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동안의 유럽 여행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내일이면 동유럽으로...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은 그렇게도 크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의 그 힘은 무한히 크다. 어디를 걷든지 우리는 역사의 유적 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키케로) 나는 그들의 용모와 자세와 의복을 고찰해 보기가 재미난다. "나는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내 입에 올려 보며, 그것을 내 귀에 울려 오게 한다. 나는 그들을 숭배하면 이런 위대한 이름들 앞에 일어선다."(세네카)

 - 몽테뉴

 

 * * *

 

사흘 전에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내한 공연을 보고 왔다. 연주 프로그램은 1부가 베토벤 교향곡 2번이었고 2부가 베토벤 교향곡 3번이었다.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연주 내내 포디엠에 선 정명훈 지휘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지휘'가 돋보였다. 유려하고도 풍부한 표현을 맘껏 뽐낸 오케스트라의 현악기들도 정말 좋았고, 플룻과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 등등 관악 파트도 흠잡기 어려울 만큼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줬다. 팀파니는 관현악과 완전히 하나가 된 듯 놀라운 일체감과 몰입을 이끌어 주었다. 그만큼 정명훈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찰떡 궁합이었다. 또한 베토벤이 467년 전통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는가를 새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들의 연주에 대한 놀라운 반응들과 벅찬 감동은 인터넷 공간을 조금만 다녀 봐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이쯤에서 슬쩍 내 이야기의 무대를 '드레스덴 슈타츠 카펠레'의 주무대인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훌쩍 옮겨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제나 무슨 이야기를 할 때면 '장소'가 주는 느낌만큼 우리에게 직접 강렬하게 호소하는 것도 드물지 싶기 때문이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음악을 어떻게 드레스덴과 따로 떼어 놓고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 작년 여름, 우리 일행 넷이 뮌헨에 도착한 후 자동차를 빌려 타고 뉘른베르크와 라이프찌히를 빠른 속도로 둘러보고 난 뒤에 서둘러 도착한 곳이 바로 '옛 작센 공국의 수도'로 명성이 높았던 도시 드레스덴이었다. 7월 초순이어서 그런지 늦은 오후인데도 햇살은 몹시 강렬했다. 미리 예약해 놓은 '호텔 엘브플로렌츠 드레스덴'은 호텔 로비가 아주 인상적이었고 전체적으로 꽤나 한적하면서도 직원들은 친절했고 시설은 비교적 훌륭했다.

 

 

 - '음악'으로 명성이 드높은 도시여서 그런지 호텔 로비에도 그랜드 피아노가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 우리는 드레스덴에서 고작 '1박 2일'에 모든 일정을 끝내고 다음날엔 베를린으로 가야 했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나서 서둘러 택시를 잡아 타고 '츠빙거 궁전'으로 곧장 이동했다.

    이곳에는 루벤스 등 유명한 거장들의 명화가 소장되어 있다고 하나 우린 바빠서 궁전 외관만 보는 데 그쳤다.

 

 

 - 궁전을 통과해서 엘베강 쪽으로 나오면 '극장 광장'이 나온다.

   광장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 가운데 왼쪽 건물은 대성당(카테드랄)이고 오른쪽은 드레스덴 성이다.

 

 

 - 이 모든 건축물들이 1945년 2월에 그 유명한 드레스덴 폭격으로 모조리 폭삭 주저앉았을 텐데 언제 어떻게 이렇게 번듯하게 다시 되살려 놓았을까 몹시 궁금하다.

 

 

 - 혼자 건축물들을 둘러 보며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함께 온 일행 셋은 어디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홀로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며 '드레스덴의 일상'을 잠시나마 엿봤다. 

 

 

 - 이 건물이 바로 드레스덴 음악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드레스덴 젬퍼 오퍼'이다.

    1841년 엘베 강 유역의 중심가인 극장 광장에 건립되어 도시의 문화적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아쉽게도 이 유명한 건물의 '전경'을 미처 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건물이 '젬퍼 오퍼'인 줄도 몰랐다.)

 

 

 - '젬퍼 오퍼' 건물의 측면. 1838∼1841년 건축가인 젬퍼가 건축하였는데 훗날 모두 불타버렸고 그의 아들이 재건했다고.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탄호이저》, R.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엘렉트라》등 수많은 명작이 바로 이곳에서 초연되었다고 한다.

 

 

 - 사실 우리 일행은 '드레스덴 젬퍼 오퍼'를 찾기 위해 꽤나 여러 시간 동안 헤맸다. 우리는 '젬퍼 오페라 하우스'를 코앞에 두고도 몇 번씩이나 애써 그 건물을 외면하는 실수를 반복했다. 혹시나 다른 곳에 '진짜 젬퍼 오퍼'가 있을 줄 알고 더 찾아 헤맸던 것이다. 우리는 '극장 광장'을 벗어나 저 멀리 '성모 교회(Frauenkirche)'까지 걸어 갔다가 다시 '극장 광장'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성모 교회' 근처엔 눈을 씻고 아무리 찾아봐도 '젬퍼 오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젬퍼 오퍼' 근처로 되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건물이 '젬퍼 오퍼'라는 사실을 끝끝내 확신하지 못했다. '분명 이 건물이 젬퍼 오페라 하우스가 맞을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우린 다시 '성모 교회'가 있는 '노이마르크트 광장'으로 되돌아 걸어 갔다.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었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을 걷고 헤매는 바람에 우린 몹시 지치고 배가 고파 더이상 걸을 힘도 없었다. 점심은 커녕 음료수 한 잔도 마실 생각을 못했다. 우리는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노천 카페' 한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이 나오기만 코가 빠지도록 기다렸다. 이때 먹었던 이탈리안 스파게티와 독일 맥주가 어찌나 맛있던지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다.

 

 

 -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갈증은 독일 밀맥주를 거푸 주문해서 가라앉히고 나니 그때 겨우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은 오후 8시 35분을 가리키는데도 해는 아직 창창하다. 드레스덴의 위도(북위 51° 3′) 때문이었다.

 

 

 - 드레스덴은 '야경'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밤 10시는 지나야 야경을 볼 수 있을 듯하다.

 

 

 - '성모 교회'의 시계는 저녁 9시를 넘기고 있는데도 아직 '저녁 햇살'이 건물 위쪽을 여전히 비추고 있다.

 

 

 -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독일 맥주'를 종류별로 두루 맛볼 정도로 오래 죽치고 앉아서 마냥 쉬었다.

 

 

 - 땅거미가 밀려오면서 차츰 주위가 서서히 어둡기 시작하자 우리 일행은 '브륄의 테라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중에 아주 멋진 '오페라 아리아 길거리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동전을 두둑히 쏟아 넣고 기념촬영까지 했다.

 

 

 -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엘베 강변의 테라스 '브륄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엘베 강의 야경.

    현지 시각으로는 밤 10 정각이었는데도 방금 해가 진 듯한 모습이다.

 

 

 - '브륄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대성당(카테드랄) 쪽 야경(사진의 오른편이 엘베 강변)

 

 

 -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젬퍼 오페라 하우스'가 이 야경 사진에 비로소 오롯이 담겼다.

    저 멀리 오른쪽에 보이는 단아한 모습의 건물이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 엘베 강변에서 츠빙거 궁전 동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기마 동상'이 있는 극장 광장엔 인적이 뜸하다.

    사진 오른쪽 끝에 일부만 담긴 건물이 '젬퍼 오페라 하우스'이다.

 

 

이제 다시 내 얘기를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옮겨야 할 때다. 어쩌면 지금 내가 너무 지나치리만큼 '드레스덴'이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도 달리 있는게 아니지 싶다. 그건 바로 '음악에 대한 감상'을 제대로 쓰는 일이 몹시 어렵게 느껴지고 약간은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곧바로 목표를 향해 돌진할 엄두를 내지 못하니 괜스레 변죽만 잔뜩 울리는 꼴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이왕 내친 마당이니 음악에는 아직까지도 어두운 눈과 귀를 가진 내가 속절없이 다소 어줍잖은 얘기를 늘어놓더라도 귀밝고 눈밝은 독자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슬쩍 눈감아 주기를 미리부터 주제넘게 청탁을 넣고 나서 내 이야기를 마저 이어갈까 싶다.

 

먼저 1부에 연주되었던 '베토벤 교향곡 2번' 부터 시작하자. 사실 베토벤 교향곡들은 홀수로 된 작품들이 너무 유명하고도 두드러진 탓에 짝수 교향곡들은 '6번 전원교향곡'을 빼고는 자주 들을 기회가 드물다. 나 또한 이번 연주를 예약할 때부터 그런 생각을 가졌었다. '교향곡 3번 연주'는 늘 마치 기다리고 있었기나 한 것처럼 반가웠지만 '2번 연주'는 '아직은 나에겐 낯선 작품인데.... 어쩌나...' 하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엔 공연을 보러 가기 전부터 아예 작정을 하고 '교향곡 2번'을 집중적으로 미리 들어보기로 했다. 따로 구입해 놓은 음반이 없어도 좋았다. 유튜브만 열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찾은 보물이 바로 '다니엘 바렌보임'이 2012년에 로열 앨버트 홀에서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 실황 앨범이었다. 나는 왜 이토록 훌륭한 실황 연주를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영상을 보고 들으며 나는 '교향곡 2번'에 완전히 푹 빠져 지냈다. 요 며칠간 '바렌보임의 2번 교향곡'만 열 번 이상은 들었던 듯하다. 물론 3번, 5번, 7번, 9번도 빼놓지 않고 마저 들었다. 바렌보임의 지휘는 그만큼 흡인력이 강했다. 그리고 '2번 교향곡'에 대해서는 다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영상까지 두루 찾아 서로 비교하며 들을 기회도 가졌다.

 

 

 

'베토벤 교향곡 2번' 공연을 위해 내가 찾아본 영상은 2012년부터 드레스덴 슈타츠 카펠레를 이끌고 있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빈 필 연주와 마리스 얀손스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연주였다.

 

 

 

이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분명 세계 최고 수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귀에는 유독 다니엘 바렌보임의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연주만이 가슴에 너무나 직접 와 닿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바렌보임의 지휘 모습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지만 젊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생기발랄하면서도 거리낌없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는 연주 모습 자체가 '베토벤 교향곡 2번'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베토벤 교향곡 2번'은 그가 청력을 잃기 시작하면서 극도의 상심을 겪은 끝에 마침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자살을 결심할 만큼 삶의 깊은 고통을 겪은 이후에 다시금 자신을 추스려 일으켜 세운 끝에 내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샘솟는 '예술혼'을 활활 불태우기 시작하면서 열정적으로 완성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교향곡을 들으면 '유서'를 쓸 만큼 깊은 실의에 빠졌던 예술가의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삶에 대한 의욕과 환희'가 네 악장 여기 저기에 가득 넘쳐나는 점이 가장 놀랍다.  너무나 밝고 생기있고 익살스럽고 재치가 넘치고 조화롭고 감미로워서 '2번 교향곡' 이후에 베토벤이 쏟아낸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위대한' 걸작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유쾌하고 발랄하면서도 생동하듯 약동하는 젊은 분위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곡이다. 베토벤이 이처럼 위트 넘치고 유쾌한 면모를 지닌 사람이 맞는가 싶고 또한 그의 내면이 이토록 명랑하고 생기발랄한 데서부터 어떻게 그토록 위대하고 장엄한 쪽으로 빠르게 나아갔는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색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이 작품의 작곡 연도가 1802년이니 과연 '베토벤의 싱그럽고도 꿈많은 푸른 시절'을 한껏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조금도 없지 싶다.

 

사실 나는 몇 년 전에도 '베토벤 교향곡 2번과 3번'으로만 채워진 공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물론 공연 전에 미리 연주될 '두 작품'을 두어 번쯤 듣고 갔음에 틀림없는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몰라도 도무지 베토벤의 2번 교향곡이 내 마음에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그 여파였는지는 몰라도 그 당시 2부에 연주되었던 '3번 교향곡'마저 제대로 몰입이 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을 정도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가 2012년 11월 20일이었으니 정확히 3년 전의 일이었다.

 

 

 

아무튼 그런 우여곡절과 부단한 예습(?)을 통해 이번 드레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베토벤 교향곡 2번' 연주를 손꼽아 기다려 왔으니 내가 생각해도 이번 연주는 '대실망' 아니면 '대만족' 그 어느 쪽으로든 판가름이 분명하게 날 터였다. 아... 그런데 막상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분위기가 제대로 잡혔다. 글쎄, 나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들이 연주가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객석에서 먼저 튀어나왔던 것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조율을 마치고 나서 곧이어 정명훈 지휘자가 등장하는데 객석 여기저기서 '열렬한 환호성'이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한동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그에겐 분명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성이 엄청난 힘이 되겠구나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지휘대에 올라선 그는 예전에 봤던 모습과는 어딘가 달라진 듯했다. 몸짓과 손짓 하나하나가 자신감과 열정으로 가득 넘쳐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로서의 자부심도 분명 있었을 테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 호흡을 맞춰온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가 연주할 곡이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2번'이었던 만큼 그도 마치 베토벤처럼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금 '생기발랄하고 유쾌하고 즐겁고 힘찬' 연주 속으로 완벽하게 다시금 몰입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으리라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예술가로서 한 평생을 음악과 함께 살아온 그가 오케스트라 지휘를 통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 말고 달리 그가 자신을 더 훌륭하게 표현할 방법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는 완벽하게 자신을 최고의 모습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엄청난 연주와 함께 말이다.

 

그의 이날 지휘에는 여태껏 내가 예술의 전당에서 직접 봤던 다른 어떤 지휘자에게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혼신을 다하는 듯한 절절한 에너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물론 그의 이번 연주 성공은 5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명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오랜 전통과 드높은 자부심과 훌륭한 연주'가 단단한 바탕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을 갈고 닦고 서로 호흡을 맞춰야만 이토록 놀라운 경지의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그들은 유감없이 보여주고 들려줬다. 베토벤이 이 오케스트라를 두고 왜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극찬했던가를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는 무대였다고 여겨도 좋겠다 싶었다. 그만큼 대단한 연주였고 관객들도 연주가 끝나자 '브라보'를 연발하면서 뜨거운 박수로 열렬한 호응을 보여줬다. 나 또한 4악장 후반부로 갈수록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끝내 마구 쿵쾅거려서 그 흥분을 억누르기 힘들 정도였다. 4악장이 끝나자말자 목구멍까지 차오른 벅찬 감동을 쏟아내듯 '브라보'를 외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2부에 연주된 '교향곡 3번 영웅'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너무나 유명해서 내 이야기를 짧게 마무리지어야 옳지 싶다. 그 힘차고 웅장하게 휘몰아치는 드센 폭풍같은 격정적인 울림들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일명 '에로이카'로 불리는 이 교향곡은 베토벤이 '2번 교향곡'을 만든 다음에 뒤이어 작곡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곡가 자신에게도 '영웅적인 작품'이 되었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너무 식상할 정도로 진부한 얘기로 들린다. 사실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되돌아 보노라면 '영웅'의 호칭이 붙어 마땅할 인물들 가운데 '나폴레옹'은 어쩌면 너무 왜소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는 생각마저 든다. 어쨌든 그는 유럽을 호령한 '전쟁 영웅'임에는 틀림없지만 스스로 자신을 '황제'라고 칭한 이후부터 급속한 몰락을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베토벤조차 '민주공화정을 부정하는 황제 나폴레옹'에 대실망하여 '보나파르트 교향곡'이란 이름을 단칼에 지워버리고 그저 '신포니아 에로이카 – 한 위대한 인물을 추념하기 위해' 라고 새로이 이름을 부여했겠는가.

 

나는 이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참된 영웅들은 어떤 인물들일까를 곰곰 생각해 볼 때가 더러 있다. 내가 책들을 통해서 만났던 호메로스를 비롯한 위대한 고대 시인들과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여러 철학자들,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비롯한 위대한 작가와 미술가와 음악가들, 그리고 다윈이나 뉴튼과 같은 과학자들이 진정한 인류의 영웅들이지 않을까. 나폴레옹처럼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중들을 싸움터로 내몬 전쟁 영웅 말고 말이다.

 

나는 이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힘찬 기운과 불굴의 의지로 가득찬 '영웅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영웅들의 씩씩하고 용감했던 걸음걸이'를 하나씩 떠올리면서 기분이 한껏 부풀어오르는 걸 자주 느낀다. 그리고 3악장과 4악장에서 느껴지는 '영웅이 열어젖힌 또는 열어젖힐 밝은 미래'가 어떤 형태로든 '나 자신의 밝은 미래'와도 희미하게나마 연결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욕심마저 품을 때도 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밝은 미래가 틀림없이 다가오리라는 그런 '굳건한 희망'보다 우리의 기운을 샘솟게 하는 게 달리 무엇이 얼마나 더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번에 정명훈의 지휘로 듣게 된 3번 교향곡 중에서도 특히 2악장을 들으며 너무나 깊은 감동을 받았다. 원래 '장송 행진곡'으로 잘 알려진 2악장은 당연히 장엄하고도 숙연한 느낌이 충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느낌이 너무 슬픔과 애도만으로 가득한 분위기는 아니다. 더구나 '영웅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비탄도 아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영웅 교향곡의 2악장'은 '영웅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한 사람의 거대한 발자취와 업적'을 생각나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차라리 슬프기보다는 '저멀리 아득히 멀어지면서 사라져가는 거인의 뒷모습'을 시야에서 완전히 놓치게 되는 마지막 한 순간까지 붙잡으려 애쓰며 '응시'하는 거대한 추모객들의 눈길이 연상된다.

 

이번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3번 교향곡 2악장 연주는 지휘자 정명훈이 '유난히 느린 템포로 이끌어낸' 덕분에 더욱 놀랍고도 매혹적으로 다가온 듯했다. 애잔하면서도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끝내 긴 침묵 속으로 사라져가는 여운을 멋지게 표현해낸 현악 파트와 팀파니의 잔잔한 울림이 정말 놀라웠고 베토벤의 선율에 따라 고요히 침묵 속으로 침잠하는데 성공한 듯한 관객들의 숙연한 고요도 몹시 감동적이었다. 나는 2악장의 중반을 넘어갈 때부터 음악에 완전히 몰입되어 가볍게 눈물이 고일 만큼 특별한 감동을 받았는데 '이럴 땐 눈물을 좀 흘려도 좋지 않을까. 아니 이대로 펑펑 좀 소리내어 속시원히 울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마저 아주 잠깐 동안 들었었다.

 

 

 

베토벤의 2번 교향곡과 3번 교향곡 모두 흠잡을 데 없는 명연주를 마치고 나서 관객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지자 정명훈 지휘자도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앙코르 연주곡이 무얼까 몹시 궁금했는데 지휘자가 친절히 곡명을 알려주었다. '베토벤을 연주한 이후에는 앙코르를 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베토벤 이후엔 여전히 베토벤밖에 없다'면서 '7번 교향곡 4악장'을 들려주겠단다.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성이 짧게 쏟아진 이후 주체하기 힘들다는 듯이 곧바로 질풍과도 같이 절정을 향해 내달리는 호쾌한 연주가 이어졌다.

 

지휘자가 너무 흥분한 탓에 템포를 지나치게 빠르게 가져가는 바람에 아주 약간씩 흔들리는 느낌이 없지는 않았으나 베토벤 7번 4악장 연주 또한 이날 연주의 격한 감동을 배가시키기엔 더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언젠가 이들이 베토벤 교향곡 7번을 들고 다시 한국을 찾아준다면 그땐 기필코 그들의 연주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성급한 생각마저 들었다. 혹여 언젠가 내가 다시 드레스덴을 찾아갈 날이 온다면 그땐 꼭 '드레스덴 젬퍼 오퍼'를 똑바로 찾아가 직접 이들의 연주를 다시 만나보고 싶은 거창한 욕심마저 들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이라면 아무래도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빼놓기 어렵다.)

 

이렇게 긴 글을 쓰고 나니 새삼 베토벤을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올해 봄에 난생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들렀을 때 우리 일행이 무리하게 시간을 할애하여 기어코 빈 외곽에 자리잡은 '그의 무덤'을 애써 찾아가 직접 헌화한 일은 지금 생각해 봐도 여간 잘한 일이 아니었구나 싶기도 하다. 이번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내한 연주를 직접 듣기 위해 비싼 티켓값을 지불한 일은 이제 명백히 잘한 일이 되었다. 만약에라도 내가 이 공연을 그냥 스윽 지나쳤더라면 작년 여름에 드레스덴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젬퍼 오퍼'를 찾아 헤맸던 시간들을 사진과 글로 엮어서 이렇게 남길 일도 결코 없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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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음악가들인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가 바로 여기에 묻혀 있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의 무덤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일인데, 그토록 위대한 음악가들이 여기 한자리에 다 모여 있었다. 
    빈을 방문한 각국 여행자들이 저마다 꽃다발을 들고 이 공동묘지를 찾는 이유를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 ‘음악가들’ 묘역의 중심에는 모차르트가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무덤은 실제 무덤이 아닌 기념비다.
    모차르트 기념비 뒤 양쪽으로는 그를 흠모했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슈베르트는 아예 “죽으면 모차르트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옆으로는 ‘왈츠의 제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베토벤의 계승자' 브람스의 묘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 아래 사진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무덤 뒤쪽엔 <라데츠키 행진곡>을 쓴 그의 부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역시 작곡가 겸 지휘자인 요제프 등 음악가 형제들의 무덤이 늘어서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경기병 서곡>의 프란츠 폰 주페, 지휘자인 요한 헤르베크의 묘도 발견할 수 있다고.
    작곡가 쇤베르크와 체르니도,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건축가 아돌프 로스도 이곳에 묻혀 있다고...

 


 - 이곳이 바로 베토벤(1770∼1827)의 묘.
   그는 독일의 본에서 태어나 17세 때 빈으로 건너가 빈의 사교계에서 환영을 받으며 유명해졌다.
   수많은 명곡을 작곡한 뒤 난청에 시달리다가 악화되자 빈 외곽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쓴 적도 있다.
   요양을 위해 바덴 등 빈 교외의 온천 휴양지에 머무른 적도 많았고, 구시가에서도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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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5-11-23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향악 연주 듣고 그렇게 감동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티켓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차 시간이 촉박하지 않았다면 더 앉아있다 오고 싶었습니다.
이 글을 보고 저도 드레스덴에 꼭 가봐야겠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5-11-23 16:08   좋아요 0 | URL
BRINY 님께서도 이번 공연에 오셨었군요. 음악 연주는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감동보다 더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드레스덴뿐만 아니라 뮌헨, 라이프찌히, 베를린 등지를 함께 다녀오셔도 좋을 듯합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붉은돼지 2015-11-23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래식은 제 오랜 숙제입니다...클래식 공부를 좀 해야겠다...항상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알라딘에서 아바도의 베토벤 전집을 할인행사하길래 구매했는데
운명 교향곡 하나 듣고는(이것도 다 들은 것은 아니고요...) 책꽂이 속으로 묻혀버렸습니다. ㅜㅜ

oren 2015-11-23 16:19   좋아요 0 | URL
어렵게만 느껴지는 클래식 음악도 자꾸 듣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저절로 배우게 되는 언어와 비슷한 게 아닐까 싶어요.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자주 접하다 보면 자연스레 가까워 질 수도 있고요... 요즘은 유튜브만 찾아봐도 아주 훌륭한 `실황 연주`를 마음껏 골라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클래식을 `부담스런 숙제`라 여기지 마시고 시간 나실 때마다 틈틈이 즐기시면 언젠가는 붉은돼지 님께서도 클래식을 늘 곁에 두고 만나는 좋은 친구처럼 사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리산 둘레를 따라 만난 풍경 ①

 

사물들이 우리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시선이 가는 경로에서 벗어나 있기보다는 우리의 정신과 눈을 그쪽으로 가져가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젤리(jelly)에도 보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 눈 그 자체에도 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넓게, 혹은 얼마나 가까이 좁게 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자연현상의 아주 많은 부분을 이런 이유로 인해 사는 동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원사는 단지 자신의 정원만 본다. 정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공급은 수요에 응한다. 자연은 돼지 앞에다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 풍경은 우리가 소중히 여길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한 티끌의 더도 아니라-의 아름다움만을 우리에게 내보인다. 어떤 사람이 한 특정한 언덕 꼭대기에서 보게 될 실제 사물들은 다른 사람이 보게 될 사물과는 바라보는 사람이 다른 것만큼 상이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때 진홍참나무가 이미 당신 눈 속에 있어야 한다. 그것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중에서

 

 * * *

 

올해 가을도 이번 주말에 내릴 비와 함께 영영 작별이지 싶다. 가을은 책만 붙잡고 지내기엔 너무 억울하다 싶을 만큼 풍경이 너무 다채롭다. 그래서 해마다 가을이 오면 누구라도 어딘들 단풍 구경이라도 좀 다녀와야 계절을 제대로 보낸 듯한 느낌마저 갖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늦여름 어느날, '언제 하루 좀 일찍 마치고 강화도로 장어 구이나 먹으러 가자'던 며칠 전 약속이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불쑥 실행에 옮겨졌었다. '그날' 뜨거운 숯불에 노릇노릇 구워진 장어구이를 안주 삼아 우리 다섯 사람이 소주를 얼마나 많이 마셔댔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좀 과했다 싶을 정도였다. 그날 따라 느닷없이 쏟아진 장대비 때문에 강화도 외포리 근처 장어집엔 손님이 드물었고, 우린 바깥 날씨가 비바람이 치든 말든 조금도 아랑곳 없이 오로지 장어를 얼마나 실컷 먹어야만 제대로 만족할 수 있을까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노릇노릇 구워진 장어가 연신 빠르게 석쇠에서 사라지는 그만큼 동시에 소주병들도 금세 제 속을 말끔히 비워내고 한켠으로 밀려나기 바빴다.

 

드문 드문 자리를 차지했던 손님들마저 어느새 다 떠나고 나자 우리 테이블에서 열심히 장어를 뒤집으며 더러 소주잔을 몇 차례 거들던 아줌마는 기어코 우리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술을 제법 마셔대고 있었다. 오십 대 후반쯤 된 듯한 그 여인은 적어도 겉보기엔 장어집에서 일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잠시 여기서 일하는 중'이라고 어설프게 말했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엔 '식당 종업원 신분'일 뿐이었는데도 그 여인은 어느새 '반은 손님' 신세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 아무튼 지나친 술기운이 일을 그렇게까지 이끈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날 함께 갔던 선배 부부가 이미 그 장어집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싶다.

 

어쨌든 그날 제대로 발동이 걸려 거나하게 취한 분위기에서 선배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많은 얘기들 가운데 놓쳐선 안 될 게 바로 '늦가을쯤 남원으로 한 번 놀러 가자'는 거였다. 그 분의 고향이 남원이었고 이미 예전에도 선배 부부와 함께 남원·구례·하동·광양 등지로 두어 번 여행을 다녀온 터여서 아내도 얼씨구나 좋다고 즉답을 했다. 이번 여행은 그렇게 해서 늦여름 밤에 비가 내리는 강화도에서 그 싹을 틔웠던 셈이다. 그렇게 의기투합했으니 지난 주말에 '내내 비가 올 예정'이라는 일기 예보는 이번 늦가을 여행을 훼방놓을 구실이 조금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늦가을 풍경'은 이미 늦여름부터 미리 마음 속에 꽉 자리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남원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광한루.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

 

 

 - 광한루를 찾는 사람들의 옷차림마저 단풍처럼 울긋불긋하다.

 

 

 -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1419)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고.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라 칭한 후 ‘광한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광한루는 소설『춘향전』에서 이도령과 춘향이 인연을 맺은 장소로 더 유명한 곳이다. 광한루 앞 연못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한다고 하니 오작교가 빠질 수 없다. '애절한 그리움'을 가슴 속에 켜켜이 간직한 숱한 선남선녀들이 바로 저 '까마귀'와 '까치'를 간절히 쓰다듬으며 '다시 만날 그날'을 마음 속으로 빌었을지 모를 듯싶다.

 

 

 - 날씨도 꾸물꾸물한 늦가을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빈 배' 한 척이 몹시도 처량하고 쓸쓸해 보인다.

 

 

 - 늦가을 오후는 이내 저물기 마련. 우리는 서둘러 남원에서 중화요리로 유명한 '동춘원'으로 이동했다.

 

 

 - 이번 여행을 기획(?)한 선배님의 초등학교 동창생이 마침 '동춘원'의 사장님이었다.

    쥔장이 알아서 내놓은 요리는 '유산슬'과 '자연송이 요리'였다. 넷이서 실컷 먹을 만큼 푸짐하고 맛있었다.

 

 

 - 여기에 숱하게 와 보신 선배님이 기어이 '찹쌀 탕수육'까지 시키셨다. 정말 부드럽고 감칠 맛이 난다.

 

 

 - 저녁을 마치고 나서 남원 시내 야경을 볼 수 있다는 '원각사 전망대 카페'에 들렀다.

    마침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니 야경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 이튿날 아침 목적지인 '지리산 칠선 계곡'으로 가는 길에 잠시 '황산벌'을 지나면서,

    판소리의 명인이었던 '가왕( 歌王) 송흥록과 국창(國唱) 박초월 생가'에 잠시 들렀다.

 

 

 - 목적지인 칠선계곡 초입에 도착했다. 천왕봉에서 시작되는 지리산 최대의 '칠선 계곡'이 바로 여기서 끝나고 작은 내를 이룬다. 저 멀리 산허리에 걸린 물안개가 마치 산불이 났을 때 일으키는 연기처럼 자욱하다.

 

 

 - 칠선계곡이 시작되는 초입에 자리잡은 산촌. 단풍으로 물든 지리산 산자락이 그림처럼 예쁘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칠선 계곡'도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맨 처음 칠선 계곡을 밟은 건 1991년 가을, 고교 친구들 셋이서 '지리산 종주 산행'을 했을 때이다.

    닷새 분량의 식량과 연료와 코펠, 버너, 텐트까지 갖춘 70리터짜리 배낭이 무려 35kg에 달했던 기억이 난다.

    '지리산 화엄사 → 노고단 → 뱀사골 → 연하천 → 세석평전 → 장터목 → 천왕봉 → 칠선계곡'으로 이어진

    고된 행군의 최종 종착지가 바로 아래 사진에 보이는 이곳 '마천 추성마을'이었음을 이번에 뒤늦게 알았다.

 

 

 - 칠선계곡의 등반로는 바로 여기 '마천면 추성마을'에서 시작하여 천왕봉까지 길게 이어진다. 1992년 여름에 '지리산 종주 산행'을 왔을 땐 '천왕봉 일출'을 본 뒤에 곧장 칠선계곡으로 하산했는데 계곡이 어찌나 험난하던지 배낭을 메고는 도저히 낭떠러지를 빠져 내려갈 수 없는 곳에선 '짐부터 먼저 내던지고 몸은 따로' 내려갔던 기억이 선하다.

 

 

 - 마치 여느 산골 마을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익숙한 풍경이다. 잠겨진 나무 대문 너머로 몰래 풍경을 담았다.

 

 

 - 골목길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계곡으로 살짝 내려가 봤다. 비에 젖은 바위들이 축축하니 정겹다.

 

 

 - 무슨 풀인지는 이름조차 몰라도 새빨갛게 물든 대궁들이 예쁘기만 하다.

 

 

 - 주문한 음식이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홀로 비를 맞으면서도 부지런히 주변 풍경을 담는 재미가 쏠쏠하다.

 

 

 - 여기서 버스를 타면 동서울까지 곧바로 올라갈 수 있는 버스가 비를 맞으며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 늦가을 비가 나뭇가지마다 촉촉히 적셔주니 괜히 나조차 속시원하고 반갑다. 이 결실들이 채 다 떨어지기도 전에 찬바람이 쌩쌩 불 테고 하얀 눈이 나뭇가지마다 소복히 내려앉을 날도 이젠 그리 멀게 남지는 않았지 싶다.

 

 

칠선 계곡

 

지리산 최대의 계곡미를 자랑한다.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계곡이면서 험난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 그리고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는 칠선계곡은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가 펼치는 선경이 마천면 의탕에서 천왕봉까지 장장 16㎞에 이른다. 들어가면 갈수록 골은 더욱 깊고 날카로워, 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하여 숱한 생명들을 앗아가 "죽음의 골짜기"로 불린다.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칠선계곡을 등반하고 싶어하지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칠선계곡의 등반로는 마천면 추성마을에서 시작하여 천왕봉까지 9.4㎞ 계곡 등반의 위험성 때문에 상당구간이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이는 등반로를 벗어나서 마음놓고 발길을 둘 곳이 없을 정도의 험난한 산세 때문이다. 추성을 출발하여 처음 만나게 되는 용소에서부터 주지터, 추성망바위,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 칠선폭포, 대륙폭포, 삼층폭포, 마폭포를 거쳐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선경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 백과)

 

 - 우리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던 식당 바로 앞 '칠선계곡 풍경'.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오는 이미지도 바로 '여기'였다.

 

 

 - 칠선계곡에서 두 번째로 맛보는 '흑염소 불고기'. 직접 먹어봐야 '별미'를 알 수 있다.

 

 

 - 반찬들이 하나같이 싱싱하고 맛이 진하다. '단풍깻잎' 한 접시만으로도 밥 한 공기는 먹을 수 있을 듯하다.

 

 

 - 지리산에서 나는 '석이버섯 요리'까지... 식당에서의 주문은 언제나 '결핍' 보다는 '과잉'으로 기울고 만다.

 

 

 - 아점을 먹고 나서 '실상사' 쪽으로 슬슬 이동하면서도 틈틈이 가을 풍경을 감상하느라 차를 세우기 일쑤였다.

 

 

 - 요즘엔 어딜 가나 '은행나무 천지'다. 지리산 자락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 그동안 '실상사'를 매번 지나쳐 다니다가 이번엔 '비'를 무릎쓰고 찾아봤다.

    천 년도 더 된 고찰이 그저 소박하고 단아하고 고즈녁하다.

 

 

 - 통일신라 시대인 828년(흥덕왕 3년)에 지어진 사찰이니 이 석탑이 여기서 지킨 세월이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 까마득한 그 옛날 석공들이 이 석등을 다듬느라 흘렸을 땀과 정성을 생각하니 조각마다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 '실상사 보광전'.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이지만 기둥으로 쓰인 나무들만은 아직도 꿋꿋하고 우람하다.

 

 

 - 주말인데도 비가 와서 그런지 찾는 발길이 드물고 그저 적적하기만 하다.

 

 

 - 여기는 뱀사골 초입이다. 바기 제법 내리는데도 붉게 물든 지리산의 자태를 다 숨기지는 못하는 듯하다. 내가 맨 처음 지리산을 오르겠다고 대학 친구들과 함께 찾아온 곳도 이곳 뱀사골이었다. 그 때가 1982년 여름이었으니 어느새 강산이 세 번쯤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흘렀구나 싶고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도 든다.

 

 

 - 뱀사골을 조금 더 오르다가 다시 차를 세웠다. 나 홀로 계곡까지 내려가서 '山水'를 한꺼번에 담아봤다.

 

 

 - 잘 익은 감들이 이제 막 껍질을 벗고 '곶감'이 되기 위해 길 옆 산장마다 주렁주렁 매달렸다.

 

 

 - 산이 깊을수록 나뭇가지에 달린 감들도 '까치밥'만 남기고 대충 수확을 마친 듯하다.

 

 

 - 뱀사골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에 잠시 주차하고 빼꼼히 들여다본 '지리산 풍경'이 가히 환상적이다.

    그동안 지리산을 여러 번 찾아 왔지만 이토록 놀랍고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

 

 

 - 이런 날씨도 마다하고 '능선'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더 멋진 풍경들을 감상하고 있을까.

 

 

 - 노고단 '성삼재 휴게소'엔 바람이 몹시 거세다. 잠시 주차했다가 세찬 바람 때문에 곧바로 다시 차에 올랐다.

 

 

 - 노고단 너머 첫 휴게소에서 구례 쪽으로 내려다본 지리산 운무.

 

 

 - 구례를 그냥 지나쳐 '순천만 갈대 습지'까지 힘겹게 찾아 오니 예상 밖으로 사람들이 엄청 많다.

 

 

 - 사진으로만 봐 왔던 순천만 습지가 생각보다 훨씬 광활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석양에 빛나는 환상적인 'S 라인'을 만나기엔 날씨가 너무 엉망이다. 그저 우산 쓴 사람들의 행렬만 보일 뿐이다.

 

 

 - 비가 많이 내려 볼 게 아무 것도 없지 싶은데도 사람들은 정말 생각보다 엄청 많았다.

    이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고 또 어디로 떠날 예정인지 그게 제일 궁금했다.

 

 

 - '갈대밭'은 누구에게나 꽤나 낭만적인가 보다. 깔깔거리며 마냥 신나 하는 나이 어린 처녀들도 참 많았다.

 

 

 - 시간이 여유롭다면 저 배도 한 번 타 봤으면 싶지만 우린 갈길이 바쁘다.

 

 

 - 순천까지 왔으니 벌교를 빠트릴 순 없다. 기어이 벌교까지 가서 '꼬막 정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서 '빗길'을 뚫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Tmap이 알려주는 딱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무려 400km였으니 딱 '천리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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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11-1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oren 님 덕분에 구경 한번 잘 했습니다.
단풍든 광한루, 운무낀 지리산, 비내리는 순천만 모두모두 너무 멋집니다.
단청이 되어있지않고 또 다듬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쓴 실상사 보광전은 참 단아하고 기품있어 보입니다.
지리산 산나물에 흑염소 불고기....침 넘어갑니다.^^

oren 2015-11-13 17:00   좋아요 0 | URL
`지리산 실상사`는 매번 지나치기만 했을 뿐 좀처럼 가 볼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 이번에 거길 둘러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답니다. 늦가을 지리산 풍경들은 미처 상상도 못할 만큼 너무 좋아서 다음에라도 꼭 다시 가보고 싶어지더군요. `흑염소 불고기` 잘하는 음식점은 이미 두 곳이나 알아뒀으니 `지리산 등반` 후에는 필수 코스로 들를지 모르겠다 싶어요.
 

 

우리는 남의 실수에 대해 얼마나 관대해야 좋을까. 남의 실수 때문에 내가 어떤 심적이거나 물질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거기에 대해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 일일까. 무릇 모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따른 대처는 '각자의 생각이나 판단'에 따라 너무나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을 듯하다. '남의 실수'에 대해 내가 마땅히 혹은 당연히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고려할 만한 요소'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만든다. 우선 당장 실수를 저지른 사람의 사정에 대해서도 따져볼 만한 요소가 어디 한둘이 아니다. 더군다나 어떤 한 사람의 실수에 따라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수십 명이나 수백 명 혹은 심지어 수억 명에 이를 수도 있으니 우리가 '실수'에 대해 어떤 성급한 일반론을 이야기하는 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실수'로 인해 아무도 예기치 못한 엄청난 파장을 낳을 때도 많은 듯하다. 각종 대형사고들이나 참사들도 따지고 보면 사소한 부주의나 실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근래에 온 국민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 물질적 고통을 주었던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등도 따지고 보면 '실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수로 인해 세계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힌 참사들 가운데 우리는 쉽게 체르노빌 원전 사고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같은 대참사에 대해 우리가 온전히 '당국자의 실수'에게만 전적인 책임을 묻긴 어렵지만 어쨌든 '실수'가 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쩌면 실수를 매일 매일 경험하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밥을 먹다가도, 물을 마시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우리는 그만 나도 모르게 깜빡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심지어 업무를 보거나 연애를 할 때도 실수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 찾아든다. 스포츠 경기만 보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실수'를 목도하는가. 어떤 경기에서든 실수는 통제하기 어려운 난제로 항상 등장한다. 축구든 야구든 골프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어떤 실수들은 정말로 치명적이어서 단 한 순간의 미세한 실수 하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시간 동안의 숱한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들 때도 많다.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의 경우는 어떤가. 사소한 실수 하나가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할 때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실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지어낸 가장 커다란 비극 가운데 하나인 《오이디푸스 왕》도 좋은 사례다. 그가 '운명의 삼거리'에서 조금만 더 이성을 차렸더라면 자신의 친부를 살해하는 일로부터 시작된 엄청난 비극의 연속은 더이상 없었을 것이다.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던 일에 대해 결국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 경우에는 그 댓가가 너무나 혹독하다는 측면에서라도 새삼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오이디푸스 

오오, 삼거리여, 그리고 후미진 골짜기여,
너희들은 내 손에서 내 자신의 피인 내 아버지의
피를 마셨으니, 아마 기억하고 있으리라.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그 뒤 또 이곳에 와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오오, 결혼이여, 결혼이여, 너는 나를 낳고는 다시
네 자식에게 자식들을 낳아줌으로써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 사이에, 그리고 신부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 근친상간의 혈연을 맺어주었으니,
이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난 가장 더러운 치욕이로다.

 - 《오이디푸스 왕》1398∼1408행

 

 

지난주 금요일 밤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피아니스트가 저질러서는 안 될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클래식 연주 역사상 유례가 드문 '대참사'로 불러도 좋을 만큼 대형 사고가 벌어졌다. 윤디 리가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다가 그만 악보를 까먹고 제멋대로 내달리다가 결국 오케스트라 연주마저 멈춰 세우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상에 이런 망측한 일도 내 눈앞에서 벌어질 수 있구나 싶었다. 음악 연주에서 연주가들이 악보와 다르게 혹은 엇박자로 연주하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미 '쇼팽 스페셜리스트'로서 명성이 확고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본인이 수도 없이 연주했을 바로 그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그것도 겨우 1악장 중간 부분에 이르러 오케스트라 연주와 완전히 빗나가면서 엉뚱한 악보 위를 내달린 끝에 협주 자체가 멈춰 버렸다면 이건 여간 심각한 실수가 아니다.

 

 

 

클래식 공연 도중에 벌어지는 이런 저런 실수들은 사례가 너무 많아서 새삼 나열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윤디 리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법한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뒤에 정작 그보다 더 볼썽사나운 실수들을 거기에 덧보탬으로써 기어코 희귀한 헤프닝을 대참사로 격상시키고 말았다. 우선 그 무엇보다도 명백한 자신의 실수를 괜스레 남의 탓으로 전가하려는 듯한 애매한 행동부터가 보기에 참 딱했다. 자신의 실수로 연주가 멈춰버린 순간 그는 돌연 왼손을 치켜올리며 오케스트라 지휘자한테 뭔가를 어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협연을 맡았던 시드니 심포니의 지휘자가 더욱 당황해 하던 모습까지 지켜봐야 하는 관객들은 황당한 처지에 더해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도 마저 목격해야 했던 셈이다.

 

1830년 가을 바르샤바의 한 연주장에서 고국 폴란드를 떠나는 청년 피아니스트 프레데릭 쇼팽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였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단조 op.11'은 서정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쇼팽의 대표적인 피아노 협주곡이다. 예민한 감성과 꿈으로 가득했던 쇼팽이 스무살에 작곡한 곡이었다. 그 유명한 연주곡 덕분에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게 바로 윤디 리였고, 그가 유명해진 무대가 바로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렸던 '쇼팽 피아노 콩쿠르'였다. 그는 5년 마다 열리는 바로 그 콩쿠르에서 불과 열여덟 살에 최연소로 우승을 차지한 인물이다. 그러니만큼 그동안 그가 보여줬던 놀라운 명연주들을 이번에 아주 생생한 감동으로 직접 느껴보고자 했던 관객들에게는 이번 연주 자체만으로도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는데 결국 그보다 더 꼴사나운 모습마저 기어코 보고 만 셈이 되었다.

 

 

 

최근에 한국인 피아니스트 조성진 군이 바로 그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바로 거기서 윤디 리는 최연소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었다. 2000년에 열린 쇼팽 콩쿠르에서 불과 18세의 나이로 우승했던 그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어느덧 거장 피아니스트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런 '위치'와 '예우'가 이번 연주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향한 이해하기 힘든 제스쳐를 낳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나만의 억측일까.

 

어쨌든 피아노 협주곡 연주가 끝나고 짧게 주어진 인터미션 시간엔 온통 '윤디리의 공연 실수'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채워지면서 바쁘게 지나갔다. 엉망진창이 된 윤디의 연주는 인터미션이 끝난 뒤 말끔히 치워진 피아노와 함께 과거 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2부에 연주된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은 지휘자의 경쾌한 몸놀림과 함께 아주 매끄럽게 이어졌고 멋진 휘날레는 관객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마저 안겨주었다. 윤디 리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그렇게 잠시나마 묻혀지는 듯했다.

 

그런데, 연주가 모두 끝난 뒤에 예정되어 있었던 '윤디리 팬 사인회'가 갑자기 취소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렇게 연주를 망치고 나서 어느 연주자가  '팬 사인회'에 당당히 얼굴을 디밀 수 있을까. 그런데 아마도 이 즈음부터 관객들이 슬슬 '본전 생각'에 화가 조금씩 치밀어 오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이미 연주회 이전부터 윤디 리의 음반을 구입했던 사람들이나 아주 멀리서 불원천리하고 이 연주회를 보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 또한 만만치 않은 티켓 가격을 지불한 터라  '윤디 리의 실수' 때문에 빚어진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기분이 영 말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런 '형편없는 엉터리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관객들은 끝까지 '뜨거운 박수'로 윤디 리와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아낌없이 격려하지 않았던가.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윤디 리는 연주가 끝난 뒤 마지 못해 겨우 두 번 더 얼굴을 내밀고 난 뒤에 서둘러 '앵콜 연주'도 없이 연주장을 떠나고 말았으니 많은 관객들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고 하더라도 누가 뭐라 나무랄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기막힌 반전'은 연주가 끝나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엉뚱한 데서 일어났다. 관객들이 초겨울 같은 쌀쌀한 날씨 탓에 총총 걸음으로 귀가를 서두르는 동안 정작 '실수'를 저지른 당사자는 다른 일로 바빴던 모양이다. 이미 윤디 리의 '서울 공연 대참사'가 슬슬 빠른 속도로 인터넷을 통해 장안의 화제로 이어질 바로 그 무렵, 윤디 리는 정말 뜬금없이 다음과 같은 놀라운 모습으로 바로 그 인터넷 공간에 놀라운 코멘트를 불쑥 남겼던 것이다.

 

 

 

마침 다음날이 '할로윈 데이'였던 모양이다. 그날 밤 공연으로 너무나 놀라고 실망했던 '한국 관객'들은 도무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넘어 분노를 표시한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미 윤디 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결코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오명을 '예술의 전당'에 뚜렷이 새긴 터였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해도 이건 너무 아니다 싶다. 그가 저지른 '실수'는 관대하게 인정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가 그 이후에 자신의 실수에 대처하는 모습들은 실망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윤디 리의 열렬한 팬들 가운데에는 이번 '서울 공연 참사' 때문에 벌써부터 '윤디 리 연주 음반'까지 불태우겠다는 결연한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마저 생겨나는 모양이다. 나는 어디 변변한 CDP조차 없으니 불태울 만한 CD는 더더구나 장만해 놓을 턱이 없어 그런 고민까지 할 필요조차 없다지만 윤디 리를 향한 수많은 팬들의 뜨거운 애정이 실망을 넘어 분노로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일 정도로 이번 사고의 여파가 커지는 듯하다. 

 

(내가 클래식 감상을 위해 장만해 놓은 건 고작 쓸 만한 'PC용 스피커'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동안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구던 '윤디 리 서울 공연 참사' 소식도 결국 조용히 가라앉을 게 틀림없다. 뒤늦은 건지 빠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서야 다행스런 소식도 들린다. 윤디 리가 '서울 공연에서의 실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표명했다는 소식이다. 공연에 실망한 관객들이 '환불 소동'까지 빚은 데 적잖이 놀랐음에 틀림없고, 본인으로서도 그냥 뭉개고 넘어가기는 힘들다고 판단했음에 틀림없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실수냐 아니냐에 대한 판단을 포함해서 그 실수를 둘러싼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는 좀 어렵다. 그런데 '실수'가 벌이지고 나면 정작 중요해지는 지점은 '누가 어떤 실수를 했느냐'에서 실수한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로 금세 옮겨가는 듯하다. 이미 수많은 사례들이 그걸 충분히 증명했다고 본다.

 

실수와 신뢰

펩시사의 회장인 크레이그 웨더는 "사람들은 실수를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그들의 신뢰를 망가뜨린다면 그들로부터 신뢰를 다시 얻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뢰를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여겨야 하는 이유다."라고 말한 바 있다. 노르만 슈바르츠코프 장군은 이에 대해 더욱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지휘란 전략과 신뢰를 견고하게 혼합시켜 놓은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전략을 포기하라."

 - 『위대한 기업의 조건』 中에서

 

윤디 리는 이미 15년 전에 '쇼팽 콩쿠르'를 통해서 전세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번엔 '상상하기 힘든 실수'를 통해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부디 이번 실수를 교훈 삼아 미래엔 더 많은 사람들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놀라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된 것도 어찌보면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든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에 빛나는 조성진 군 덕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비록 조성진 군은 아직 한참 어리지만 왠지 윤디 리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지는 않을 듯하다. 지금보다 더더욱 훌륭한 연주로 우리를 지금보다 훨씬 더 놀라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쇼팽 콩쿠르 우승자 두 사람 때문에 실망도 크고 기대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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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04 0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건도 극적이고 서술도 극적이고 해서 한달음에 읽었네요.
그런 기막힌 일이 있었군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저 또한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고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두렵군요.
독자들한테 던지는 ‘메시지’가 가슴 깊이 파고듭니다.

oren 2015-11-04 10:28   좋아요 0 | URL
제 예상보다는 훨씬 더 빨리 사과 표명이 이뤄진 듯해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요.
그래도 이번 일은 윤디 리에게는 씻기 어려운 깊은 내상으로 남을 게 분명하다 싶어요.
아직도 인터넷에는 그의 `실수보다 더 나쁜 대처방식`에 대한 다양한 글들이 계속 올라오네요.
`천재 피아니스트 윤디 리, 그대는 아직 멀었다` 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102_0010388584&cID=10701&pID=10700

살리미 2015-11-04 0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 공연을 실제로 보셨군요. 정말 대참사입니다. 뒤늦게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다행이지만요. 중요한건 어떤 실수를 했냐보다는 실수에 대처하는 자세라는 점 깊이 공감합니다.

oren 2015-11-04 10:30   좋아요 0 | URL
대가들은 자신의 실수를 멋지게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었죠. 그것도 방금 엄청난 실수가 벌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말이지요.. `곧바로 사과하고 다시 반전을 이뤄내는 능력`도 정말 중요하다 싶어요...

[그장소] 2015-11-04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세술이란 것은 다 없애야 할지도 몰라요.
진짜 감동을 위해..왔는데..격이 떨어지더라도..
(자신을 낮춤이 왜 격이떨어짐인지..모르지만)
그 늘...그렇듯 알량한 처세술..갖은 계산들..이
진심을 말아 먹어요.

oren 2015-11-04 10:42   좋아요 1 | URL
윤디 리와 조성진 둘 모두 `쇼팽 콩쿠르 우승`을 차지할 때 연주했던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최근에만 열 번 이상은 들어본 듯한데, 정작 가장 기대가 컸던 윤디 리 서울 공연에서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느낄 줄은 차마 몰랐어요. 윤디의 연주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처지는 바람에 나중에는 무슨 `학예 발표회`에 끌려나온 학생의 연주를 듣는 것 마냥 몹시도 지루하고 맥이 빠지고 말았어요... 그래놓고도 윤디 리는 청중들에게 아무런 사과 제스쳐 하나 남기지 못하고 그 연주장을 빠져나가기 급급했던 듯해요. 그래놓고 다시금 sns를 통해 `자신의 놀라운 모습`을 기어코 만천하에 거리낌없이 다 드러냈으니...ㅠㅠ

[그장소] 2015-11-04 12:21   좋아요 1 | URL
음..자신을 쇼팽으로 착각하는가...흠..
그 엉킨 연주시간동안 ㅡ대체 그의 머릿 속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손가락...이제 더는 싫어...이 압박감..따위 ㅡ 조성진 ㅡ눌러 주겠어.하는 ..뭔가 달라야 하는
기대부응심리에 스스로 튕겨 나간 건가? 그러곤 이미 망가진거...하고..막..나가버린..걸 회사차원에서 수습...그런걸까요ㅡ?!
 
2012년 10월, 가을산행에서 만난 풍경
2013년 10월, 가을 산행에서 만난 풍경

 

청춘이 정열을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고, 노년이 쾌락을 찾는 일은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불타는 정열을 조심성으로 은폐했다. 이제 늙어서는 음산한 심정을 방종으로 풀어 준다. 그 때문에 플라톤의 법칙은 편력을 더 유익하고 교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40이나 50세 전에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바로 이 규칙의 제2항으로 60세가 넘어서는 편력을 금지하는 데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이에 길을 떠나다가는 그 먼 길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아니오?"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여행을 완수하려고 떠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움직이는 것이 기분 좋은 동안은 움직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바람을 쏘이기 위해서 나는 바람을 쐰다. 이득이나 토끼를 보고 달려가는 자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 * *

 

가을은 정말 좋은 계절이다. 예전엔 가을이 오는 게 참 싫었다. 나는 여름이 단연 제일 좋았다. 원래부터 더위도 별로 타지 않는다. 여름은 낮이 길어서 좋고, 시원한 강물과 바닷물에 온 몸을 풍덩 내던질 수 있어서 좋고, 싱그러운 신록과 쏟아지는 비와 한여름의 뭉게구름과 저녁놀이 특히 아름다워서 좋다. 매미소리, 풀벌레소리, 싱그러운 풀내음도 다 좋다. 가을은 곧 그런 여름이 끝장난 뒤에 찾아오기 마련이어서 싫었다. 한때는 가을이 너무나도 싫을 때도 있었다. 낙엽이 수북히 깔리고 눈 앞에서 잎이 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외로움을 느낄 때도 많았다. 가을에 듣는 음악들은 가슴을 후벼 파는 듯이 아플 때도 많았다. 얼마나 많은 슬픈 노래들이 가을을 뒤흔드는지는 하루 종일 라디오를 켜 놓으면 금세 느낄 수 있다. 어떨 땐 그런 아릿한 아픔조차도 그립고 땡길 때조차 있지만 그건 정말 잠시나마 그럴 뿐이다. 가을은 어쨌든 내겐 오랫동안 '슬픈 계절'이었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가을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가을이 예전보다 훨씬 더 밝아지고 풍요로워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분명 '가을 여행' 덕분이라 믿는다. 가을엔 편지도 써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야유회도 가야 하고, 체육대회나 동창회에도 가봐야 한다. 참 할 일이 너무 많은 때가 가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빼놓기 어려운 건 아무래도 가을 산행이다. 단풍이 곱게 물들 무렵 파란 쪽빛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산길을 오르는 기쁨은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 또 한 해가 이렇게 저무는 구나 싶은 얄팍한 생각도 떨치기 어렵지만 그래도 용케 복잡한 도심과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삼을 시간을 올해도 또다시 찾았구나 싶은 안도감부터 불쑥 찾아든다. 옛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자연과 멀리 벗어나 복잡하고 찌들고 고달픈 삶을 스스로 자초하고 사는 셈인가 싶은 생각이 그제서야 문득 드는 것이다. 올핸 울릉도로 떠나볼 계획이었는데 기어코 하루 전날에 '높은 파고 때문에 운행 취소'라는 문자를 받고야 말았다. 그래도 가을 산행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달려간 곳이 삼척 앞바다였고, 검봉산 자연휴양림에 빈 방이 있었고, 검봉산(686m)에 올랐고, 이튿날은 통고산 자연휴양림에 남아 있는 빈 방을 예약했고, 울진 망양 앞바다와 불영사 등지를 오랜만에 다시 둘러보게 되었다. 끼니마다 풍성한 먹거리를 찾아 헤매는 재미도 쏠쏠하고 좋았다. 어느새 가을이 많이 깊었다.

 

 

 - 새벽부터 서두른 덕분에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도 점심때가 덜 되어 삼척 앞바다에 도착했다

(Shooting Date/Time 2015-10-25 오전 10:48:17)

 

 

 - (일행 중에 어느 누가) 10년쯤 전에 무지 맛있게 먹었다는 '물회집'을 간신히 찾아냈다.

    어제 오늘은 파도가 높아 '해삼물회'는 먹을 수 없단다.

 

 

 

 - 그냥 '물회'도 참 맛있었다. 오전 11시 남짓인데도 외진 곳에 자리잡은 식당엔 손님이 제법 많았다.

(Shooting Date/Time 2015-10-25 오전 11:05:44)

 

 

 - 물회에 밥을 꾹꾹 말아 소주까지 곁들인 점심을 먹은 뒤에 막걸리 두 병을 챙겨서 검봉산 산행에 나섰다.

 

 

 

 - 단풍이 듬성 듬성 보여서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운치있는 산이다.

 

 

 

 - 능선에 올라서니 파란 하늘과 바다가 맞닿았다. 날씨 참 좋다.

 

 

 - 오른편에 보이는 능선 끝이 정상인가 보다.

 

 

 - 왕복 4시간 코스여서 부담이 없다. 산 속엔 우리 일행 뿐이다.

    고사목이 서로 외로웠는지 짝지어 서 있다. 물론 살아서도 오랜 시간을 햇살과 바람과 눈비와 함께 했겠지 싶다.

 

 

 - 인간들이 억지로 심어놓은 억새가 아니라 자연스레 자라난 억새라 더욱 반갑다.

 

 

 - 사방을 둘러봐도 아득한 능선들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하늘거리는 억새는 몹시도 평화로워 보인다.

 

 

 - 가을은 이렇게 시나브로 깊어만 가고 있다.

 

 

 - 이 고사목은 죽은지 얼마나 됐을까,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여기서 버티고 서 있을까. 아직은 몹시 늠름하다.

 

 

 - 고사목이 한두 그루가 아니다. 억새는 아주 전망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 산행으로 땀을 빼고 나서 찾은 곳은 가까운 '임원항' 회센터. 멍게가 정말 싱싱하다.

 

 

 - '문어'를 꼭 먹어야겠다는 소수의견이 있어 결국 이 녀석도 상에 올랐다. 많이 잡히지 않아 조금 비싼 편이었다.

 

 

 - 4.5kg에 달하는 큼지막한 자연산 광어까지 두 접시를 곁들이니 상이 몹시도 푸짐하다. 6인분에 총 22만원.

 

 

 - '검봉산 자연휴양림' 숙소는 시설이 참 좋았다. 널찍한 공간(방 1, 거실 1, 다락방 1)에 방값은 7만원 남짓.

 

 

 - 이튿날 아침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으로 가는 길에 울진 시내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평일 오전이라 한산하기만 하다.

(Shooting Date/Time 2015-10-26 오후 12:14:59)

 

 

 -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등장하는 바로 그 '망양정'이다. 정자에서 바라다보는 풍광이 몹시 아름답다.

 

 

 - 십 년 전쯤에 이곳에 첨 왔을 땐 '망양정' 주변이 온통 흙으로 된 마당이었었다.

   주위가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고즈녁한 느낌이 좋았는데, 최근에 개발하고 난 뒤 조금 휑한 느낌도 든다.

 

 

 - 망양 앞바다. 백사장이 길어 여름엔 이곳 해수욕장에도 제법 많은 인파들이 몰리지만 지금은 인적이 드물다.

 

 

 - 파도를 보니 '울릉도행 카페리호'가 왜 운항을 취소했는지 알 만했다.

 

 

 - 바닷가에서 해물칼국수, 해물파전, 동동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에 '불영사'를 찾아 나섰다.

 

 

 - 불영계곡이 몹시 깊어서 그런지 '불영사 가는 길'에 마주친 단풍잎들도 희미하게 스며든 볕에 옅게 물든 듯하다.

 

 

 - 고즈녁하기만 한 산사에 스님 한 분이 채전을 돌보는 손길이 분주하다.

 

 

 - 비구니 사찰이어서 그런지 절이 참 아늑하고 소담스런 느낌이다.

 

 

 - 처마끝에 주렁주렁 달린 곶감이 늦은 오후의 가을햇살에도 눈부시게 빛난다.

 

 

 - 여느 사찰의 대웅전보다는 한결 아담하고 토대가 그다지 높지 않아 친근하게 느껴진다.

 

 

 - 산사를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 저 멀리 꼬맹이 두 녀석이 개구진 걸음으로 사찰을 둘러본다.

 

 

 - 채전 옆에 딸린 고구마밭에선 수녀님 일행이 캐고 남은 고구마 이삭을 줍는 듯하다.

 

 

 - 아직은 따스하기만 한 이곳에도 금세 눈이 수북히 쌓이는 한겨울이 찾아오겠지 싶다.

 

 

 - 오늘 오후 일정은 '불영사 오가는 일'이 전부다.

 

 

 - 여기 쭈욱 머물면서 곶감도 좀 빼먹고 장독대에서 잘 익은 고추장과 된장을 곁들인 절밥도 얻어먹고 싶지만...

 

 

 - 날이 저물수록 인적이 점점 자취를 감춘다.

(Shooting Date/Time 2015-10-26 오후 4:26:03)

 

 

 - 불영사에서 나오는 길에 살펴 보니 우뚝 솟은 바위산 꼭대기에도 소나무들이 꿋꿋하게 자라나고 있다.

 

 

 - 불영계곡 꼭대기쯤에 자리잡은 '통고산 자연휴양림'. 단풍도 그득하고 숙박비도 저렴하다.

 

 

 - 오늘밤은 여기서~

 

 

 - 밤부터 내린 비 때문에 '영주 부석사 관람'은 취소하고 곧바로 '풍기 온천'으로 직행하기로 했다.

    불영계곡을 넘으니 산자락에 걸친 비구름이 단풍과 어울려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Shooting Date/Time 2015-10-27 오전 11:01:04)

 

 

 - 깊은 산자락에 위치한 간이역 '분천역'.

    한동안 언론에 너무 노출되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낭만적인' 풍경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

 

 

 - 온천욕으로 땀을 한껏 뺀 뒤에 찾은 곳은 '소백산 한우 맛'이 일품인 '영주축협 한우 프라자'

 

 

 - 고기를 굽기도 전에 '카스처럼'을 만들고 있는 일행들.

 

 

 - 숯불에 구워먹는 한우는 역시 생갈비살이 최고~

 

 

 - 두어 번 와 봤지만 그때마다 '기대한 그대로'였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글쎄, 좀 보라

글쎄, 좀 보라. 자기 머릿속에 처넣은 사상 때문에 맛있는 식사도 돌아다 볼 생각을 않으며, 이런 먹는 일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서야 되느냐고 불평하는 자의 잡념과 허상을 마음놓고 그대에게 말하도록 해 보라. 그대는 식탁의 모든 반찬들 중에 그의 영혼이 말하는 그 훌륭한 이야기보다 더 멋쩍은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의향은 그대의 스튜 요리만한 가치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르키메데스의 황홀경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 몽테뉴,『몽테뉴 수상록』 中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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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0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아~! 정말 굉장히 좋으네요.
oren 님 덕분에 가을 느낌 만끽하네요.
사진 속 풍경들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 가운데 “꼬맹이 두 녀석이 개구진 걸음으로 사찰을 둘러보는” 사진하고요,
“고구마밭에서 수녀님 일행이 캐고 남은 고구마 이삭을 줍는” 사진이
정말 맘에 드네요.
oren 님 심성이랄까 철학이랄까
이런 게 드러난 것 같기도 하고요~ ㅋ
앞으로도 멋진 사진 더 많이 부탁드려요.
정말 혼자 보기 아까워요.

oren 2015-11-03 16:20   좋아요 0 | URL
qualia 님 반갑습니다.
제 사진들 덕분에 가을 느낌을 만끽하셨다니 저도 사진을 올린 보람을 느낍니다. ㅎㅎ

불영사는 1994년에 제 아내랑 함께 가 본 뒤로 무려 21년 만에 다시 가 봤답니다. 그땐 아내랑 손을 맞잡고 징검다리를 밟으며 개울을 건넜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 가 보니 엄청나게 큰 다리가 놓여 있더라구요. 어느새 강산이 두 번 바뀔 정도의 세월이 흘렀더군요.(2003년엔 초등학교 다니던 두 아이들을 데리고 불영계곡으로 여름 휴가를 갔었는데, 그 때 생각도 많이 나더군요.)

불영사에서 마주친 인상들 가운데 오래도록 남는 게 있다면 아마도 곶감, 꼬맹이 두 녀석, 채소밭과 여스님과 수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변변찮은 사진을 좋게 봐주시고 긴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어느덧 이번 가을이 그리 길게 남진 않았지만 남은 가을 만끽하시길 바랄께요~

yamoo 2015-11-03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적인 사진들 정말 잘 봤습니다!
저는 겨울을 좋아해서 가을무렵 쯤 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무력해지곤 하지요.ㅎ
여름은 여름 나름의 매력이 있으니까요..

오랜님 덕에 여행 잘한 느낌입니다~^^
좋은 사진 감사히 잘봤습니다!

oren 2015-11-04 00:19   좋아요 0 | URL
오호... yamoo 님은 겨울을 좋아하시는군요. 정말 낭만적인걸요..
겨울에 무척이나 따뜻해 보이는 긴 코트와 목도리와 모자와 구두까지 멋지게 차려 입고, 하늘엔 눈발이 가득 휘날리고 거리엔 나뭇잎이 뒹구는 그런 거리를 저만치 앞서 가는 yamoo 님의 뒤를 살금살금 뒤따라 밟아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드는군요.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울도 그리 멀지 않았군요.
 

 

제주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땅이지만 여느 지방과는 풍물과 풍습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이번에 다시금 느꼈다. 말은 특히 더하다. 제주도 토박이 아줌마들끼리 나누는 대화는 웬만큼은 커녕 거의 알아듣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모처럼 직원들끼리 2박3일로 여기저기 쏘다니며 보고 온 풍경들을 정리해 본다.

 

 

 - 금요일 저녁 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한 첫날 저녁 메뉴는 '제주 흑돼지'

 

 

 - 이튿날 오전 첫 관광지는 '쇠소깍'

 

 

 - 계곡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인데 물빛이 예사롭지 않다.

 

 

 - '쇠소깍'은 사전 예약이 안 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전에 카누를 즐기려면 새벽에 와서 줄을 서야 한다.

 

 

 - 햇살이 눈부신 이른 아침에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새벽'을 아낌없이 투자한 사람들이다.

 

 

 - 다음 코스는 '정방폭포'

 

 

 - 오랜만에 다시 와 보니 폭포로 가는 길을 아주 잘 정비해 놓았다.

 

 

 - 토요일 오전인데도 인파들이 넘쳐난다

 

 

 - 폭포에서 멀치감치 떨어진 곳에선 멍게, 해삼, 문어 등등을 팔고 있다.

   '한라산 소주'에 곁들인 멍게 맛이 정말 그만이었다.

 

 

 - 천 년 가까이 된 비자나무 수천 그루가 군락을 이룬 '비자림'

 

 

 - 비자림에서 가까운 바닷가인 '월정리 앞바다'

 

 

 - 월정리 앞바다는 '카페촌'으로도 유명하다고. 커피 한 잔 마시며 바닷가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 제주도는 어딜 가나 커플들로 넘쳐나지만 이곳 월정리 앞바다를 찾은 커플들은 좀 요란(?)하다.

 

 

 

 - '썩어도 준치'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저렇게 죽 매달아 놓고 말리는 생선이 '준치'는 '물론' 아니다.

 

 

 - '김녕 해안도로'를 달리며 내다본 바닷가 풍경. 홀로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저 여행객은 어디서 왔을까.

 

 

 - 해가 저물도록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끝에 당도한 바닷가 횟집.

 

 

 - 은갈치, 줄돔, 고등어, 산오징어, 간장게장, 소라... 하나같이 싱싱하고 맛있다. 한마디로 '물'이 다르다.

 

 

 - 제주도 바닷가에서 건져 올린 해산물들은 무엇이든 특별한 맛이 나는 듯하다

 

 

 - 회는 일부러 '광어 빼고' 주문했다고. 감성돔, 딱 제철인 방어, 구문쟁이('다금바리 4촌'으로 더 유명한 생선)

 

 

 - 사흘째, 이른 오후 비행기편 때문에 무리한 일정은 피하고 여유롭게 '억새' 구경을 나섰다.

 

 

 - 제주도에서도 '억새'로 유명한 '새별오름'에 올랐다. 제주도엔 크고 작은 '오름'이 무려 360여 곳이나 있다고 한다.

 

 

 - 억새가 딱 보기 좋게 피었다.

 

 

 - 바람 많은 제주도라 그럴까. 억새가 유난히 풍성하고 부드럽게 피었다.

 

 

 - 억새를 즐기러 나선 사람들이 줄지어 오름을 오르고 있다.

 

 

 - 참 보기 좋은 풍경이다. 나 또한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첫아이를 안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땐 늦가을이었다. 그때 아이를 안고 억새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을 볼 때면 언제나 흐뭇한 미소부터 떠오른다.

 

 

 - '새별 오름'은 멀리서 보기엔 완만한 듯해도 실제로 올라가 보면 숨이 벅찰 정도로 가파르다.

    모쪼록 더없이 좋은 시간이니 만큼 느릿느릿 쉬엄쉬엄 걷는 게 여러모로 좋은 듯...

 

 

 - 오름을 거의 다 내려올 쯤 능선을 바라보니 가히 환상적이다. 이렇게 풍성하고 아름다운 억새는 본 적이 없는 듯.

 

 

 - 하늘은 푸르고~ 억새는 바람에 춤추고~

 

 

 - 짧은 일정임에도 몹시 알차게 보낸 시간들이 어느새 저편으로 아스라히 묻혀 간다..

   억새가 억수로 만발하는 따사로운 가을날은 틀림없이 다시 찾아 오리니...

   그때 또다시 제주로...... 훌쩍 떠날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 왕방강 잘고라줍서 : '와서 보고 가서 잘 이야기 해달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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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10-2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 다녀온 지 한 십년도 넘은 듯 합니다.^^
풍경도 너무 멋지고, 회도 그림만 봐도 입에 착 감기고...
역시 회에는 찬소주 일잔 캬~~~

oren 2015-10-23 13:41   좋아요 0 | URL
제주도에서 멋보는 회는 언제나 남달랐던 듯해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몰라요. ㅎㅎ
한라산 소주도 21도 짜리는 어느새 독하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만큼 순한 소주에 어느새 많이 길들여 졌다는 증거겠지요. 붉은돼지 님은 회뿐만 아니라 흑돼지도 좋아하실 듯싶어요. 붉은 색이 도는 흑돼지 생갈비살은 정말 맛이 끝내주더군요. ㅎㅎ

살리미 2015-10-22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내고향 제주도^^ 저 바닷가에서 해물안주에 마시는 한라산 소주가 그립네요^^ 존디 댕겨 온 말 잘 들엉 감수다^^

oren 2015-10-23 13:44   좋아요 0 | URL
오로라^^ 님은 제주도에서 태어나셨군요. 정말 부럽습니다. 남들은 일부러 제주도를 찾아가느라 기를 쓰는데 오로라^^ 님은 그 좋은 곳을 걸핏하면 오가실 테니 너무 부럽네요. 댓글로 달아주신 구수한 제주도 방언을 다시 만나니 더욱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