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와 19세기 소설을 읽으면서 자란 사람은 누구나 ‘전지적‘이라고 불리는 시점이 편안하기 그지없어요. 저는 이 방식을 ‘작가‘ 시점이라고 부르는데요, ‘전지적‘이라는 용어는 작가가 모든 것을 안다는 생각을 반영하다보니, 마치 그게 나쁜 것처럼 비판적으로 쓰일 때가 많아서예요. 하지만 작가는결국 이 모든 인물을 만든 저자이고, 창조자죠. 사실 솔직하게 파고든다면 모든 인물이 곧 작가예요. 그러니 작가는 모든인물의 생각을 알아 마땅하죠. 작가가 독자에게 인물들의 생각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왜일까요? 이건 생각해볼 만한질문이에요. 많은 경우 이유는 그저 작가가 아는 내용을 독자에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서스펜스를 자아내기 위해서일 뿐이에요. 뭐, 그것도 정당한 이유긴 하죠. 이건 예술이니까요. 하지만 지금 전 사람들이 선택의 폭에 대해 생각하게 하려는 거예요. 쓰이지 않는 아름다운 선택지가 정말 많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1인칭시점과 제한적 3인칭시점은 제일 쉬운 시점이고, 그만큼 제일 흥미롭지 않은 선택이에요. - P38

한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옮겨갈 때 그런 일이 일어나죠. 톨스토이와 울프는 황홀하게 해내지만, 어색하게 하거나 스스로도 모르는 채 할 수도있어요.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알고 쓰느냐예요. 시점을 바꾸려면 강렬한 의식과어느 정도의 연습 및 이동 기술이 필요해요. 성공적으로 시점을 이동하면 쌍안경으로 보는 효과, 아니면 그보다 더 여러 개의 눈으로 보는 효과가 생기죠. 어떤 사건에 대해 한 가지 관점을 보여주는 대신, 영화 <라쇼몬>처럼 여러 관점을 제공하는 거예요. 그것도 <라쇼몬>처럼, 이야기 자체를 여러 번반복하지는 않으면서요. 작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할수 있고, 복수의 관점은 지금 일어나는 일을 더 어리둥절하게만들거나 더 명료하게 만들죠. 작가가 둘 중 어느 쪽을 원하느냐에 따라서요. 저는 그런 이동을 허용하기 때문에 작가 시점이 모든 시점 중에서 가장 유연하고, 가장 유용하다고 생각해요. 가장 자유롭고요. - P40

이야기는 곧 갈등이라고 가르치고, 언제나 "네 이야기에서 갈등은 어디 있지?" 묻는 것, 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있다는 뜻이에요. 이야기는 갈등을 다룬다고, 플롯은 갈등에바탕을 둬야만 한다고 말하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심각하게제한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인 선언이기도 하죠. 삶은 갈등이고, 그러니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건갈등뿐이라고 말이에요. 이건 그냥, 사실이 아니에요. 삶을전투로 보는 건 시야가 좁은 사회진화론의 관점인 데다, 굉장히 남성적인 시각이기도 해요. 물론 갈등은 삶의 일부죠. 소설을 쓸 때 갈등을 끌어내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단지 갈등이 이야기의 유일한 생명줄은 아니라는 거예요. 이야기는 다른 많은 것을 다루니까요. - P41

전 무엇을 위한 ‘싸움‘, 무엇에 맞서는 ‘전쟁‘ 같은 표현을 피하려고 노력해요. 모든 것을 갈등 및 당면한 폭력의 해결책같은 용어에 밀어 넣는 데 반대해요. 전 노자가 갈등에 관해하는 말을 기억하려고 해요. 노자는 분쟁을 원래 있어야 할곳인 전장에만 제한해요. 모든 인간 행동을 갈등으로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드넓고 풍성한 인간의 경험을 빼먹는 짓이에요. - P42

전 그저 문학에서 제일 오래된 형태가 환상성을 갖고 있었다고 짚었을 뿐이에요. 문학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오디세이‘
처럼 신화화된 영웅담에서 시작하죠. 장르소설이 문학이 아니라고 여기던 시절은 이제 과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제 경우는 장르소설도 『분노의 포도』와 다를 바 없는 문학이라는 주장을 하도 오래 했더니,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가 어렵네요.
물론 대부분의 장르소설은 『분노의 포도』만큼 훌륭하지 않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리얼리즘 소설도 『분노의 포도』만큼 훌륭하지 않죠. 장르로 작품을 판단하는 건 그냥 틀렸어요. 어리석은 데다, 낭비죠. 이제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 사실을 알아요. - P43

바로 그거예요. 최근에 ‘북뷰 카페‘에서 했던 서사 소설에 대한 온라인 워크숍에서 저는 몇 번이고 사람들에게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해양 모험소설 ‘마스터 앤드 커맨더』를 비롯한 ‘오브리-머투린‘ 시리즈을 읽어보라고 권했어요. 그 긴 문장, 묘사를요. 해상전투를 어떻게 쓰는지 보고 싶으면 오브라이언을 찾아보라고요. 오브라이언은 놀랍도록 뛰어난 액션 작가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쓰는 걸까요? 그 부분을 연구할 가치가 있어요.
이렇게 경이로운 글쓰기 사례들을 장르소설에서 찾을 수가있어요. - P45

네이먼


지금 인용할 말에 제가 과도한 뜻을 부여해서 읽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아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하신이 말씀에서는 불교철학이 떠오르더군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죠. "어떤사람은 예술을 통제의 문제로 본다. 나는 예술을 주로 자기통제의 문제로 본다. 이런 식이다. 내 안에는 말해지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나의 목표다. 나는 그것의 수단이다. 내가 나 자신, 나라는 자아, 나의 소망과 의견, 나의 정신적인 쓰레기를 치우고 그 이야기에 집중해 따라갈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야기가 스스로 말할 것이다." 이건 작심하고 뭔가를 종이에 쓰려는 사람과는 아주 다른 접근법 같아요. - P48

르귄


그래요, 상당히 도가적이죠. 무위無, 또는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것. 아주 수동적인 태도처럼 보여요. 물론 노자는 갈등을 지향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수동적이라고 보죠.
"뭔가를 하지 말고, 그냥 앉아 있어라." 그게 노자가 정말 어려우면서도 정말 유용한 대목이에요. 그냥 앉아 있기에도 수많은 다른 방법이 있거든요. - P48

르귄


[글쓰기의 항해술] 에 썼듯이 ‘금욕‘은 제가 열네 살 때, 소설을 써보려는 시도가 딱히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단어가 너무 많고, 형용사와 부사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고안해낸 방법이에요. 그래서 전 일부러 어떤 형용사도 부사도 쓰지 않은 서술을 한 페이지 꽉 채워서 써보려고 했죠. ‘오직‘이나 ‘거의‘같이 꼭 필요한 단어도부사에 속하니 아주 힘들어요. 그러니 다 잘라낼 수는 없을 때도 있죠. 그래도 ‘~적-ly‘
같은 단어는 다 잘라낼 수 있고, 다채롭고 매력적인 형용사를다 없앨 수도 있어요. 그러고 나면 금욕적이고 소박한 산문이 남죠. 대신 모든 에너지를 동사와 명사에 쏟아야 하기 때문에글이 더 힘 있고 진해져요. ‘금욕‘은 제가 가르치는 거의 모든 워크숍에서 하는 연습방법이에요. 그리고 다들 그걸 싫어하죠! 그래도 마지막 연습인 이른바 ‘끔찍한 일‘ 만큼 싫어하진 않아요. 자기 글을 가져다가 절반으로 줄이면서, 그 절반의 양으로 똑같은 내용을 말하는 연습이거든요. - P49

이 워크숍을 하다 보니, 작가 생활 말년인 지금에 와서 사람들에게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하는 게 제게도 도움이 되는 듯합니다.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지망생들도 거의 모든 작가가 좌절과 끔찍한 자기 의심을 경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을 테고 그 점을 알아두면 가치가 있을지도 몰라요. 작가들은 혼자 작업할 때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 대부분의 예술가보다 더 스스로를 의심하는 경향이있어요. 그리고 출간은 만만찮은 장벽이죠. 시작할 때 저는 어쩌다 한 번씩 시를 발표할 수 있었어요. 독자가 여덟 명, 아홉 명쯤 되는 아주 작은 시 잡지였지만, 그래도 인쇄가 되긴했죠. 하지만 소설은 하나도 팔지 못했어요. 6년인가, 7년 동안 꾸준히 단편과 장편을 써서 세상에 내놓으려고 했지만 아무 데도 싣지 못했죠. 친절한 거절 쪽지는 잔뜩 받았고요 - P50

사실 저는 작가가 되는 데에, 제 글에 전념하고 있었고 자신감인지 오만함인지가 있었기에 계속할 수 있었어요. ‘난 해낼 거야, 그것도 내 방식으로 해낼 거야.‘ 그런 생각에 매달렸죠. 그리고 펑, 마침내 뚫었어요. 일주일 사이에 단편 두 개를 팔았죠. 하나는 상업 잡지였고, 하나는 작은 문학잡지였어요. 일단 살짝이라도 열리고 나면 문이 계속 열려 있는 것 같아요. 이제는 작품을 어디에 투고할지 알기가 쉬워지는 거죠.
제 단편은 전통적인 리얼리즘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요소가 - P50

있을 때가 많았고, 전 판타지와 SF 잡지들은 제 글을 읽고 "이게 대체 뭐야?"라고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전통 문학시장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열린 마음이 그곳에 있었죠. 이렇게 한번 전진하고 나니 그 후에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글이 채택됐죠.
물론 그러고 나서도 에이전트를 얻기 전까지는 계속 제 글을투고했는데, 그건 힘든 일이에요.
그리고 이건 제가 지금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는 영역이기도 해요. 인터넷과 전자출판, 자가 출판과는 너무 달라서요. 예를 들어 자가 출판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감정이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자가 출판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작가를 실제로 어디로 데려가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볼 뿐이에요. 홍보망도 없고, 작품을 알릴 방법도 없이 자가 출판을 하고, 광고주들에게 팔지도 않겠다고 선택한다면. ..? 전 그냥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자기 작품이 인쇄된걸 보면 정말 좋기는 하지만, 주위 사람들과 친척들 말고는 아무도 읽지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죠? 저는 모르겠어요. 이 시점에서는 아무도 누군가에게 확고한 조언을 해주지 못해요. 우린 혁명기를 살고 있어요. 이 혁명 이후에 출판이 어떻게 정착할지짐작해볼 수밖에 없죠. 정착하기는 할 테니까요. - P51

시에 대하여


어슐러와 첫 인터뷰를 하기 전, 아내와 나는 워싱턴주와 캐나다 국경선근처에 있는 노스 캐스케이드 국립공원에 하이킹을 하러 갈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 북서부에서 여름의 새로운 기준이 되어버린산불이 공원을 닫아버렸고,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대안을 찾아 헤매야했다. 나는 어슐러가 오리건주 남동부제일 구석의, 외딴 고지대 사막에 있는 스틴스산을 오랫동안 사랑했음을 알았다. 어슐러의 소설 『아투안의 무덤의 세상에도 영향을 미쳤고, 시와 사진이 함께 수록된 협업작품집이었던 『이곳에 나와Out Here 에도 영향을 미친 풍경이다. 아직만나보지도 못했지만 나는 어슐러에게 전화를 걸어서 혹시 우리의 휴가를 구해줄 만한 제안이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 P53

"어두운 하늘‘ 알아요?" 어슐러는 신이 나서 정보를 공유했다. "미합중국에 남은, 진정한 어둠을 경험할 수 있고 어떤 광공해도 없는 하늘 아래에서처럼 별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거든요?" 어슐러는 바로 그 하늘 아래에서 보낸 무수한 밤의 경이로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곧 아내와 나는 ‘그곳에 나가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눈부신 검은 하 - P53

늘 아래 아직도 야생마들이 돌아다니는 지역, 스무 명도 안 되는 작은마을 안, 다섯 세대째 오리건 사람이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어슐러와 찰스가 보냈다고 해요." 어슐러는 그렇게 말했고, 그곳에 사는 보기 드문 사람들은 우리를 보살펴줬다.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에 처음 찾아온 백인 정착민들까지 쭉 이어지는 농부와 목장사람들이었다. 나와 아내는 그 ‘타오르는 정적‘과 ‘끝없는 빛의 심연‘ 아래 나란히 앉아서, 세상과 우주 속의 우리 자리를 생각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이 어두운 하늘과 그 하늘이 밝혀주는 사람들을 통해 어슐러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어슐러와 내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기 한참 전에 말이다. - P54

이제 나는 어슐러의 시를 생각할 때 이 순수한 하늘과 몇 세대나 그 하늘 아래 살아온 사람들을 제일 많이 떠올린다. 어슐러의 소설을 생각할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상상이라면, 어슐러의 시에서 제일 많이떠오르는 말은 사색이다. 어슐러는 SF 시나, 상상 속의 다른 세상에서일어나는 시를 쓰지 않고 이 세상 속 우리의 자리를 사색한다. 하늘에서 인간의 빛을 제거해 다시금 ‘영원함을 볼 수 있는 하늘이 되게 한다면, 영양과 코요테와 펠리컨과 맹금류가 인간의 수를 훌쩍 넘는 땅에서시간을 보낸다면, 어쩔 수 없이 어떤 의미에 대한 질문들이 솟아오른다. 비인간 타자, 즉 짐승, 새, 식물, 땅 자체와의 진정한 유대감이란 어떤 모습일까? 인간의 어떤 도구와 기술 이야기와 언어들이 세대에서세대로 전해질 가치가 있을까? 우리가 수수께끼와 경이, 우리가 알지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들과 맺어야 하는 적절한 관계는 무엇일까?
어슐러의 세상은 어둠과 빛이 서로의 대척점에 있는 마니교의 세상이아니다. ‘음양‘은 ‘어둠과 빛으로 번역될 수 있고, 도가의 개념과 비슷 - P54

하게 어슐러에게도 이런 반대 항은 사실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이며 서로 얽혀 있고 서로에게 의존한다. 어스시의 사람들은 도가 사상 같은시노래들을 쓰고 전했는데, 이러한 그들의 문화는 그 시를, ‘어둠과빛과 그 안에서 사람들이 차지한 자리를 사색하기 위해 세대를 넘어전하기로 했다. 그리고 어슐러는 그중에서 발췌한 시 한 편을 어스시라는 세상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책의 제언으로 삼았다. 여전히 타자와의조화와 균형을 위해 노력하는 세상을 말이다.

오직 침묵 속에 말이,
오직 어둠 속에 빛이.
오직 죽어감 속에 삶이 있네.
텅 빈 하늘을 나는
매의 비행은 찬란하여라. - P55

우리가 스턴스에서 여름을 보낸 후, 여름이 올 때마다 산불은 더 심해지고 더 멀리 퍼졌다. 자연에 대한 사색은 이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 하늘, 타자성을 비추고 우리가 경외심에 멈춰서서 사색하도록 하는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밝힌 빛과 우리 자신만을 반사해 비추는 하늘을 계속 올려다보는 한, 자연과 유대감을 자아낼 기회는 줄어들기만 할 것 같다. 그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시, 그중에서도 특히 어슐러의 시가 발휘하는 관심 기울이기다. - P55

해안가의 별빛
(코스트 스타라이트 노선)을 타고서


가는 길, 넓은 계곡 속
아침 강물에서 떠오르는
하얀 펠리컨들을 보았지.
오는 길, 깊은 산맥 속,
구름에서 조용히 떠오르는
눈 덮힌 하얀 나무들을 보았지.
무겁고, 고상하고, 엄숙한
날개의, 나뭇가지의, 하얗게 써내는 파괴의 몸짓을.

애플게이트 하우스 앞, 작은 인디언 막자


조밀하고 무겁고 결 고운 검은 현무암
강물처럼 매끈하게 닳아
양쪽 끝이 둥글고 무딘 원통 모양의, 도구:절묘한 중심부나 그 전체적인 곡선
손에 들어맞는 그 모양을 만져보면
몇 년이고 몇 년이고, 손이, 여기를 쥔 여자들의 손이
그 모양을 빚어냈다는 걸 안다
그 무게가 딱 얕고 우묵한 그릇에 떨어지게 쥐고
씨앗을 짓이기고 들어 올렸다 다시 떨구면서부드럽고 무지근한 노래의 리듬에 맞추어
마침내는 돌 속을 파고들었으니,
내가 집어 들었을 때는
어떻게 잡고 들어 올릴지를 직접 말해주듯내 손을 빠듯 채우는 이 고운 형태로 부드럽게 마모시킨
그 손가락들의 자리에 내 손가락을 놓지.
아래로 떨어지고, 또 떨어지며 노래하고 싶어 하는 이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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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 중에서


벽이 있었다. 별로 중요해 보이는 벽은 아니었다. 다듬지 않은 돌에 대충 모르타르만 발라서 쌓아, 어른은 넘겨다볼 수 있는 높이였고 어린아이라도 기어오를 수 있었다. 도로와 교차하는 곳에 난 문은사실 문이라기보다 그냥 기하학적인 배열이자 하나의 선이었다. 경계선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개념은 실재했고 중요했다. 일곱 세대 동안 그 세계에서 그 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모든 벽이 다 그렇듯 그 벽도 양면이 있었다. 무엇이 안이고 무엇이 밖인가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달려 있었다.

어둠의 왼손』 중에서


그때 나는 새삼스럽게 알았다. 내가 언제나 두려워했고 그래서 에스트라벤을 보면서도 못 본 척해왔던 사실을, 그가 남자일 뿐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했다. 두려움이 사라지자 그 두려움의 원천을 설명할 필요도 없어졌다. 마침내 나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나는 에스트라벤의 실체를 거부하고 부정했다. 자신은 게센에서 나를 믿는 유일한 사람이면서, 또한 내가 불신하는 유일한 게센인이라던 에스트라벤의 말이 옳았다. 그는 나를 완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준 유일한게센인이었다. 나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또 개인적으로 의리를 다해준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에게도 똑같은 인정을 바라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그동안 나는 도무지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 인정하기가두려웠다. 여자이면서 남자이고, 남자이면서 여자인 사람에게 나의 믿음과 우정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거기에 더해 큰 이야기 진짜 깊이가 있는 이야기를 하는 데특히 관련이 있죠. 하지만 복잡한 문제예요. 현재시제에도 멋지게 들어맞는 용법이 있다는 건 분명하죠. 하지만 최근에는현재시제가 맹목적으로, 이야기를 푸는 유일한 방식처럼 쓰였어요. 다른 글을 많이 읽어보지 않은 젊은 작가들이 많이썼고요. 글쎄, 그건 어떤 이야기를 하기에는 좋은 방법이지만, 또 어떤 이야기를 하기에는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한계를 내재하고 있죠. 전 그걸 ‘손전등 초점‘이라고 불러요. 바로앞은 보이는데 주위는 다 어두운 거죠. 높은 긴장감, 긴박한상황, 본론만 전달하는 글쓰기에는 아주 좋아요. 하지만 엘레나 페란테의 책들이나, 1920년부터 2020년까지의 시간을 다루는 제인 스마일리의 ‘지난 백 년The Last Hundred Years‘ 3부작같은 크고 긴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ㅡ현재시제를 썼다면 그런 책은 제 기능을 못 했을 거예요. 현재시제가 말 그대로 ‘지금‘이고 과거시제는 말 그대로 먼 과거라는 추정은 너무나 순진해요. - P33

헨리 제임스가 제한적 3인칭시점을 아주 잘 구사하면서 우리에게 그 방법을 알려줬죠. 제임스는 소에게서 우유를 잘 짜냈고, 그건 훌륭한 소예요. 아직도 우유를 많이 내놓고요. 하지만 정작 동시대 작품만 읽고, 언제나 제한적 3인칭시점만 읽는 독자는 이야기 속에서 시점이 아주 중요한 데다가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그래서 제가 사람들에게 울프의 『등대로』 같은 책을 읽고 울프가 어떻게 사람들의마음속을 움직이는지 보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좋죠. 와, 톨스토이가 독자는 바뀐 줄도모르게 이 시점에서 저 시점으로 옮겨가는 솜씨란-정말 우아하거든요. 독자는 어디에 있는지, 누구 눈을 통해서 보는지알면서도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는거예요. 그야말로 달인의 솜씨죠.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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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귄 
Ursula K. Le Guin, 1929~2018


1929년 10월 21일, 인류학자 앨프리드 크로버와 심리학과 인류학을 공부한 작가 시어도라 크로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북미 최후의야생 인디언으로 알려진 이시를 돌보며 기록을 남기는 등 아메리카 인디언 연구에 몰두했던 부모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은 르 귄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래드클리프컬리지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학을 전공한 르 귄은 이후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1953년 프랑스로 건너가던 중 역사학자 찰스 르 귄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몇 달 후 파리에서 결혼한다. 1959년, 남편의 포틀랜드대학 교수 임용을 계기로 르 귄은 미국으로 돌아와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 정착한다.
시간 여행을 다룬 단편 「파리의 4월(1962)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르 귄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며 ‘어스시 시리즈‘와 ‘헤인 우주 시리즈‘로 대표되는 환상적이고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낸다. 인류학과 심리학,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작품은 단순히 외계로서 우주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깊이 있게 파고들어 독자와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총 21권의 장편소설, 11권의 단편집 4권의 에세이집, 12권의 어린이책 6권의 시집과 4권의 번역서를 출간했고,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팁트리상 등을 받았다. 또한 세계환상문학상을 비롯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태평양북서부서점협회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미국 SF 판타지 작가협회의 그랜드마스터로 선정되었다. 의회도서관에 의해 ‘살아 있는전설‘로 지정되었으며, 전미도서재단에서 미국 문학에 대한 두드러진 공헌을 인정하며 수여한 공로상을 받았다.
2018년, 88세의 나이로 포틀랜드의 자택에서 영면했다.




데이비드 네이먼 David Naimon


작가이자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라디오와 팟캐스트 <책표지 사이Between the Covers>의 진행자다. 틴하우스를 포함한 여러 출판사에서 펴낸 그의 글은 2016년 최고의 짧은 소설The Best Small Fictions2016」에 수록되어 재간되었다.

어슐러 K. 르귄(1929~2018)을 기리며


교열 담당자는 빨간 펜을 썼고, 어슐러는 연필을 사용했다. 겨우 일주일 전에 어슐러가 넘겨줬던 이 원고에서는 연필과 펜의 의견이 일치할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다. 우리가 광고문을 어떻게 내보낼지를 두고이메일을 주고받은 지도 며칠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이제는 내가 어슐러와 교열 담당자의 의견이 맞지 않은 부분에 끼어들 차례였다. 그렇게 한창 작업 중이었을 때 어슐러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주일이 더 지나고도 나는 여전히 내가 맡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기에, 게이먼, 마거릿 애트우드, 조월튼처럼 위대한 작가들이 바친 헌사를 읽었다.
나는 어슐러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열정적인 좋아요! 사무적인 제생각은 다릅니다를. 그러다 보니 어슐러가 이 책에 얼마나 온전히 참여하고 있는지, 얼마나 눈앞의 일에 철저히 임하는지가 보였다. 어슐러의 강 - P7

력하고 자기주장 강하며 매혹적인 자아를 끌어내기에 너무 사소한 작업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온 세상을 담아내는 일이나 다름없다해도 말이다. 작가들을 위해 구글과 아마존에 도전한 어슐러, SF와 판타지계 속 남자들의 클럽에 맞섰던 어슐러, 지구, 우리의 행성인 바로 그
‘지구‘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한 어슐러.
어슐러는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본질이 같다고 보고, 똑같이 몰두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나도 똑같이 해보려고, 어슐러가 했듯이 언어에심혈을 기울이려고 했다. 여전히 이 책을 어슐러와 함께 출간하고, 함께 이 여정을 축복하겠다는 꿈이 사라져서 슬프다. 어슐러의 어떤 프로젝트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참여했을 테지만, 특히 이 책, 어슐러의 길고놀라운 삶에서 마지막으로 나오게 된 이 책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이다.
어슐러를 작가로서 돋보이게 한 지점이 많지만, 그중 하나는 우리가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다는 상상이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상상하고, 그 세상을 반영하는 언어를 창조하고, 어슐러가 그토록 아끼던 ‘지구‘를 기림으로써 그를 기리는 것은 우리 몫이다.


2018년 2월 1일데이비드 네이먼 - P8

서문



인터뷰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인터뷰어는 출판사 홍보팀에서 책에 관해 쓴 보도자료를 읽고 오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발췌 문장까지 갖춰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발췌 문장을 크게 읽고 나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 여기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시죠."
그런 인터뷰어들은 책을 한 권 쓴 유명인들과는 잘 맞는다. 그 유명인이 실제로 그 책을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터뷰어도 실제로 읽지 않았으니까. 인상적인 한 구절만을 원할 뿐이다..
"여기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시죠"는 책에 정보나 메시지를 담았고, 그메시지가 전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되풀이해서 말할 열의가 있는 진지한 작가들에게도 통할지 모른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를 최대한 언어에 잘 담아보려고 고심한 작가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런 작가들도 자신들이 한 말이 큰 소리로 읽히는것이야 기쁘게 듣겠으나, 그 말을 다르게 표현하거나 더 잘 표현해야 한 - P9

다고 하면 기뻐하지 않는다. "나이팅게일에 대해 쓰신 부분이 참 흥미로운데요, 키츠 씨, 좀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운이 좋아서, 이런 준비되지 않은 인터뷰어와는 극과 극처럼 다른 분들을 만나왔다. 빌 모이어스와 몇 번 만나본 뒤 ‘좋은 인터뷰‘에 대한 기준이 영영 고정되기도 했다. 좋은 인터뷰란 계속하고 싶어지는 인터뷰다. 하고 있는 말에 대해 전부터 생각해보았고, 말하고 있는 지금도 상대방이 하는 말에 비추어 생각해보고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다. 그러다 보면 그 자리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서로 의견이맞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차이를 적대감 없이 말하고 답하다 보면 대화를 더욱 치열하고정직하게 끌어올릴 수 있다. - P10

이제 나는 질문 한두 개만 받아보아도 불만만 남을지, 노력에 보상받을지를 안다. 불행한 결말이 뻔히 보일 때, 그 인터뷰를 계속하기란 양쪽 모두에게 힘겨운 일이다. 내가 ‘대체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라고?‘ 하고 생각하는 동안 인터뷰어는 ‘맙소사, 또 10초 동안 침묵하다가 음, 이라고 하는군‘ 하고 속으로 한탄한다.
좋은 인터뷰란 멋진 배드민턴 랠리와 비슷하다. 두 사람이 셔틀콕을 계속 허공에 띄워놓을 수 있으며, 그러면 셔틀콕이 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KBOO의 매력적이면서도 펑키한 녹음실에서 서로를 처음 마주했을때 데이비드와 나는 조금 굳어 있었고, 낯을 가렸지만, 곧 대화에 빠져들었고 나는 우리의 셔틀콕이 날고 있음을 알았다.
소설가로서 나는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끄러움 없이 말하지만, 시인으로서 이야기할 때는 수줍음이 많고 아마추어스럽 - P10

다.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보통 다른 시인들을 향해 말하게 되는데, ‘다른 시인들‘은 쉽게 만족하지 않고, 격렬한 자기 의견을 품고 있으며, 적대감이 강할 때가 많다. 배타적일 수도 있다. 글쓰기 워크숍에서낭독의 밤이 있을 때면 나는 산문 작가들과 같이 앉아서 시인들의 낭독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반면 산문 작가들이 낭독할 차례가 오자, 시인들은 모두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게다가 영역 문제에 딸려오는 일종의 ‘시인 언어 Poetspeak‘도 있는데, 그건 나의 언어가 아니다. 이런 모든이유에서 나는 데이비드와 시에 대해 인터뷰하는 것이 불안했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바로 사라졌다. 대화에 푹 빠져드는 것만큼 빨리 불안을치유하는 방법이 또 있을까. - P11

나의 논픽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무섭다. 나는인터뷰어가 내가 읽은 적도 없는 쇼펜하우어나 비트겐슈타인, 아니면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내 글에 미친 영향을 논하려고 할까 봐 무섭다. 아니면 퀴어이론이나 끈이론string theory에 대한 견해를 물으면 어쩌나. 아니면 청중들에게 도가 사상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하면? 아니면 제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데) ‘인류의 미래‘에 대해 물어보면 어쩌나, 내가 스스로 얼마나 무지한지 안다고 해도, 그 모습을 전시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내 배움과 지성의 한계를 존중하고, 나에게 ‘델피의 예언자‘처럼 굴라고 하지 않는 인터뷰어가 고맙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일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는 인터뷰어를 만나게 된다.
데이비드도 일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게 해준 KBOO에 감사드리고 싶다. 50년간오리건에서 예술과 사상의 자유와 관용을 지지하는 가장 강하고 끈질긴 - P11

목소리로 있어준 데 대해서도 고맙다. 미국이 아우성과 거짓말과 분별없는 폭력으로 갈가리 찢기느라 바쁜 중에도, 이런 목소리들 덕분에 아직 우리를 한데 묶어주는 내용을 들을 수 있다. 귀를 기울인다면 말이다.

2017년 10월 6일
어슐러 K. 르귄 - P12

소설에 대하여


어슐러 K. 르 귄은 말한다. "아이들은 유니콘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훌륭하기만 하다면 유니콘에 관한 책이 진실한 책이기도 하다는 점 또한 알지요."
성장기에 [어스시의 이야기들]을 읽던 내 경험이 바로 그랬다. 어스시에서는 마법이 흔했다. 마법사들이 지상을 걷고 용들이 하늘을 날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나를 ‘현실‘에서 멀리 데려갈수록 나는 진짜에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어슐러 K. 르 귄은 가슴속 깊이 작가, 그것도 소설만이 아니라 상상력의 작가다.  - P15

그리고 그에게 상상이란 남는 시간에만 하는 무의미한 활동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이게 만드는 권능이다.
"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용에게 잡아먹힐 때가 많지요. 속에서부터요"라고 경고할 정도다.
어려서부터 르 귄의 상상력이라는 날개를 타고 날아본 나로서는 ‘진짜‘
어슐러 K. 르 귄을 만나면 어떨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상상 속의작가를 몇 개만 떠올리더라도 어스시의 이야기들』에 나오는 마법의땅, 『어둠의 왼손』에 나오는 양성애 행성 게센, 『빼앗긴 자들』에 나오는아나레스의 탈권위 노동조합 사회 같은 세계를 만들어낸 마법사를 현 - P15

실 세계, 즉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사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여성, 나와똑같이 일상의 거리를 걷는 사람, 내가 곧 소설 쓰기의 기본 기술에 대해 인터뷰할 사람과 비교하면 어떨지를 말이다.
우리는 이 대화를 나누기 위해 포틀랜드 동부 깊숙한 곳에 있는 거대한자원봉사 체제의 커뮤니티 라디오 방송국인 KBOO의 스튜디오에서 만났고, 그곳에서 어슐러를 처음 본 나는 단단하고 냉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바보들을 봐주지 못하는 사람. 오랫동안 잘 살면서 풍부한 경험을 축적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이 모여서 살아 숨 쉬는 지혜같은 것으로 변화한 사람. 그리고 이런 지혜를 갖췄기에 가식이나 허세를 참아주지 않을 듯한 사람. 대화를 해나가면서 몇 번이나 확인했기에, 그런 첫인상은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 P16

이 현세의 실제 어슐러와 내가 상상한 다른 세상의 어슐러 사이에 모순이 있었냐고?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아 보였다. 실제와 상상 속을 분리할 수 없게 뿌리를 깊이 내리고 상상력의 가지를 하늘 높이 뻗어 올린작가였다. 그럼에도 작품 밖 세상에서의 어슐러에 대해 알면 알수록보이지 않는 작품 내부의 상상이 현실을 움직이는 것이지, 그 반대가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미국 SF 판타지 작가협회가 선정한 ‘SF 그랜드마스터‘이자 미국 의회도서관의 ‘살아 있는 전설로서 이 세상에서 지닌 명성에도 불구하고, 어슐러는 계속해서 오클랜드의 아나키스트 PM 프레스에서부터 시애틀의 페미니스트 SF 출판사 애크덕트 프레스 같은 소규모 독립 출판사에서 책을 낼 뿐 아니라, 소통에 대한 정신을 공유하고 또 주변부에 있어 상대적으로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을 키워야 한다는 데 관심을 둔KBOO 같은 방송국에 출연한다. 나로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 P16

어스시, 게센, 아나레스 같은 상상 속의 세계야말로 서로 맺는 관계에있어서나 땅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나 이 같은 상상 속의 대안적 삶이야말로 어슐러가 현실 세계에서 보여주는 이런 행동의 추동력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곧 가장 재미없어 보이는 요소들조차도, 이를테면 문법이나 구문이나 문장구조 같은 것들조차도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의해 생동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히 말하자면 그 뒤에, 그 너머에 존재하는 마법 같은 뭔가가 있었다. 우리 문장의 걸음걸이, 길이,
소리, 우리가 사용하는 시제, 시점, 대명사, 그 모든 것에 나름의 역사와 이야기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암시가 있고, 그 모든 것이 좋든 나쁘든 상상 속의 미래 세상을 향해 쌓아 올리는 건축 소재이자 구체적인몸짓이 될 수 있다. - P17

네이먼

그림이든 춤이든 음악이든, 대부분의 예술에서 모방은 배우는 과정의 일부 같아요. 기술을 연마하고,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죠. 가장 경험이 많고 창의적인 화가라 해도 보통은 선대 화가들처럼 그리는 시기를 갖거든요. 작가님은 글쓰기를 배우는 방법으로 모방을 추천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만, 작가들은 전통적으로 모방 때문에 조금 힘들지 않았나요. - P17

르 귄

전통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최근에는 확실히 그렇지요. 예술의 경우에는 모방하는 사람이 모방을 배움의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표절이에요. 배우기 위해 모방하기는 하되, 출간하지는 말아야죠. 아니면 모방하면서 "이건 헤밍웨이 흉내입니다"라고 말하거나요. 하지만 인터넷이나 대학 내 경쟁은 모방과 표절 사이의 구분을 흐리는 경향이 있고, 이렇게 흐릿해진 상황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들이아예 모방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게 되는 거예요. 어리석은 일이죠. 우리는 좋은 작품을 읽고 그렇게 써보려고 하면서 배워야 해요. 피아노 연주자가 다른 피아노 연주를 하나도 듣지않는다면, 연주할지 어떻게 알겠어요? 전 우리가 모방을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 P18

네이먼


작가님은 소리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고, 언어의 소리가 모든 것의 시작점이며, 언어의 핵심은 물리적인 실체라고 하셨는데요.


르 귄


저는 제가 쓰는 글의 소리를 들어요. 아주 어렸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언제나 머릿속으로 소리를 들었죠. 알고 보니글쓰기에 대해 쓰는 많은 사람이 듣거나 귀 기울이지 않고,
좀 더 이론적이고 지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몸안에서 글이 울리면, 스스로가 쓰는 글을 들으면 올바른 리듬을 들을 수 있고, 그러면 문장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데 도움 - P18

이 됩니다. 젊은 작가들은 언제나 "자기 목소리를 찾는다"라는 말을 하는데요,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스스로의 목소리를찾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쓴 글에서 울리는 소리는 그 글의작용에 핵심적이에요. 우리의 글쓰기 가르침은 그걸 무시하는 경향이 있죠. 아마도 시만 빼고요. 덕분에 우린 덜컥거리는산문을 만들어내면서도, 뭐가 잘못됐는지를 몰라요.



네이먼


2000년에 있었던 포틀랜드 문학예술 강연에서 이런 멋진 말씀을 하셨죠. "기억과 경험 아래, 상상과 창작 아래, 단어들아래에 기억과 상상과 단어 모두가 움직이는 리듬이 있습니다. 작가의 일은 그 리듬이 느껴질 만큼 깊숙이 들어가서, 그리듬이 기억과 상상을 움직여 단어를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 P19

르귄


그건 버지니아 울프에게 배운 거예요. 울프는 친구인 비타 ‘약20년간 울프의 연인이자 친구였던 20세기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를 가리킨다. 올랜도』의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 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말 멋지게 설명하죠. 스타일은 리듬이라고, ‘마음속의 파도‘라고요. 그 파도,
그 리듬이 말보다 먼저 존재하고, 단어들을 거기에 맞게 짜맞춘다고요.



네이먼


리듬 사용에 대한 아마도 최고의 예시로 버지니아 울프를 언급하기도 하셨죠.



르 귄


울프는 산문에서 길고 섬세한 리듬을 사용하는 놀라운 실사 - P19

례에요. 하지만 다른 작가도 얼마든지 있죠. 전 톨킨이『반지의 제왕』에서 쓴 리듬에 대해 에세이를 쓰기도 했어요. 짧은리듬이 반복되면서 긴 리듬을 형성하는데, 톨킨의 글에 나오는 순환적인 반복이야말로 그 글이 정말 많은 사람을 완전히사로잡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우린 이 리듬에 넋을 잃고 행복해지죠.



네이먼


작가님이 문법과 문법 전문용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 규칙들이 옳은지 따져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는 게 흥미롭습니다. 문법은 우리 직업의 도구인데, 너무나 많은 작가가 문법과의 관계를 피한다니 이상한 현상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셨어요. - P20

르귄


제 세대에서나 그 후로 한동안은―저는 1929년에 태어났습니다만 문법을 맨 처음부터 배웠어요. 조용히 주입받았죠.
우린 품사의 이름을 알았고, 영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지식도 얻었는데, 이제는 대부분 학교에서 그런 걸 가르치지 않아요. 요새 학교에서는 읽기도 예전보다 훨씬 적게 하고, 문법은 아주 조금만 가르치죠. 작가에게 이건 목공 도구 이름을 배우지도 않고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채 목공실에 내던져지는 상황과 비슷해요. 필립스 스크루드라이버로 뭘하죠? 필립스 스크루드라이버가 무엇이죠? 우린 사람들에게 쓸 준비를 갖춰주지 않고, 그냥 "당신도 쓸 수 있어요!" 아니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냥 앉아서 써봐요!"라고하고 있어요. 하지만 뭔가를 만들려면, 만들 도구를 갖춰야해요. - P20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중에서


그러자 정말로 평화가 찾아왔다. 바다에서 해변으로 평화의 메시지가 불어왔다. 세상의 잠을 더는 깨뜨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깊이 잠들어 쉬도록 달래며, 꿈꾸는 이들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성스럽고도 현명하게 확인토록 하고ㅡ또 뭐라고 속삭이는걸까, 릴리 브리스코는 깨끗하고 조용한 방에서 베개에 머리를 누인 채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세상의 목소리는 너무 조용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없었지만, 그 의미가 분명하게 전해진들 달랐을까.

J. R. R. 톨킨의 [반지 원정대] 중에서

깊은 물속에 세워진 거대한 받침돌 위에 돌로 만든거대한 두 왕이 서 있었다. 둘 다 이마가 갈라진 채, 흐릿해진 눈을 찌푸리며 가만히 북쪽을 바라보았다. 둘 다 왼쪽 손은 경고하듯 손바닥을 바깥쪽으로들어 올렸다. 둘 다 오른쪽 손에는 도끼를 들었다.
둘 다 머리에는 부서져가는 투구와 왕관을 썼다. 오래전에 사라진 왕국의 말 없는 수호자들, 그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과 위엄을 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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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대화 


호르르, 바람이 세월을 밀어낸다. 그의 시간 한 줌이 바람속에 흩어져 흘러간다. 잣나무 가지가 쉴 새 없이 살랑이고그 사이로 갓난아이 눈망울같은 햇살이 어룽거린다. 아내가 묻힌 자리, 1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눈 밝은 사람이 아니라면 찾을 길 없이 녹음 짙푸러 여기가 거긴지 거기가 여긴지 풍경 사뭇 다르다. 매일 오는데도 한재정상 잣나무숲은 매일 모습을 바꾼다. 호르르, 바람결에 흔들리며 어어룽 숲 바닥에 내려앉는 햇살이 아내의 웃음처럼 수줍다.
이러고 있으니 좋은가?
평생 고생하여 마련한 선산이며 뒷산 놔두고 하필 여기에 묻히길 원한 것은 아내였다. 죽음을 예감한 순간, 아내는병원 창밖, 이제 막 새 움을 틔운 은행나무를 보며 말했다.
- P9

한재 잣나무숲에 가면 열십자 모양의 바우가 한나 있을것이요. 그 근방암 디나 뿌려주씨요.
한재, 라는 말이 아내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거무죽죽다 죽어가던 심장이 벌떡살아나 타닥타닥 시퍼런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백운산에서 1년. 85년 중 찰나와도 같은 그 짧디짧은 기억이 아직도 자네 돌아갈 곳이었단 말인가. 노여움인지 슬픔인지 질투인지 뒤범벅인 감정을 헤아릴길 없어 그는 묵묵부답, 일가친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유지를 따랐다.
그 뒤로 그는 매일 한재에 오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아이 넷 낳고 아이가 기억을 지워 아무일 없이 잘사는 것 같던 아내의 얼굴에는 문득문득 깊은 소(沼)의 바닥처럼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 P10

가서 바람은 오동나무 잎사귀를 조심조심 흔들고 포플러 잎사귀를 요동치게 하고 아낙 잃은 외로운 남정네의 한숨을 실어 늙은 과부 시리디시린 가슴팍을 두드릴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유정(有情)한 것들의 설움을 무심하게 실어나른다. 마당의 은행잎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늦가을, 아내는 저녁을 짓다 말고 불길이 제 치마폭을 삼킬 듯 너울거리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바람의 노니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이상하지라. 바람이 불면 시상이 한숨 같은 것으로나 꽉찬 것맹키 아득하고 서글프고 그래라.
그러면서 아내는 무안한 듯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잣나무숲에 일렁이는 바람은 누구의 한숨일까? 아내가 마음에품었던 그 썩을 놈이나 그놈 같은 어떤 이들의 서러운 한숨일까? 어쩌면 이 바람 속에는 아내 묻은 날 그가 뿌렸던 눈물이나 그날 이후 오늘까지의 묵묵한 그의 숨도 섞여 있을지 몰랐다. - P15

젊은이의 눈길이 잣나무숲, 햇살 어룽거리는, 지난가을의 낙엽 아직도 미처 썩지 않은 푹신한 땅바닥을 더듬는다.
아내 묻힌 거기 어디쯤, 아마 아내 아닌 다른 사람들도 거름이 되어 잣나무를 쑥쑥 키웠을 것이다. 사람의 몸뚱이를먹고 자란 잣나무는 그 어느 곳보다 무성히 짙푸르고 사람의 슬픔을 먹고 자란 바람은 그 어느 곳보다 처연히 서늘하다. 제 슬픔을 먼저 간 혹은 후에 간 사람들의 슬픔을 다독이듯 도련님은 잣나무숲 여기저기를 눈빛으로 어루만진다.
도련님의 눈빛이 더듬는 곳, 햇살이 반짝 빗방울처럼 튕겨오른다.
목심은 하난디라. 되련님도 나도……….
목숨을 버릴 생각 같은 건… 그는 해본 적이 없다. 도련님 따라 간이학교에 가서도 그는 갓 태어난 송아지 눈망울이 아른아른, 갓 돋아난 가지 떡잎이 어어,  - P22

사람이 좋아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도련님은 몰랐다. 혼령이 되어서도 도련님은 여전히 모른다. 도련님에게 신념은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무엇이다. 저 하나 바꾸기도 어려운 게 인생이란 걸, 부잣집도련님은 모른다. 아니 도련님은 아는 무엇을 그가 모르는것인지도 모른다. 그걸 굳이 부정할 생각도 없기는 했다.
도련님과 그는 타고난 태생만큼 다른 사람, 그러니 달리 산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믿었다.
사랑이 신념인 사람도 시상에는 있어라.
니 말이 맞다믄... 니도 고런 사람이겄제. 그래서 니헌티순심이를 보냈을랑가………. 그건 나도 모린다. 순심이를 살릴라고 생각형게 니배끼 생각나는 사람이 없드라. 그래 니헌티보냈다. 그래 니가 괴로웠을랑가, 고것까지는 나는... 생각을못 혔다. 아니 안… 혔다. 사람 살리는 것이 더 급했응게. 혀서 니는... 내가 미웁냐? - P25

죽어서 그의 곁이 아니라 도련님의 곁을 택한 것은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임도, 함께하여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임도, 그는 짐작한다. 그러면서도 아내의마음 전부를 갖지 못하여안절부절, 몸의 욕망이 끊긴 뒤에도 질기게 살아남은 마음의 욕망이 서글프다. 아내 묻힌 자리, 처연히 더듬고 있을 도련님의 시선조차 소화되지 않은채 그의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나 뜻밖에, 그 자리 더듬는 도련님의 시선은 청포묵처럼 담백하다. 사상이고 무엇이고 도련님만 해바라기하는 그 여자, 답답하여 내려보낸 그 순간, 도련님은 여자 향한 제 마음도 싹둑, 작두로 콩대 자르듯 잘라낸 것인가.
도련님은 왜 하필 그로 와 죽었소? - P31

나가 참말 죽었으까 운학아?
죽어 젊은 도련님이 살아 늙은 그를 응시한다. 아, 잣나무숲이 바람에 출렁인다. 바람이 잣나무숲에 고인 어떤 것들의 세월을 소환하여 거기 숨을 불어넣는다. 순심이가 눈물 떨구며 뒤돌아보고 도련님이 물푸레나무 지팡이 짚은채 잣나무숲으로 들어서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자처럼으로 숨어든다. 바람의 숨결 닿는 곳마다 잣나무숲, 출렁이며 싱싱하게 살아난다.
이것이 시방 꿈이끄나.
그는 깨어나는 숲을 멀뚱멀뚱 바라본다. 동고새가 융단처럼 푹신한 낙엽더미에 입을 묻고 박수라도 치듯 머리를끄덕인다. 꿈틀꿈틀 싱싱한 벌레 한 마리 동고새 입에 낚인다. 먹이를 먹은 동고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휘휘휘 호로롱, - P33

봄날 오후, 과부 셋 


봄바람이 앙탈하는 아이처럼 마당을 휩쓴다. 어지간한바람에는 끄덕도 않던 남보라 빛 수국마저 미친년 널뛰듯몸을 뒤챈다. 간신히 매달려 있던 무거운 꽃송이가 뚝 부러질 것만 같다. 가만보니 그것은 수국이 아니라 빨랫줄에서펄럭거리는 남보라 빛 치마다. 요즘은 자꾸 헛것이 보인다.
헛것이 보인다고 한숨결에 한마디했더니만 서울사는 딸년은 짜증스럽게 헛것은 무슨, 백내장이 심해 그렇지, 무안하게 쏘아붙였다. 썩을년. 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백태 낀 눈이 빚어내는 착각이 그녀에게는 잠시의 현실이다.
그녀는 보송보송 마른 빨래를 걷는다. 반나절 만에 빨래를말린 성급한 바람처럼 그녀의 80년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누군가 그녀의 세월 밖에서 그녀의 한 삶을 지켜보고 - P37

사다꼬도 그게 부러웠구나. 어쩐지 그녀는 그런 사다꼬가 가깝게 느껴진다. 언제였는지, 갓 구운 카스텔라를 들고서점에 간 적이 있다. 학생들 등하교 시간이나 되어야 손님이 드는 서점은 고즈넉했다. 그렇게 자주 봐도영말이없는 하루꼬 남편이 불편해서 그녀는 창밖에서 서점 안을 기웃거렸다. 참고서를 들이는 참인지 두 사람은책뭉치를 풀고 있었다. 하루꼬의 앞머리가 흘러내리자 남편이 장갑을벗고는 천천히 쓸어올렸다.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귀 뒤로 넘긴 남편은 몇 번이고 하루꼬의 뺨을 쓰다듬었다. 다정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하루꼬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 또한 다정하고 따뜻했다.
단 한 시간도 그런 세월을 살아보지 못했노라는 사다꼬의말을 그녀는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P59

하루꼬의 웃음을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하루꼬도 그 사실을 의식했는지 머쓱하게 웃음을 거둔다. 그러나 잠시의 웃음은 소녀 시절처럼 해맑다.
"자주 좀 모이자 영감도 없으니 나도 이제 놀러도 다니고 해야겠다."
웃음 끝에 사다꼬가 덧붙인다. 사다꼬는 지난 5년, 남편이 앓아누운 뒤로 아예 문밖출입도 하지 못했다.
"아이구, 언제는 사는 게 덧없다더니………."
"에이꼬 네 말이 맞다. 죽지 못할바에는 재미나게 살아야지."
사다꼬는 이렇게 불쑥 물러나서 사람 맥 빠지게 하는 데도사다.
"나 배고파. 뭐 먹을 거 없어, 사다꼬?"
그녀가 산해진미를 올려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하루꼬가 먹을 것을 찾는다. 하루꼬의 염장질은 이런 식이다. - P63

그는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얀 행주로 상을 닦는다. 엊저녁 삶아놓은 것이다. 자기부터 자기를 대접해야 남한테도대접을 받는 법이야. 그래서 어머니는 입고만 나서면 흙투성이가 되고 마는 옷을 그악스럽게도 갈아입히고, 사과 하나 귤 하나도 예쁘고 좋은 것으로만 골라 먹였다. 그래 봐야 남들에게는 병신이었을 테지만 어머니만큼은 그를 부잣집 도련님처럼 위했다. 그는 보란 듯이 밥상을 차린다. 언젠가 어머니 간 뒤 군청 복지과라나 사회과라나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에 병신 아들 사는 꼴이안타까워 누가 민원이라도 넣은 모양이었다. 마침 밥을 먹으려던 차였다. 군불 지피고 나온 숯으로 구워낸 고등어자반까지 떡하니 놓인 밥상을 본 여직원이 어머, 호들갑스럽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어머, 저보다 훨씬 낫네요. 여직원은 염치도 좋게 자반을 손으로 죽 찢어 맛을 보았다. - P75

가슴이 두근거린다. 호아가 집에 있다면 아이가 저렇게 울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몸조차 가누지 못할 만큼 맞은 것일까. 아니면 호아도길호 어머니처럼 집을 나간 것일까. 어머니가 떠난 날처럼등골이 서늘하다. 드르륵, 문이 열린다. 저거침없는 손길은호아가 아니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길호형의 마음을 그는 알 것 같기도하다. 동네 아이들에게 병신 소리를 듣고 온 날이면 아버지는 그를 때렸다. 맞는 것은 그였으나 괴로운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주먹이 향한 것은 그가 아니라 아버지의 어긋난 유전자, 그러니까 곧 아버지 자신이었다. 호아를 때리는길호 형의 주먹도 어쩌면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 모른다.
그게 아버지가 견디는 방식이란다. 막막해서, 하도 막막해서 그러는 거야. 네가 이해하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은상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길호 형도 아버지처럼 막막한것일까. - P79

손에 잡혀나오는 것은열쇠다. 버둥거리는 손으로 그는 허리춤의 쇠사슬에서 열쇠를 빼낸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손에 열쇠를 쥔 채 그가손을 뻗는다. 그의 말없는 말을 호아는 알아듣는다. 조심스레 열쇠를 잡는다. 이제는 담벼락 아래서 멍든 얼굴을 가린 채 숨어 있지 않아도 될까. 이곳이라면 취한 남편도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호이는 열쇠를 쥔 채 문을 열고 나선다. 끼이익, 돌아가야 할 곳의 냉혹함을 일러주기라도 할듯 쇳소리가 귀청을 긁는다. 비탈길을 내달리기 전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뒤돌아본다. 눈송이 같은 하얀 꽃이 철조망위로 조랑조랑 매달려 있다. 꽃송이가 바람에 살랑인다. 꽃송이를 흔든 바람이 향기를 안고 그녀의 품으로 달려온다.
그것은 그의 향기다. 열쇠를 꼭 쥔 채 그녀는 마을을 향해내달린다. - P90

맏이의 말이 가슴을 후빈다. 그는 묵묵히 도끼를 놀린다.
퍽, 퍽, 나무 쪼개지는 소리에 겨울 햇살이 시들어간다.
"아부지는 시방도 경우 쟈가 사람노릇 허고 살 것 같소?
꿈 깨씨요. 23년 만에 지 팔도 보돕씨 움직이는디 쟈가 지발로 걷는 꼴을 아부지 살아생전에 볼 수나 있을 것 같소?
행운의 사나이 좋아하시네. 그놈의 행운 개나 주라고 허씨요. 저놈 명운(命運)이 어매아배 다 잡아묵고 인자 나꺼잡아묵게 생겼단 말이요."
도끼가 갈 자리를 잃고 받침대에 꽂힌다. 한치만 어긋났으면 그의 정강이에 꽂혔을 것이다.
"주뎅이 못 닥치냐!"
순간, 우어, 우어어, 기이한 비명 소리가 그의 일갈을 눌러 앉힌다. 그의 귀가 경우 방을 향해 곤두선다. 어어. 분명경우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도끼를 집어던지고 신발을 벗을 겨를도 없이 아들 방으로 내달린다.  - P149

머리를 침대 머리맡에 박으며 우어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놀란 그가 아들의 머리를 두 팔로 감싸 안는다. 지난 23년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아들의 목이 그의 팔 안에서 버둥거린다. 아들의 볼은 눈물로 온통 흥건하다.
"씨발! 벵신 자석만 끼고돌다가 인자 산 자석 죽는 꼴 보게 생겠네. 조오컸소!"
콰당, 대문이 거칠게 닫히고 아내의 곡소리가 늦가을 바람처럼 어지러이 집 안을 휘돈다.
"아이고오! 우리 경우가 그때게, 사고 났을 때게, 팍 죽어부렀으면, 그랬으면 좋았을랑가……."
울음 끝에 아내가 탄식한다. 아직도 경우는 그의 품 안에서버둥거린다. 버둥거림이 점점 힘차지는 것을 그는 온몸으로느낀다. 이것은 기적이다. 경우는 또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시들어가는 햇살이 눈물로 번들거리는 아들의 뺨 위로 힘없이 내려앉는다. 벌써 짧은 겨울 낮이저물고 있다. - P150

핏줄 


왕시루봉이 구름 한 점 없이 말갛다. 오늘도 비 오기는글렀다. 장마철이 열흘 남짓 지났는데도 뜨거운 뙤약볕만내리쪼인다. 60년 경력의 농사꾼인 그도 철을 종잡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매화와 동백이 시들 무렵 연노란 산수유가 들판에 봄빛을 불러오고, 아련한 연노랑 빛이 성에 차지않는다 싶을 즈음 진달래가 산등성을 벌겋게 물들이고, 그꽃들이 죄 사라진 뒤에야 봄볕에 지친 보랏빛 오동이 숨을헐떡이며 커다란 꽃잎을 축 늘어뜨려 여름을 알렸는데 요즘은 온갖 꽃들이 동시다발로 피어난다. 지난겨울에는 제가 무슨 고결한 매화나 되는 양 한겨울 눈 속에 움튼 버들강아지를 보기도 했다. 농사일에도 철이 사라진 지 오래다.
철따라 농사를 지었다가는 빚더미에 올라앉기 십상이다.
- P153

"밥 차례! 시방이 몇 신디……그는 괜히 아내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는 느릿느릿 얼갈이배추를 씻으며 콩닥콩닥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답이었다.
"넘들은 나이가 들면 둥글둥글 부처를 닮아간당만 우리집 영감은 먼 영문으로 늙을수록 심통만 늘어가 모리겄네. 묏자리를 잘못 썼능가, 집터가 안 좋응가…………"
제발 사근사근 말 좀 했으면 싶던 젊은 날에는 꿀 먹은벙어리마냥 입을 꽉 다물어 애를 태우더니 뒤늦게 말문이터졌는지 요즘에는 그가 한 마디 하면 백 마디로 돌아왔다.
늙은이 살가죽처럼 질긴 아내의 잔소리는 피하는 게 상책중 상책이었다. 아침부터 뭘 볶는지 온 집 안에 기름내가진동했다. 아침 밥상 위에 떡하니 올라온 것은 모양도 요상한 샛노란 부침개였다. - P172

내는요즘 들어 끼니마다 베트남 음식이 밥상 위에 올라왔다.
아내가 베트남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봄, 쑤언의생일이 지난 뒤였다. 한국에서 맞는 첫 번째 생일이라고 아내는 오랜만에 옛 실력을 발휘하여 백설기에 약밥까지 한국식으로 떡 벌어진 한 상을 차렸다. 쑤언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게 그 상을 받았다. 그날 밤 화장실에 다니러 간 아내가 찬바람을 몰고 혀를 차며 돌아왔다. 초봄이라 쌀쌀한밤공기에 잠이 깬 것인지 한참 뒤척이던 아내가 넌지시을 건넸다.
"영감, 쑤언이 봄이라요. 봄에 태어났다고 쑤언이랑마."
봄이 그렇게 예쁜 이름인 줄 그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쑤언은 베트남 얘기를 단 한 번도 입에 올린적이 없었다.
"초승달을 봅시로 울고 있어라. 월남이 그리운서. 하기사 여우도 죽을람시로 고향 쪽을 보고 죽는단디 워째 고향이 안 그립겄서. 짠하고 안됐어라." - P173

간간히 쑤언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명조차 마음껏 지르지 못하게 만든 것은 비명을 질러봐야무용지물인 오랜 세월이었으리라. 으앙! 어미 대신 우렁찬비명을 지르며 아이가 나왔다. 잠시 후 분만실 문이 열렸다.
"사내아입니다."
간호사가 얇은 천에 둘둘 말린 아이를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저도 모르게 움찔 그는 눈을 감았고, 심호흡을 하며지발, 간절한 기도와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눈앞이캄캄했다. 까맸다! 어미를 쏙 빼닮아 새까맣고 오종종한 아이가 벌써 눈을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눈동자 검은 이 아이가 한산 이씨 28대손 이강호였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그는 엉거주춤 아이를 안은 채 화석처럼 굳었다. 아이고, 아가! 우당탕 문이 열리며 저만치 아내의 고함 소리가 아득하게 멀었다. - P178

고등학교 때부터 술 좋아하고 문학 좋아하던 박은 문청들의 잡소리 듣는 재미에 빠져 그냥저냥 식객으로눌러앉았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고, 경기고에 다니던 박은영어 좀 안다는 죄로 선배 따라 켈로 부대원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잘도 일상으로 복귀했다. 박은 그게쉽지 않았다. 전쟁은 박에게 술로 남았다. 술 없이는 도무지시간이 흘러가질 않았다. 술을 마시면 시간이 훨훨 날아갔다. 술과 더불어 한평생을 하룻밤처럼 흘려보내는 것이 스물둘 박의 소원이었다. 그래도 평생이 하룻밤과 같지는 않았다. 술에서 깨고 보면 또 지루한 시간들이 막막하게 놓여있었고 하여 다시 술잔을 잡았다.  - P182

"얘, 너는 어디서 빌어먹니?"
발로 걷어차인 데다 곤한 잠을 깨웠는데도 취객은 성을내지 않았다. 나? 하고 반문하더니 가만히 제가 기대앉은집을 가리켰다. 그곳은 전쟁 전 최의 집이었다. 최의 가족은 죄 월북하고 남도부 부대원이었던 최는 홀로 남에 남았다. 복역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은 백부가 차지하고 있었다. 자기 집에서 최는 더부살이를 하는 셈이었다. 최의 백부는 집안 말아먹은 좌익이라면 치를 떨었고, 하여 빨치산이었던 최에게 더 엄격했다. 늦잠을 자도 술을 마셔도 저놈이 저러니 빨갱이지, 귀에 딱지가 앉았다. 취한 최는 그놈의빨갱이 소리 또 들을까 싶어 통금 가까운 야밤에 집을 지고앉아 노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자는 동안 취기가 걷혔는지 최는 또랑또랑 되물었다. - P183

박은 이내 아쉬운 시선을 거둔다. 젊어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여자는 놓쳐도 술을 놓치는 법은 없던 박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팡이 짚고 돌아갈 길이 아득하다. 생각난 김에 박은 지팡이를 잡는다.
언제나처럼 김이 동작 빠르게 계산을 한다. 평생을 김에게 얻어먹었으나 박도 최도 미안한 기색조차 없다. 있는 놈이겨우 짜장면으로 생색이야. 그런 지청구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다. 평생 마음 놓고 얻어먹을 친구가 있다는 것도 생각하면 복이다. 부모 잃고 형제 잃고 꿈도 잃고 대신 친구 등쳐먹을 복은 챙겼다. - P206

혜화동 로터리에 차들만 분주하다. 로터리를 둘러싼 널찍한 인도에서 최와 박은 머뭇거린다. 택시를 잡을 곳이 마땅치 않다. 로터리를 돌아 나가는 차들이 대낮인데도 뒤엉켜 있다.
"여기서는 택시 잡기 어려워요. 성대 쪽으로 조금 올라가죠."
"흥, 너는 아는 것 많아 좋기도 하겠다. 예순 넘으면 잘난놈이나 못난 놈이나 똑같고, 일흔 넘으면 배운 놈이나 못배운 놈이나 똑같고, 여든 넘으면 산 놈이나 죽은 놈이나똑같다더라."
1-45지팡이 짚고 김의 뒤를 따라 로터리를 돌아나가며 박이또 쏘아붙인다. 최도 한마디 거든다.
"하나 더 있다. 얘. 빨치산이나 켈로나." - P207

김이 택시를 잡고, 몸 제일 불편한 최가 먼저 오른다. 지팡이 한 손에 들고 겨우 차에 오른 최가 문을 닫기 전, 박과김을 일별한다.
"간다."
김과 박은 고개를 끄덕인다. 작별은 평소처럼 무덤덤하다. 이내 문이 닫힌다. 멀어지는 차의 꽁무니를 박과 김이물끄러미 바라본다. 또 보자, 라는 인사가 언젠가부터 간다,
로 바뀌었다. 그러고도 몇 번 또 보았다.
끊임없이 차들이 로터리를 돌아 나오고 그중에는 박 태울 빈 차도 있다. 박의 인사 또한 간결하다.
간다."
언제나처럼 김이 마지막으로 남는다. 박과 최가 떠난 자리, 제 몸뚱이보다 더 무거운 한 삶을 지고 그 삶에 짓눌려허덕이던 그들의 무게 따위 존재도 하지 않았던 듯, 거리는평온하다. - P208

땅은 파도 파도 끝이 없다. 일을 하는 순간에는 끝이 없다는 생각을 지워야 한다. 농사일과는 다르다. 아무리 넓은논도 밭도 끝은 보인다. 끝까지 갈 일이 아득해도 하다 보면 어느 샌가 끝이 나 있곤 했다. 그는 고추 따기가 가장 싫었다. 계집처럼 쭈그려 앉아 고추를 따다 보면 허리가 끊어지거니와 무슨 놈의 고랑이 그렇게 긴지, 검푸른 고추 터널의 끝 부근에서 어룽거리는 빛 때문에 아득히 현기증이 일었다. 고추 딸 때가 다가오면 온종일 술에 취한 듯 세상이어지러워 차일피일 핑계거리를 만들었고, 꼭지가 말라들즈음에야 그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섰다. 벼룩처럼 들러붙어 등골을 뽑아먹는 자식들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지게를 내던지고 훌훌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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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은 정말 높은 자리에 올랐지."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니노의 눈빛에서 나를 자기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그의 말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읽어냈다. 니노는 자기가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책이 성공은 했지만내가 탄원자로서 니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니노는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것 같았다.
‘넌 나 같은 남자를 놓친거야.‘
나는 임마와 함께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 자리에 내가 아닌 릴라가 있었다면 니노의 태도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는 릴라에게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끼고 말을 웅얼거렸을 것이다. 그렇게 허풍을떠는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 P563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니노가 자신의 야망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사랑했던 사람은 릴라뿐이었다. 이스키아 섬에서, 그 후 일 년간 니노는 골치 아플 것이 뻔한 위험에 몸을 내맡겼다.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니노는 이미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디아와 사귄 이유도 나디아가 갈리아니 선생님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만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보다 상류사회인 것 같은 환경으로 진입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니노의 선택은 언제나 니노의 야망과 연관이 있었다. 엘레오노라와 결혼한 것도 그만큼 얻는 게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나 역시 니노 때문에 피에트로와 헤어졌을 때 중요한 출판사와 연관이 있었고 어 - P563

느 정도 자리를 잡은 성공한 작가가 아니었던가. 그런 내 배경은 니노의 경력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니노를 도와준 다른 여자들도 결국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물론 니노는 여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선호했다. 니노의 지성이 만들어낸 산물은 소년 시절부터 그가 정밀하게 짜온 권력의 그물망 없이는 스스로 빛을 발할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릴라는 어떠한가. 릴라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데다 상점 주인의 젊은 아내일 뿐이었다. 스테파노가 릴라와 니노의관계를 눈치챘다면 둘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니노는 왜 릴라와의 사랑에 자기 미래를 걸었던 걸까. - P564

나는 임마를 차에 태우고 아빠를 보러 간다고 마음먹고 사준 새옷에 아이스크림을 흘린 임마를 야단쳤다. 나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로마를 떠났다. 지난날 니노가 릴라에게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니노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없는 어떠한 것을 릴라에게서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 순간 니노는 릴라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그 사실을 확인했을 것이다.
릴라는 지적이었지만 이를 활용해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란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부인처럼 자신의 지성을 허비했다. 니노는 바로 릴라의 이런 점, 즉 대가를 바라지 않는릴라의 지성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릴라의 특성은 다른 수많은 여성과 차별되는 것이었다. 릴라는 그 어떠한 가르침이나 필요 또는 목적에 굴복하지 않았다. 릴라를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는 무언가에 굴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시험과 실패와 성 - P564

공을 겪고 나서 우리 자신을 현실에 알맞게 재조정했다.
릴라는 달랐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릴라를 바꾸지 못한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릴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제멋대로인 데다 우매해지고 있지만 우리가 릴라에게 부여한 능력은 변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해질 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릴라를 증오하다가도 결국 릴라를 존중하고 두려워하게 되곤 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면 나디아가 몇 번 만나지도않은 릴라를 싫어하고릴라를 해코지하고 싶어 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릴라는 나디아에게서 니노를 빼앗았고 혁명에 대한 나디아의 신념을 비웃었다. 릴라는 못된 데다 자신이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공격할 줄 알았다. - P565

릴라는 구제받고 싶어 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였다. 다시 말하면 나디아에게 릴라는 존경할만한 적이었고 그런 릴라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나디아에게 순수한 만족감을 줄 것이었다. 릴라에게 해코지를 하면서 파스콸레처럼 한 명을 마음먹고 희생양을 삼을 때와 같은죄책감은 느끼지 않을 터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비참해졌다. 갈리아니 선생님도 나폴리 만이 내려다보이던 선생님의 집도, 수많은 장서도, 그림도, 선생님과 나누었던 수준 높은 대화도, 아르만도도, 그리고 나디아까지.
나디아는 처음 학교 앞에서 니노 곁에 있었을 때만 해도, 부모님의아름다운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나를 맞이했을 때만 해도 정말 사랑스럽고 예의 바른 소녀였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훨씬 더 빛나는 옷을 입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자신이 누리던 수많은 혜택을내려놓았을 때까지만 해도 나디아에게는 특별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 P565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모든 혜택을 벗어던졌던 고귀한 이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나디아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토록 아둔하게 수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한 끔찍함과 모든 잘못을 벽돌공에게 돌리는파렴치함뿐이었다. 나디아가 한때 신인류의 선봉이라고 여기던 파스콸레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나폴리를 향해 운전하는 내내 데데를 생각했다.
나는 데데가 나디아와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본모습을 잃게 하는 그런 실수 말이다.
7월 말이었다. 바로 전날 데데는 최고 점수로 졸업시험에 합격했다. 데데는 아이로타 집안의 일원이었다. 데데는 내 딸이었다. 그렇게 똑똑하니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곧 있으면 데데는 나를 넘어설 것이다. 제 아빠도 마찬가지다. 내가 힘들게 노력하고 운이 좋아 이루어낸 모든 것을 데데는 마치 타고난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너무나 쉽게 성취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566

그런 데데의 계획은 무엇인가. 겨우 리노에게 고백이나 하는 것이다. 리노와 함께 침몰하는 것이다. 정의감과 연대감, 우리와는 다른어떠한 매력에 취해 자신이 누리는 모든 혜택을 포기하는 것이다.
데데가 허구한날 불평만 늘어놓는 리노에게서 대체 어떤 특출한 면을 보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백미러로 임마를 바라보면서 불쑥 물었다.
"너는 리노가 좋으니?"
"난 별로예요. 리노는 데데 언니가 좋아하죠."
"어떻게 알아?"
"엘사 언니가 말해줬어요." - P566

"엘사 언니한테는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데데 언니요."
"너는 왜 리노가 싫어?"
"너무 못생겼거든요."
"그럼 너는 누가 좋은데?"
"아빠요"
나는 순간 임마의 눈에서 불꽃을 보았다. 그 불꽃은 임마가 조금전에 세 아빠에게서 본 것이었다. 니노가 릴라와 나락에 빠졌다면절대로 가지지 못했을 불꽃이었다. 파스콸레와 나락에 빠짐으로써 나디아가 영영 잃어버린 불꽃이었다.
리노를 따라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데데도 그 불꽃을 잃어버릴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자기 딸이 파스콸레 무릎에 앉는 것을 보고 갈리아니 선생님이 느꼈을 불쾌감을이해할 수 있었고 그런 태도가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릴라를 버리기로 결정한 니노가 이해되고 타당하게 느껴졌다. 솔직히말하면 자기 아들과 나의 결혼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시어머니가 이해되고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P567

엔초는 리노나 리노가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가 아니라 티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몇 년 살다가 죽으면 죽는 거야. 그걸로 끝이지. 언젠가는포기하게 돼. 하지만 아이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러고서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면 살면서 그 무엇도 아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게 돼. 티나는 돌아올까 아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까? 돌아온다면 살아서 돌아올까 아니면 죽어서 돌아올까?"
엔초가 속삭였다.
"매 순간 티나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묻곤 해. 거리에서 집시처럼구걸하고 있으려나? 슬하에 아이가 없는 부잣집으로 들어간 걸까? 사람들이 아이에게 몹쓸 짓을 시킨 다음 그 장면을 찍어서 사진이나영상으로 팔지는 않을까? 아이를 갈가리 찢어 다른 아이의 가슴에넣으려고 티나의 심장을 비싼 가격으로 팔아넘긴 건 아닐까?  - P575

만약그랬다면 티나의 나머지 부분은 땅에 묻혔을까? 아니면 태워버렸나? 그도 아니면 납치됐다가 사고로 죽어버려서 통째로 땅에 묻힌걸까? 만약 흙이나 불이 티나의 몸을 갉아먹은 것이 아니라면, 티나가 어디에선가 잘 자라고 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 변할까? 길에서 마주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설령 알아본다 한들 티나가 사라짐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잃은 것을 누구에게서 돌려받을 수 있을까? 티나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어린 티나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누가 우리에게 알려줄까?"
엔초가 평소처럼 힘겹게 그렇지만 진중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눈물 맺힌 그의 눈을 보았다. 그제야 나는 엔초가릴라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려고 한 - P575

다는 사실을 알았다.
엔초와 함께한 여행은 의미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엔초보다 감수성이 섬세한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엔초는 지난 4년 동안 릴라가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에게 속삭이거나 악을 쓰면서 한 이야기를들려주었다. 그러다 서서히 내가 내 일과 내 불만에 대해 이야기할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엔초에게 딸들 문제와 책, 남자 문제, 시시때때로 밀려드는후회와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글 쓰는 일이 이제는 의무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나를 실력 없고 무례한 별볼일 없는 여자 취급하는 사람들과 싸우느라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 P576

"그 사람들은 오직 내게서 독자들을 빼앗으려고 나를 괴롭혀 원가 심오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그저 내가 발전하는게 싫어서 그러는거야. 자기들과 자기 애제자들을 보호하려고 보잘것없는 권력을 동원해 내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이야."
엔초는 내가 감정을 쏟아내도록 내버려두었다. 엔초는 내가 모든일에 열정을 보인다고 칭찬했다.
"봐. 너는 매사에 열정적이잖아. 그렇게 열심히 사니까 네가 선택한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거야. 그렇기 때문에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거야. 무엇보다도 이 열정에 네 모든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너는 삶의 흐름에 떠밀려 갈 수 있는 거야. 물론 티나에게 일어난 일은 네게도 끔찍하겠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슬픈거야. 하지만 그 일은 이제 네게 먼 과거일 뿐이야. 릴라는 아니야. 지난 몇 년 동안 릴라의 세계는 떠도는 풍 - P576

문처럼 무너져 내려 티나가 남기고 간 공백 속으로 쓸려들어가 버렸어, 빗물이 홈통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말이야. 릴라의 삶은 티나에게서 멈췄어. 그래서 릴라는 티나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살아숨 쉬고 성장하고 번영하는 모든 것을 증오하는 거야."
엔초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릴라는 강해. 나를 막 대하고 네게 화를 내고 못된 말을 해. 하지만 멀쩡하게 설거지를 하거나 창밖으로 큰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던 적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 P577

나는 일에 치여서 한 번도 릴라의 새로운 열정에 대해 이야기를나눌 시간도 의지도 갖지 못했다. 릴라는 릴라대로 내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릴라가 어떤 일에 흥미를 느끼면 집착 수준으로 집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릴라가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게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다만 엔초와 고함을 치면서 한바탕 싸우고 난 다음 릴라가 사라지고 밤늦도록 도시를떠도는 릴라 위에 티나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면 조금 걱정이 됐다.
그럴 때면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나폴리의 지하 터널과 망자의 머리가 겹겹이 줄지어 놓여 있는 지하 묘지가 떠올랐다. 방문객을 불행한 영혼들의 세계로 인도하는 푸르가토리오 아르코 성당의 까맣게 변색된 청동 해골 상들이 떠올랐다.  - P593

나는 다시 니노를 찾았다. 마리사에게서 니노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며 니노가 자기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긴 했다. 그러나 니노는 임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간접적으로나마 릴라에게 자기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서인지 내 부탁에는 바로 응해주었다. 하지만 니노마저 엔초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니노는 몇 번에걸쳐 몇 가지 가정을 들려주기는 했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신빙성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확실한 것은 나디아가 흐느끼며 자백할 때 엔초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앤초와 파스콸레가 트리부날리 가에서 열린 노동자와 학생들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었던 일을 폭로했다는 사실이다. 까마득히 먼 옛날 만초니 가에 있는 나토군 장교들의 사유지 앞에서 있었던 소규모 시위들에 대한 혐의를 엔초와 파스콸레에게 돌렸다는 사실이다. - P594

조사관들은 분명 파스콸레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범죄에 엔초도 연루된 것으로 몰고 가려 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일 뿐 그다음부터는 모든 일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나디아는 엔초가 비정치적인 성격의 범죄를 위해 파스콸레의 힘을 빌렸다고 증언했을 것이다. 아마 나디아는 브루노소카보의 살인을 포함한 몇몇 살인사건을 엔초가 기획하고 파스콸레가 실행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아마 나디아는 파스콸레에게서 직접 솔라라 형제를살해한 범인이 파스콸레와 안토니오 카푸초와 엔초 스칸노였다는말을 들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세 친구가 오랜 유대감과 그에 못지않게 해묵은 원한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 P595

복잡한 시대였다. 우리가 성장했던 세계의 질서가 사라지고 있었다. 올바른 정치 노선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며 습득한기존의 능력이 언젠가부터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자니 마르크스주의자니 그람시 추종자니 공산주의자니 레닌추종자니 트로츠키 추종자니 마오쩌둥 추종자니 노동자니 하는 표현들은 어느덧 한물간 구호나 심한 경우 야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취급당했다. 지난날 혐오의 대상이었던 타인에 대한 착취와 최대 이윤추구의 법칙이 지금은 장소를 불문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국가와 혁명 조직 내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으로 혹독하게 정산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너무나 허무하게 살해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평범한 사람들마저 우르르 떼를 지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니노나 아르만도 같은 사람들은 벌써 오래전부터 기류의 변화를감지하고 새로운 시기에 재빨리 적응했다. 그렇게 해서 니노는 국회 - P595

에 자리를 잡았고 아르만도는 방송 덕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주변사람들에게서 현명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던 나디아 같은 사람들은눈물 고백으로 양심 세탁을 했다.
파스콸레와 엔초 같은 사람들은 달랐다. 나는 그들이 여전히1960년대와 70년대에 배웠던 좌우명에 따라 생각하고 그러한 자기신념을 표현하고 공격하고 방어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파스콸레의 투쟁은 감옥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정부의 끄나풀에게 다른 사람을 고발하지도 않았고 변변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파스콸레와는 달리 엔초는 분명 뭔가를 말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를 계산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자신의 모든 혐의를 부정했을 것이다. - P596

릴라는 나름대로 자신의 뛰어난 지력과 못된 성격과 비싼 변호사들을 총동원해 엔초를 곤경에서 구해내기 위한 싸움에 전력을 다했다. 엔초가 전략가라고? 투사라고? 수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베이직 사이트에서 일하면서 대체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솔라라 형제가 살해당했을 때 엔초는 아벨리노에, 안토니오는 독일에 있었는데 어떻게 셋이 함께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세 친구가 솔라라 형제를 살해했다 할지라도 삼총사는 고향 동네에서 워낙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얼굴을 감춘다 해도 동네사람들은 이들을 바로 알아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주장해봤자 소용없었다. 정의의 수레바퀴는 계속굴러갔고 나는 이러다 릴라까지 체포될까봐 두려웠다. 나디아의 입에서는 계속 새로운 이름이 튀어나왔다. 경찰은 트리부날리 가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을 몇 명 더 체포했다. 그 가운데에는 유엔 식량농업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 - P596

다. 경찰은 에넬사의 기술자와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잘 살고 있는아르만도의 전 부인 이사벨라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나디아가 건드리지 않은 사람은 단 두 명, 자기 오빠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릴라였다.
아마 갈리아니 선생님의 딸은 엔초를 끌어들임으로써 이미 릴라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릴라를증오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존경했기 때문에 오랜 망설임 끝에 릴라를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믿고 싶은 것은 나디아가 티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파 릴라를 자기 일에 연루시키지 않기로 했다는 가정이었다. 아니 나디아는 그보다 어머니로서 그런 일을 겪은 이상 릴라가 다른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 P597

엔초의 혐의는 서서히 실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의는 전투력을 상실하고 기운을 잃었다. 수개월동안 제대로 따져본 결과 엔초가 저지른 일이 별일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파스콸레와 오랜 친구사이라는 사실과 산 조반니 아 테두초에서 노동자와 학생들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했었다는 사실 그리고 파스콸레가 숨어 있던 세리노산의 허름한 산장을 아벨리노에 사는 엔초의 친척 이름으로 임대했다는 것 정도가 사실로 판명되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엔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테러리스트 집단의 두목이자 야만적인 범죄의 기획자이자 집행인에서 일개 테러활동 지지자에 지나지 않는 걸로 밝혀졌다. 그 지지마저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한 개인의 의견일 뿐 그것이 한 번도 범죄행위로 발전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자 엔초는 집으로 돌아왔다. - P597

마리아로사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내린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평가는 사실로 드러났다. 아이로타 교수를 둘러싸고 휘몰아쳤던 언론의 광풍은 조금씩 수그러들었고 시아버지는 다시 자기 서재 안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가 법적으로는 결백하지만실은 분명 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죄인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 결백할 거라고 생각했다.이미상황이 이 정도로 진정된 다음에야 나는 시어머니에게 전화해도되겠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내 배려에 고마움을 표했다. 시어머니는 데데와 엘사의 생활과 학업에 대해 나보다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어머니가 말했다.
"이 나라는 말도 안 되는 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곳이야.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은 서둘러 이민을 가는 게 나아." - P610

솔직히 릴라는 니노의 운명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니노가 법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소식에 릴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릴라는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줄 만한 일이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니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브루노 소카보에게 손을 벌렸지. 분명 한 푼도 돌려주지 않았을 거야."
릴라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빤히 보인다고 했다.
"니노는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악수하면서 자기가 최고로 잘난줄 알았을 거야.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을 거야. 죄를 저질렀다면 분명 사람들이 자기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을 거야. 제일 똑똑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언제나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렇게 했을 거야."
그게 다였다. 그런 다음부터 릴라는 니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 P612

어찌됐든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엄마에게 한마디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핵심이 명확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리나 이모는 네게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구나. 엄마는좋아. 리나 이모가 뭔가에 빠지면 이모를 말릴 사람이 없지. 그렇다고 사람들이 가볍게 나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더구나 그 대상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나 상원위원이나 은행가들이나 카모라라면 말이다. 세상 일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으레 한때는 상황이 좋아졌다가 안 좋아졌다가 때가 되면 다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우리는 항상 열심히 노력해야 한단다. 우리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해. 실수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임마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P621

나는 엄마의 말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사실 내 딸은 내가 자기아빠에게 못되게 굴었으며 자기 아빠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내가 몰랐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정작 내게 예기치못한 영향을 미친 것은 ‘엄마는 책을 쓰지만 리나 이모 같은 선견지명은 없다‘는 말이었다. 임마의 말 때문에 나는 딸이 보기에 선견지명이 있는 여인인 릴라가 50세가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책을 읽고공부를 하고 글까지 쓴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피에트로는 예전에 그런 릴라의 행동을 티나가 사라짐으로써 생긴 괴로움을 잊기 위한 일종의 자가치유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향에서 보낸 마지막 일 년 동안 나는 피에트로의 세심한 의견 - P623

릴라는 말을 얼버무렸다. 내게는 좀처럼 마음을 털어놓으려 하지않았다. 하지만 가끔 릴라답게 갑자기 흥분해서 나폴리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폴리가 평범한 길과 일상적인 장소로만 만들어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나폴리는 오직 릴라에게만 자신의 비밀스러운 광채를 드러낸 것 같았다. 릴라는 몇 마디안 되는 문장만으로 나폴리를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바꾸어 놓았다.
릴라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일을 시작할 때면 영감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폴리에서 태어나 살면서 나폴리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큰 태만이었다. 나는 이제두 번째로 나폴리를 떠나려 하고 있다. 내 인생의 전성기 삼십 년을여기서 보내고도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피에트로가 나의 무지를 비난했었는데 지금은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릴라의 말을 듣다보면 나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 P624

릴라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다른 생각을 가슴속에 품어왔을까. 지금은 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릴라의 눈치아티나가 나의 임마콜라타 대신 납치됐다니 자기 딸이 납치된 게 내 성공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엄마에게 그토록 애정을 보인 것도 불안한 마음에임마를 지키고 보호해주고 싶어서였던 것일까. 티나의 납치범들이실수로 데려간 아이를 내다버리고 원래 납치하려던 아이를 데리러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또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릴라의 머릿속에는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일까. 자신을 떠나려는 내게 벌로 마지막 독을 부어넣으려는 것일까. 아, 엔초가 왜 릴라를 떠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릴라와 사는 것이 너무나 끔찍해졌던 것이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눈치챈 릴라는회피하듯 요즘 자기가 읽고 있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P631

하지만 말에 두서가 없었고 얼굴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릴라는웃으면서 아픔이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법이라고 중얼거렸다.
성당이나 수도원이나 책으로 가리려고 해도 소용없어. 책이 정말 중요한 것 같지? 그러니 너도 책에 네 평생을 바쳐왔겠지. 그래봤자 소용없어. 악은 결국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바닥을 뚫고 기어 나오16-458는 법이야."
릴라는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티나와 엄마와 나에 대한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회유적인 말투였다. 조금 전 자기가한 말에 대해 내게 사과하고 싶은 것 같았다. 릴라가 말했다.
"사방이 너무나 고요할 땐 별 생각이 다 떠오르곤 해. 너무 신경쓰지 마. 모든 사람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올바른 말을 하고, 모든일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고, 호감과 비호감,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은 형편없는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야" - P632

릴라가 속삭였다.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티나가 돌아올 수 있어. 그러면 지금까지일어난 일은 아무 상관없어. 중요한 건 티나가 다시 이곳에 있다는사실이야. 정신을 딴 데 팔았던 엄마를 용서해주는 거야."
릴라가 말했다.
"너도 나를 용서해."
릴라가 나를 껴안으면서 그날의 대화를 끝맺었다.
"어서 떠나. 가서 지금까지 해온 일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하도록해. 내가 임마 곁에 있었던 것은 누가 그 애를 데려가 버릴까봐 겁이나서이기도 했어. 너는 너대로 네 딸이 리노를 버렸는데도 변함없이 - P632

리노를 사랑해줬지. 리노 때문에 많이 참았다는 거 알아. 고마워. 우리가 이토록 오랫동안 친구였고 지금도 친구여서 정말 기뻐."

티나가 내 딸인 줄 알고 납치했을지도 모른다는 릴라의 생각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릴라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게 된 복잡하게 뒤엉킨 모호한 감정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런 릴라의 감정을 나름대로 정리해보려 했다.
그러다보니 정말 오랜만에 릴라가 자기 딸에게 어린 시절 내가 애지중지하던 내 인형의 이름을 붙였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물론순전한 우연이었다. 하지만 가장 무의미한 것 같은 사건 속에는 한번 발을 내디디면 빠져나올 수 없는 모래늪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법이다. - P633

그 인형은 어린 시절 다른 사람도 아닌 릴라가 제 손으로 창고 속에 내던진 바로 그 인형이었다. 내가 그 일을 두고 생각에 잠긴 것은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래 생각하지 못하고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는 어두운 우물 앞에서 나는 끝내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의 깊은 관계 속에는 수많은 덫이 있고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려면 그 덫을 피하는법을 배워야 한다.
그때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 일로 결국 우리 우정의 빛과 그림자와 릴라의 길고 복잡한 고통을 다시 한번 느꼈을 뿐이다. 그 고통이 여전히 릴리를 괴롭히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는 사실을 또다시 깨달았을 뿐이다. - P633

릴라는 뛰어난 지성과 놀라운 기억력과 평생에 걸쳐 방대한 양의 책을 읽었는데도 (가끔 내게 책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내게 자기가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숨겼다) 기본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데다 서술가로서 갖춰야 할 능력이 없었다. 나는 릴라의 글이 너무나 좋은 글들을 그저 산만하게 모아놓은 것에 불과할까봐 두려웠다. 경이로운 문장을 잘못된 곳에 배치했을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맹세컨대 나는 단 한 번도 릴라가 상투적인 문구로 가득 찬하찮고 별 볼일 없는 글을 쓸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니 나는 릴라가 뛰어난글을 쓸 거라고 절대적으로 믿었다. - P635

릴라의 집착은 때에 따라 온도차가 있었다. 한번은 내 명성을 트집 잡아 악의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이름 하나에 딸린 이야기가 너무 많아. 유명하는 유명하지 않는이름이란 결국 피와 살과 말과 똥과 하찮은 생각으로 가득 찬 자루를 묶고 있는 끈에 불과해."
릴라는 이름 이야기로 나를 한참 놀려댔다.
"엘레나 그레코라는 끈을 푼다고 그 자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그 기능은 변하지 않아. 물론 그전보다 엉망이 되겠지. 특별히 장점이랄 것도 단점이랄 것도 없이 망가져갈 거야."
릴라는 기분이 특별히 우울할 때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이름이라는 매듭을 풀어 버리고 싶어. 풀어서 내다버리고 싶어. 잊어버리고 싶어." - P639

릴라는 평소에는 그보다 평온했다. 나는 가끔 릴라가 자기가 쓰고있는 글에 대해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럴 때마다릴라는 여전히 글을 쓴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왠지 릴라가 한참 창작에 열중하다 내 전화 때문에 놀란 것 같은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전화를 걸었는데 그날 릴라는 마침 딱기분 좋을 정도로만 정신이 나가 있었다. 릴라는 모든 위계질서를부정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어. 주사위를 던졌는데우연히 좋은 숫자가 나온 것과 다를게 없는 것 같아."
평소 릴라가 하던 말과 별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날따라 릴라는 정확한 어휘력과 창의력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나는 릴라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느꼈다.  - P639

그해 12월은 정말이지 즐거웠다. 나는 58세에 벌써 할머니가 됐다. 나는 하미드를 품속에 꼭 껴안았다. 크리스마스 저녁, 나는 하미드를 안고 한쪽 구석에 앉아 평온한 마음으로 내 딸들의 젊고 활기넘치는 육체를 바라보았다. 셋 다 나를 닮기도 했고 전혀 닮지 않기도 했다. 아이들의 삶은 내 삶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그 아이들은 내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고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생각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포기하고 멈춰설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고향을 떠났다가돌아갔다가 다시 떠나왔다. 그 무엇도 나를 내가 낳은 내 딸들과 함께 나락에 빠뜨리지 못했다.
우리 넷은 이제 안전했다. 나는 세 딸 모두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다. 이제 그 아이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살면서 다른 언어를 쓴다. 아이들에게 이탈리아는 휴가기간에나 잠시 머무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찬란한 장소이자 하찮고 비효율적인 곳이기도 하다. - P641

나는 하미드를 어루만지면서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나보다 훨씬 뛰어난 내 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나와같은 어려움은 한 번도 겪지 않고 살아온 내 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64 b아이들은 나로서는 아직까지 감히 생각조차 못하는 태도와 목소리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자의식으로 충만하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내 딸들과 같은 행운을 가진 것은 아니다. 부유한 국가에 만연한 평범함 속에는 부유하지 않은 세계의공포가 내재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공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폭력이 우리들의 도시와 일상에 침투하면 그제야 흠칫 놀라며 불안해했다. - P642

지난해 텔레비전에서 성냥을 가볍게 부딪혀 불을 붙이듯 비행기들이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불을 붙이는 장면을 보고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데데와 엘사, 피에트로와 한참 동안 통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보다 아래에 있는 세계에는 지옥이 있다. 딸들도 그것을 알기는 하지만 글로만 배웠을 뿐이다. 딸들은 분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누릴 수 있을 때까지 삶의 기쁨을 누린다. 아이들은자신들의 안락한 삶과 성공을 제 아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그 어떤 특권도 누려본 적이 없는 나야말로 아이들이 성공한 근원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무엇인가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마 딸들이 쾌활하게 각자의 파트너를 내 책을 꽂아둔 책장 앞으로이끌었을 때였던 것 같다. 내 딸들 가운데 누구도 내 책을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내 딸들이 내 책을 읽는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딸들에게서 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도 없었다. - P642

그랬던 딸들이 그때만큼은 책을 꺼내 책장을 뒤적이기도 하고 몇 문장을 큰 소리로 낭독하기도 했다.
그 책들은 내가 살아온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글이었다. 나에게 영감을 주고 나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을 바탕으로 쓴 글이었다. 나는 나의 시대를 한 걸음 한걸음씩 걸어오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유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악행을 지적했고 사람들을 악행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끝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사회 구제방안을 예측하고 제시했다. 일상적인 어휘로 일상을 표현했다. 나는노동과 계급투쟁, 페미니즘과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내 딸들이 그때 내 글을 되는대로 골라서 읽는 것을 듣고 있으니 당황스러웠다. - P643

엘사는 은근히 비아냥조로 내 데뷔작과 남성이 주조한 여성에 대한글,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낭독했다. 데데만 해도 엘사보다는 나를 더 존경했고 임마는 더 신중했다. 엘사는 글의 결점과 과한 부분, 과도한 감탄사를 연발한 부분과 지난날 내가 부정할수 없는 진실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고루해진 사상을 목소리로교묘하게 부각했다. 특히 엘사는 어휘를 짓궂게 물고 넘어졌다. 엘사는 유행이 지나서 지금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단어를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
저 아이는 내 앞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나폴리에서 흔히 그러했듯 애정을 담아 사람을 놀리고 있는 건가. 엘사의 말투는분명 나폴리에서 익힌 것이었다. 하지만 한 줄 한줄 읽어나가는 동안 엘사는 번역본들과 함께 가지런히 꽂혀 있는 내 모든 작품의 하찮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P643

나는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릴라와의 통화를 최대한 피했다.
이제는 릴라가 ‘내가 쓴 글을 좀 읽어봐 줘 몇 년 동안 작업한 결과야, 메일로 보내줄게‘라고 말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릴라가 정말 그렇게 말할까봐 두려웠다. 정말 두려웠다. 릴라가 내 전문 분야에 불쑥 침입해 작가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공허하게 만들 경우 내가어떻게 대응할지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분명 「푸른 요정」을 읽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릴라의 글을 출간할 것이다.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모든방법을 총동원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짝꿍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정체성이 확고한 어엿한 성인이었다. 나는 릴라 스스로때로는 농담 삼아, 때로는 진심으로 반복해 말했던 것처럼 ‘라파엘라 체룰로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그레코‘였다.  - P645

지금은 내게 속한 그 무엇도 세월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내 작품들은 비교적 빨리 빛을 보았고 그 알량한 행운 덕에나는 수십 년 동안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왔다. 갑자기 그 환상이 희미해졌고 이제는 내 작품이 중요한 것같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릴라의 인생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릴라는 자기 부모님이 살던 집에 틀어박힌 채 도무지 내용을 예측할 수 없는 생각과 느낌으로 컴퓨터를 채워가면서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할머니가 다 된 지금이나 아니면 죽은 후에라도 예전에 릴라가 그저 자루를 묶는 끈에 불과하다고 했던 릴라의 이름이단 하나의 위대한 작품으로 영원히 남을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나처럼 수백만 페이지의 글을 쓰거나 내가 내 책으로 누렸던 성공을만끽하지는 못하겠지만 릴라의 책은 시간을 이겨낼 것이다. 수백 년동안 수많은 사람이 릴라의 책을 읽고 또 읽을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허비해버린 나와는 달리 릴라에게는 아직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내 운명은 질리올라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지만 릴라는 아니었다. - P648

또박또박 자기표현을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티나 생각이 났다. 기분이 특히 우울할 때면 릴라가 자기 딸에 대해 자세히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릴라가 교육받지 못한 사람 특유의 오만한 순진함으로 티나 이야기와 나폴리 이야기를 뒤섞었을 것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놀라운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이내 모든 것이 내 상상일 뿐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안과 질투와 증오와 애정을 더하고 있었다. 릴라에게는 그런욕망이 없었다. 릴라에게는 평생 욕망이 없었다. 자기 이름을 연관지을 만한 계획을 세우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릴라는 내게 자기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에게 좋아할만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 P649

그럴 때면 나는 애초에 릴라의 원고는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그럴 것이라고 확신하곤 했다. 나는 지금까지 릴라를 과대평가했다.
릴라에게서 영원히 기억될 만한 것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런 생각을하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릴라를 사랑했다. 릴라가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릴라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은 나여야만 했다. 그것이 내 임무라고생각했다. 나는 어린 시절 릴라가 직접 내게 그런 과제를 주었다고 확신했다. - P650

나중에 『어떤 우정』이라는 제목을 붙인 소설은 내가 가벼운 우울증에 빠져 있던 그 시절 나폴리에서 탄생했다. 그때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었다. 물론 나는 그 글이 릴라와 내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에 위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릴라가 내 행동을 참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과만 좋으면 결국 릴라가 내게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고마워. 나 스스로에게조차 말할 용기가 없었는데 네가 대신 내이름으로 말해주었어."
이른바 예술가, 특히 문학가들은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우리는 그 누구에게서도 그 어떠한 권리도 위임받지 못했는데 마치 위임받은 것처럼 작업을 착수한다.  - P650

릴라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두려운 마음에 그러지 못했다. 릴라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고향동네 사람들과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을 쓰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내가 그럴 때마다 릴라는 고통스러울지라도 기어코 내 책이 형편없다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무질서함까지 고스란히 담아 현실을있는 그대로 들려주든지 아니면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의 가닥을새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나는 릴라에게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번에도 결국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릴라는 내 이야기를 탐탁지 않아 할 테고 내게 내색하지 않다가 몇년 후에야 내게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내게 이보다는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가라앉혔다. - P651

어느릴라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나를 소외시키고 나를 벌하고 좋은 작품을 썼다는 만족감까지 손상시켰다.
나는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자기삭제를 연출하는 행위도 이제 내게 걱정보다는 분노를 자아냈다. 아마 어린 티나와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네 번째 생일을 앞둔 아이의 모습으로, 가끔은 현재 임마처럼 30세의 다 큰 여인의 모습으로 릴라를쫓아다니는 티나의 유령과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오직 그리고 영원히 우리 둘만의 문제일 것이다.
타고난 천성과 자신이 처했던 환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것을 내가 이루기를 바랐던 릴라와 그런 릴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화가나서 나에게 복수하기위해 나도 자기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릴라와 수개월동안 쓴 글로 그런 릴라에게 경계가 해체되지 않은 형태를 만들어주고 릴라를 이겨내 릴라에게 평안을 찾아주고 그로써 나도 평안을 찾으려 하는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 P654

나 자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영원히 끝내지 못할 것 같았던 이이야기를 끝마친 것이다. 이야기를 완성한 후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글을 꼼꼼하게 다시 읽어 보았다. 글을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 몇 줄이라도 릴라가 내 글에 들어와 글에 이바지한 흔적이 없는지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내 이 기나긴 글이 오롯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릴라는 종종 내 컴퓨터에 침입하겠다고 나를 위협하곤 했지만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마 애당초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네트워크니 케이블이니 연결이니 전자세계의 요정들이 벌이는 일에 대해 무지한 늙은 여인의 오랜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을 것이다.
내 글에 릴라는 없었다. 내가 글로 쓸 수 있었던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릴라가 어떤 글을 어떻게 쓸지를 상상하다보니 내 글과릴라의 글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 P657

그러니 이 긴 글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릴라를 다시붙잡고 싶었다. 내 곁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내가 해낸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가끔 릴라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혼자 되묻곤 한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걸까. 오직 릴라만 아는 지하 터널이나 갈라진 틈 사이로들어가버린 걸까. 강력한산을 가득 채운 오래된 욕조 속에 들어간걸까. 아니면 내게 공들여 설명해주었던 예전에 쓰레기 폐기장으로쓰이던 ‘석탄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버린 걸까. 산속 깊이 버려진 작은 성당의 납골당에 있는 걸까. 우리는 아직 모르지만 릴라는 알고있는 다른 수많은 차원 가운데 하나의 세계에서 자기 딸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 릴라는 돌아올까. 늙은 릴라와 다 큰 어른이 된 티나가 함께 돌아올까. 오늘 아침, 포 강이 마주보이는 작은 발코니에 앉아나는 기다려 본다. - P661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릴라는 나를 속였던 것이다. 우리의 우정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나를 제멋대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평생 ‘내‘ 육체와 ‘내‘ 존재를 빌려 자신의 구원을 이야기한 것이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반세기 이상이 걸려 토리노까지온 그 두 인형은 릴라가 잘 지내고 있으며 나를 사랑하고 이제 드디어 틀을 깨고 세계 일주를 할 생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지난날 릴라의 세계만큼 작아진 세계를 여행하며 새로운 진실에따라 젊은 시절 다른 사람들 때문에 또는 자기 자신 때문에 누리지못했던 삶을 살아가면서 늙어갈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나는 두 인형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는 인형들을 내 책등에 기대어 놓았다. 보잘것없고 못생긴 인형들을 바라보고 있으니혼란스러워졌다. 소설과는 달리 진짜 인생은 일단 지나간 후에는 명확해지기보다 모호해지는 법이다. 릴라가 이토록 명확하게 자신을드러냈으니 이제 다시는 릴라를 보지 못해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 P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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