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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평점 :
어린 시절 내게 어른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그 나이가 되면, 대학에만 가면 모든 게 내 뜻대로 풀릴 거라 생각했다. 다섯 살 차이가 나는 큰언니가 그랬다. 내게는 당당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스물은 아주 큰 산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의 나이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고 늙음이라는 단어는 나와 아주 먼 곳에 있다고 느꼈다. 알다시피 우리는 금세 그 나이를 지나고 가까운 곳에 도달한다. 그리고 체감한다. 인생이 아주 길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수시로 우리를 파도처럼 덮친다는 걸 말이다. 조카에게는 대학 입시가 첫 파도였을 것이다. 울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에게 물었다. 조카의 말을 들어주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인생은 아주 길어.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기억해. 그 말은 종종 나에게 화살처럼 돌아온다.
인생이라는 여행은 때로 지루하고 재미없다. 그늘막 하나 없이 뜨거운 길을 걸어야 하고 쓰고 있는 우산마저 빼앗는 비바람과 싸워야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주변을 둘러본다. 자신의 좁은 우산 속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만 가면 괜찮다고 힘을 내자고 손을 내미는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소심하면서도 긍정적이고 유쾌한 유머를 가진 남자 ‘레스’의 여행기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참 괜찮은 삶을 살았구나 생각했다. 사실, 그가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한 건 연인의 결혼 소식 때문이었다. 마흔아홉 레스의 동성 연인 프레디는 다른 남자를 선택했다. 9년을 살았는데 결혼은 딴 남자랑 한다니. 그리고 잔인하게 결혼식에 초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쿨한 척을 해도 그곳에 갈 수 없다. 레스는 참석할 수 있는 모든 해외 일정을 체크하고 여행을 떠난다.
우리의 주인공 레스는 작가로 강의와 강연을 하고 수상식에도 참여하고 원고를 써야 한다. 엉망으로 흘러가는 소설도 정리를 해야 한다. 뉴욕을 시작으로 멕시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모로코, 인도,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면 된다. 그 일정을 끝내고 돌아오면 괜찮아질 거라 여겼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나 역시 그러기를 바랐다. 여행을 끝낸 레스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여행은 레스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일정은 조금씩 틈을 보였고 말이 통하지 않는 가이드, 발을 다치고 발목이 부러져 수술을 하고 가방은 사라졌고 레스가 좋아하는 정장도 엉망이 된다. 거기다 더울 레스를 슬프게 만드는 건 여행지에서는 어김없이 연인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미리 알려둘 게 있다. 레스에게는 프레디 말고도 과거의 애인이 있다. 그러니까 레스가 청년이었을 때 만난 사람 로버트 말이다. 유명한 시인으로 로버트는 여전히 레스에게 좋은 친구고 정신적인 지주다. 지금은 일흔다섯의 노인으로 병원에 있다. 문학계에서 그들의 관계는 잘 알려졌고 현재 레스의 상태도 그렇다. 프레디가 다른 남자랑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레스의 정신없는 여행에 동행하는 일은 조금은 우울하고 걱정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레스의 여행이 더 길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프레디 따위 잊어버리고 여행지에서 만난 멋진 연인과 사랑에 빠지고 완벽하게 소설도 끝내기를 응원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오랜 친구처럼 어울리는 레스의 사교성에 감탄한다. 레스의 슬픔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다 점차 레스의 감정에 동화된다. 나도 곧 그와 같은 나이가 될 것이고, 그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니까. 쉰 살의 생일을 맞이하고 로버트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 일은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일상이라는 걸 알기에.
“빌어먹을 인생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는 거야. 쉰 살은 아무것도 아니야. 난 쉰 살 때를 돌아보면, 씨말 월 그렇게 걱정했던 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 지금의 날 봐. 나는 저승에 있어 가서 즐겨.” (297쪽)
젊은 애인에게 쉰이라는 자신의 나이는 너무 늙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랑에 주저하는 레스에게 로버트가 하는 말은 정말 감동적이고 훌륭하다. 아니, 내게 필요한 말이다. 입시에 실패했다고 속상해하던 조카에게 괜찮다고, 인생은 길다고 말했던 나에게 지금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 내가 앞으로 속할 수 있는 삶은 젊음이 아닌 늙음의 세상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그곳은 인생이라는 여행 중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또 읽는다. 인생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만들고 그로 인해 특별해진다. 그리하여 남은 삶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중요한 건 그들이 삶의 모든 것을 겪고도, 굴욕과 실망과 상심과 놓쳐버린 기회, 형편없는 아빠와 형편없는 직업과 형편없는 마약, 인생의 모든 여행과 실수와 실족을 겪고도 살아남아 쉰 살이 되었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215쪽)
레스는 자신의 여행을 오래도록 회자할 것이다. 남은 여행에 동행할 든든한 연인과 함께 말이다. 그가 누구든 상관없다.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유쾌한 연애소설로 분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좀 부족하다.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만난 든든한 이정표라고 말하고 싶다. 힘든 여정에 화나고 지칠 때마다 파란색 정장에 흰색 셔츠를 입은 레스를 떠올린다면 절로 미소가 번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