 숭배자는 오직 자신과 같은 동류의 사람들에게만 이해된다! 아폴론적 그리스인은 얼마나 놀라서 그를 바라보아야만 했던가! 이 놀라움은, 저 모든 것이 본래는 자신에게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니고 또 자신의 아폴론적 의식은 하나의 베일처럼 이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은폐하고 있을 뿐이라는 공포의 전율이 뒤섞일 때 더욱더 커졌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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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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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바꾸어보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하에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합만이 다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외되고, 적대적이거나 억압된 자연 역시 자신의 잃어버린 탕아, 즉 인간과의 화해의 제전을 다시 축하하게 된다. 대지는 자발적으로 선물을 제공하고, 암벽과 황야의 맹수들은 온순하게 다가온다. 디오니소스의 수레는 꽃과 화환으로 뒤덮이고, 그 멍에를 메고 표범과 호랑이가 걸어간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바꾸어보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가득 차 먼지 속에 가라앉을 때 상상력을 가지고 물러서지 말라. 그러면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 자의 혹은 "파렴치한 유행"이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고하고 적대적인 모든 구분들이 부서진다. 이제, 세계의 조화라는 복음에서 각자는 자신의 이웃과 결합되고, 화해하고, 융해되어 있음을 느낄 뿐만 아니라, 마치 마야의 베일이 갈가리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자(一者)' 앞에서 조각조각 펄럭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웃과 하나가 됨을 느낄 것이다. 인간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현한다. 그는 걷는 법과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춤추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걸려 있음이 그의 몸짓에 나타난다. 이제 짐승이 말을 하고 대지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것처럼, 그로부터 초자연적인 것이 울려 퍼진다. 그는 스스로를 신으로 느끼며, 마치 꿈속에서 신들이 소요하는 것을 본 것처럼 그 자신도 황홀해지고 고양되어 돌아다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예술 작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원적 일자의 최고의 환희를 위하여 전체 자연의 예술적 힘은 여기 도취의 소나기 아래서 스스로 나타난다.

 

-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1장

 

 * * *

 

 

 

 

 

 

 

 

 

 

 

정명훈의 합창 교향곡 / 정명훈의 합창,

또 하나의 환희교향악의 전통, 한계를 뚫고 별들 너머로

 

 

인류의 화합을 꿈꾼 베토벤의 마음은 그의 교향곡 ‘합창’에 드러나 있다. 그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통해 모든 갈등이 종결되고 모두가 하나되기를 소망했다.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매년 ‘한해의 송가’로 무대에 올리는 이 곡의 원본 악보는 2001년 음악작품 중 최초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글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1770~1827)
교향곡 9번 D단조, Op. 125 ‘합창’(1824)
<연주시간: 65분>


“오, 벗들이여! 이런 소리는 아니오!”


이 외침과 함께 베토벤은 다시 한 번의 혁신을 감행했다. 통상 ‘합창 교향곡’이라 불리는 교향곡 제9번 D단조는 그가 남긴 아홉 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획기적인 걸작으로 꼽힌다. 이 교향곡은 규모 면에서 ‘에로이카’보다 장대하고, 내용 면에서 ‘운명’이나 ‘전원’보다 극적이고 환상적이며, 무엇보다 종악장에 성악이 등장함으로써 ‘기악음악의 아이콘’이었던 교향곡의 장르적 한계를 초월했다.

 

나아가 베토벤은 이 작품으로 교향곡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종악장에 과감하게 도입한 ‘환희의 송가’를 통해서 영원한 이상향에 대한 인류의 염원과 호소를 치열하고도 명료하게 부각시켰고, 그 결과 교향곡은 더 이상 단순한 음악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철학적・종교적 사유와 감정을 담아내는 거대한 용광로로 진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새로운 가능성은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리스트, 바그너, 브루크너, 브람스, 말러 등 후대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나긴 굴곡의 여정

 

위업에 이르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교향곡 제7번 A장조가 초연된 것이 1813년, 교향곡 제8번 F장조가 초연된 것이 1814년이었는데, 그 다음 교향곡인 ‘제9번’이 초연된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824년이었다. 이전까지의 교향곡들이 대개 1~3년 간격을 두고 발표되었음을 감안하면 무척 긴 공백기였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미 교향곡 제7번과 제8번의 작곡 단계에서부터 다음 교향곡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812년 5월의 한 편지에 ‘지금 세 편의 교향곡을 쓰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제9번’을 위한 작업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빈 회의가 열린 1815년부터인데, 당시의 스케치 노트에서 제2악장의 스케르초 주제가 발견된다. 또 1817년 9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의 스케치 노트에서는 제1악장의 대략적인 윤곽과 전체의 구상이 발견되며, 1818년에는 종교적인 노래를 도입하는 문제로 고민한 흔적이 나타난다. 그 구상에 따르면 그는 한 때 느린 악장에 그리스의 종교적이고 신비로운 가사를, 마지막 악장에 바쿠스의 제전을 배치하려고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무렵 베토벤은 하나가 아니라 두 편의 교향곡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그중 한 편은 순수 기악곡으로, 다른 한 편은 성악을 포함한 곡으로 완성할 생각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그의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스가 영국에서 전해온 작곡 의뢰에 따른 것이었는데, 1817년에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가 그에게 두 편의 교향곡을 위촉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작업은 또 하나의 대작 장엄미사곡 D장조 Op. 123의 작곡 등으로 인해 지연되었고, 그 후 재청탁과 작곡료에 관한 협상이 마무리된 1823년 초에 가서야 본격화되었다. 1823년 5월에 이르러 베토벤은 빈 남쪽의 온천휴양지인 바덴에서 ‘제9번’의 작곡에 몰두했고, 그 작업은 1824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베토벤이 마지막 악장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의 텍스트를 알게 된 시점은 그가 아직 고향에 살았던 179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본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인문학자 루트비히 피셰니히를 통해서 프리드리히 실러의 송시(Ode) ‘환희에 부침’을 접했고, 그 시에 음악을 붙이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실러의 송시는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5년 드레스덴에서 쓰인 것으로서, 당시 26세 청년이었던 실러는 독일의 봉건적 정치체제와 전제적 군주제에 대한 반발로서 이 시를 썼다. 실러는 이 시에서 인류의 화합과 인간 해방의 이상을 부르짖었는데, 원래는 이 시에 ‘자유에 부침’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지만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자유’를 ‘환희’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이 송가를 떠받치고 있는 유명한 주제선율, 일명 ‘환희의 주제’의 성립과정은 꽤나 복잡하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부분만 짚어보자면, 그 단초는 1794년 또는 1795년에 작곡된 가곡에서 이미 발견되며, 그 가곡의 선율은 1808년에 완성된 ‘합창 환상곡’ Op. 80의 주제로 다시 나타난다. 1812년에는 ‘환희의 주제’를 위한 또 다른 스케치가 나타나며, 1822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것과 동일한 형태가 스케치 노트에 등장한다. 즉 베토벤은 교향곡 작곡에 본격 착수하던 즈음에야 비로소 ‘환희의 주제’를 확정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념비적인 ‘합창 피날레’를 완성했던 것이다.

 


위대한 승리, 시대의 거울

 

마침내 1824년 5월 7일,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베토벤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대중적 행사가 열렸다. 이 날 공연에서는 교향곡 제9번 외에 ‘헌당식 서곡’ Op. 124과 장엄 미사곡 D장조에서 발췌한 세 곡도 연주되었는데, 무려 10여 년 만에 베토벤의 신작 교향곡이 초연된다는 소식에 객석은 만원이었고, 무대 위에는 바이올린 주자 24명, 첼로 및 베이스 주자 12명, 각 2명씩의 관악주자 등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자리했다. 베토벤도 무대 위에서 악보의 페이지를 넘기고 박자를 세며 서있었지만, 그의 청력이 거의 소실된 탓에 실질적인 지휘는 악장인 미하엘 움라우프가 맡았다.

 

합창’ 교향곡이 마지막 합창에 이은 열광적인 코다로 마무리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은 알토 가수의 도움을 받고서야 자신에게 열광적인 환호와 찬미를 바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베토벤이 생전에 거둔 가장 눈부신 승리였다.


베토벤과 그의 청중이 살았던 시대는 유럽 역사상 일대 전환점이자 격변기였다. 왕정과 공화정이 대립했고, 각지에서 혁명과 전쟁이 빈발했으며, 그에 따라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상황도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쳤다. ‘합창 교향곡’은 그런 시대상이 투영된 축도였고, 그 혼란의 극복과 종식을 향한 간절한 소망의 발로였다. 그리고 가혹한 운명에 맞서 불굴의 의지와 투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베토벤이 인류에게 던진 거대하고 명료한 메시지였다.

 

특히 마지막 악장에서 그는 존경했던 실러의 송시에 기대어 전 인류의 화합과 믿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이상향을 노래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혼돈과 부조리로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한 질타였고, 그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들의 이성과 감성에 대한 호소였으며, 우리 모두의 각성과 화해를 향한 촉구였다.

 

만일 베토벤 음악의 핵심을 ‘한계상황의 극복과 초월을 향한 의지’로 요약할 수 있다면, 이 교향곡만큼 그것을 효과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는 우선 첫 세 악장에서 자신의 이전 교향곡들에서 활용했던 고전적인 양식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제1악장은 서로 선명하게 대비되는 두 개의 주제를 가진 제시부, 투쟁적인 발전부, 재현부 이후의 심화 및 확장이라는 베토벤 특유의 도식을 다시 한 번 일으킨 드라마틱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열기와 기세는 이전의 모든 작품을 능가한다. 제2악장에서 베토벤은 풍자를 넘어서 거의 메피스토적인 익살극을 펼치는데, 다분히 스케르초적인 성격을 부여하고서도 굳이 ‘스케르초’로 명명하지 않은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제3악장에서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완서악장의 극치를 보여주는데, 두 개의 칸타빌레 선율에 의한 변주곡으로 이루어진 이 악장은 마치 낙원 또는 천상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종교적인 감흥마저 안겨준다.


 

궁극의 피날레

 

이제 제4악장에 이르면 베토벤은 기존 교향곡의 틀에서 탈피한, 전혀 새로운 양식의 교향곡 악장을 선보인다. 이 악장은 마치 앞선 악장들의 속박 또는 환영에서 뛰쳐나오는 듯한 관악기와 팀파니의 급속한 달음질, 격렬한 몸부림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잠시 후 ‘기악 레치타티보’에 의해서 이전 악장들에 대한 부정 혹은 재고가 이어진다. 제1악장의 첫머리, 제2악장의 리듬, 제3악장의 주제 등이 차례로 재현되지만, 모두 첼로와 베이스의 신중한 울림에 의해 차례로 거부되거나 보류된다.

이제 인간의 눈길은 그 너머에 존재하는 진정한 환희를 향해 던져진다. 누구나 쉽게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소박하고 간명한 ‘환희의 주제’가 현악기들에서 흘러나와 점차 모든 악기들로 확산되어 나간다. 서서히 상승하는 현의 노래, 찬란히 빛나는 트럼펫의 외침! 그러나 아직 성급했던가? 베토벤은 베이스의 묵직한 음성을 빌려 그것을 잠시 제지하고, ‘벗들’의 동참을 호소한다!


이 기념비적인 ‘합창 피날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오라토리오 내지는 오페라로 간주될 수 있으며, 그 안에는 소나타 형식, 변주곡 형식, 4악장 구조 등 교향곡의 여러 구성원리가 교묘하게 융화되어 있다. 이로써 베토벤은 형식, 기법, 정신 등 모든 면에서 기존 관념을 초월한 새로운 교향곡 양식을 출범시켰고, 나아가 시공을 초월해서 유효한 모든 인간의 이상과 염원을 감동적으로 설파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 피날레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등장시킨 것은 그의 교향곡들이 내포한 속성에서 기인한 필연적 결과는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비단 ‘제9번’ 뿐만이 아니라 그가 남긴 아홉 편의 교향곡 모두가 다름 아닌 ‘인간의 드라마’였다. 이렇게 보면 ‘합창 피날레’는, 비록 그가 애초에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의 교향곡 창작 이력을 마감하기에 적격이었다 하겠다.

 

 

* * *

 


O Freunde, nicht diese Töne!
Sondern lass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Freude!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Wem der grosse Wurf gelungen,
Eines Freundes Freund zu sein;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Mische seinen Jubel ein!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ennt auf dem Erde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le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Freude trinken alle Wesen
An den Brüsten der Natur;
Alle Guten, alle Bösen
Folgen ihrer Rosenspur.
Küsse gab sie uns und Reben,
Einen Freund, geprüft im Tod;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Froh, wie seine Sonnen fliegen
Durch des Himmels prächt'gen Plan,
Laufet, Brüder, eure Bahn,
Freudig, wie ein Held zum Siegen.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ss der ganzen Welt!
Brüder, über'm Sternenzelt
Muss ein lieber Vater wohnen.
Ihr stürzt nieder, Millionen?
Ahnest du den Schöpfer, Welt?
Such' ihn über'm Sternenzelt!
Über Sternen muss er wohnen.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
 대신 더욱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릅시다.
 기쁨!
 기쁨이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
 낙원에서 온 딸이여,
 화염과 같은 열정에 취해 우리
 그대의 성소에 들어가노라!
 관습이 엄하게 갈라놓았던 것
 그대의 마법이 다시 묶어,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친구의 우정을 누리는
 커다란 행운을 가진 자여,
 사랑스런 아내를 얻은 자여,
 와서 함께 환호하라!
 그렇다, 지상의 영혼 단 하나라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라면!
 그렇지 못한 자, 울며 조용히
 이 무리에서 떠나가라!
 자연의 가슴으로부터 모든 존재가
 기쁨을 마시도다.
 모든 선인도, 모든 악인도
 그 장미 길을 따르노라.
 그것은 우리에게 키스와 포도주를,
 죽음의 시험을 거친 친구를 주었고,
 벌레조차도 쾌락을 누리며,
 천사 케룹은 신 앞에 선다.
 기쁘게, 그의 태양들이
 장려한 하늘을 뚫고 날듯이,
 달려라, 형제여, 그대의 길을,
 즐겁게, 영웅이 승리를 향해 달리듯.
 안겨라, 수많은 인간이여!
 온 세상의 키스를!
 형제들이여, 하늘 너머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신다.
 그에게 무릎을 꿇느냐?
 창조주를 느끼느냐, 세상이여?
 하늘 너머에서 그를 찾아라!
 별들 너머에 분명 그가 사신다.

 

(출처 : http://www.seoulph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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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라고 불리는 저 디오니소스적 괴물의 언어로 말하자면,

 

대담한 시선으로 무시무시한 것을 향해 영웅적으로 행진해 가는,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용 정복자들의 당당한 걸음을 생각해보고, 완전하고 충만한 가운데 '결연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모든 낙천주의의 나약한 교리들에 등을 돌리는 과감성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문화의 비극적 인간이 진지함과 두려움을 향해 스스로를 교육해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예술, 즉 형이상학적 위안의 예술, 다시 말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헬레나로서의 비극을 갈망하며 파우스트처럼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가? 가장 커다란 동경의 힘으로

오직 하나뿐인 인물에 생명을 부여해서는?

 

"그것이 꼭 필요하지 않겠는가?" …… 아니다, 재삼 아니다! 그대들 젊은 낭만주의자들이여, 그것이 꼭 필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끝나는 것, 그대들이 그렇게 끝나는 것, 다시 말해 그대들이 그렇게 씌어 있는 것처럼 "위로받고", 진지함과 두려운 것을 향한 온갖 자기 교육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위로받는 것", 간단히 말해 낭만주의자들이 기독교적으로 끝나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 아니다! 그대들은 우선 차안(此岸)의 현세적 위로의 예술부터 배워야 한다. ㅡ 그대들이 이와는 달리 전적으로 염세주의자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면, 나의 젊은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웃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아마도 그대들은 언젠가 모든 형이상학적 위로 나부랭이를 악마에게 ㅡ 특히 형이상학을 제일 먼저 던져주게 될 것이다! 혹은 차라투스트라라고 불리는 저 디오니소스적 괴물의 언어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들어 올려라, 높이, 더 높이! 그리고 다리도 잊지 말아라! 그대들의 다리도 들어 올려라, 그대들, 춤을 멋지게 추는 자들이여, 그대들이 물구나무를 선다면 더욱 좋으리라!

 

웃는 자의 이 광관, 이 장미 화환의 관, 나는 이 왕관을 스스로 머리에 썼다. 그리고 나 스스로 나의 웃음을 신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나는 그렇게 할 만큼 충분히 강한 다른 자를 보지 못했다.

 

춤추는 자, 차라투스트라, 날개로 신호하는 가벼운 자 차라투스트라, 모든 새들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준비가 끝난 자, 축복받은 가벼운 자.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참된 웃음을 웃는 자, 성급하지 않은 자, 무조건적이지 않은 자, 도약과 탈선을 좋아하는 자, 나는 스스로 이 왕관을 머리에 썼다.

 

웃는 자의 이 왕관, 이 장미 화환의 관, 내 형제들이여, 나는 이 왕관을 그대들에게 던진다! 나는 웃음이 신성하다고 말했다.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내게 배워라 ㅡ 웃음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87쪽.

 

 - 『비극의 탄생, 또는 그리스 정신과 염세주의』, <자기 비판의 시도>,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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