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은 정말 높은 자리에 올랐지."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니노의 눈빛에서 나를 자기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그의 말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읽어냈다. 니노는 자기가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책이 성공은 했지만내가 탄원자로서 니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니노는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것 같았다. ‘넌 나 같은 남자를 놓친거야.‘ 나는 임마와 함께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 자리에 내가 아닌 릴라가 있었다면 니노의 태도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는 릴라에게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끼고 말을 웅얼거렸을 것이다. 그렇게 허풍을떠는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 P563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니노가 자신의 야망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사랑했던 사람은 릴라뿐이었다. 이스키아 섬에서, 그 후 일 년간 니노는 골치 아플 것이 뻔한 위험에 몸을 내맡겼다.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니노는 이미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디아와 사귄 이유도 나디아가 갈리아니 선생님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만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보다 상류사회인 것 같은 환경으로 진입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니노의 선택은 언제나 니노의 야망과 연관이 있었다. 엘레오노라와 결혼한 것도 그만큼 얻는 게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나 역시 니노 때문에 피에트로와 헤어졌을 때 중요한 출판사와 연관이 있었고 어 - P563
느 정도 자리를 잡은 성공한 작가가 아니었던가. 그런 내 배경은 니노의 경력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니노를 도와준 다른 여자들도 결국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물론 니노는 여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선호했다. 니노의 지성이 만들어낸 산물은 소년 시절부터 그가 정밀하게 짜온 권력의 그물망 없이는 스스로 빛을 발할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릴라는 어떠한가. 릴라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데다 상점 주인의 젊은 아내일 뿐이었다. 스테파노가 릴라와 니노의관계를 눈치챘다면 둘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니노는 왜 릴라와의 사랑에 자기 미래를 걸었던 걸까. - P564
나는 임마를 차에 태우고 아빠를 보러 간다고 마음먹고 사준 새옷에 아이스크림을 흘린 임마를 야단쳤다. 나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로마를 떠났다. 지난날 니노가 릴라에게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니노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없는 어떠한 것을 릴라에게서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 순간 니노는 릴라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그 사실을 확인했을 것이다. 릴라는 지적이었지만 이를 활용해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란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부인처럼 자신의 지성을 허비했다. 니노는 바로 릴라의 이런 점, 즉 대가를 바라지 않는릴라의 지성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릴라의 특성은 다른 수많은 여성과 차별되는 것이었다. 릴라는 그 어떠한 가르침이나 필요 또는 목적에 굴복하지 않았다. 릴라를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는 무언가에 굴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시험과 실패와 성 - P564
공을 겪고 나서 우리 자신을 현실에 알맞게 재조정했다. 릴라는 달랐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릴라를 바꾸지 못한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릴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제멋대로인 데다 우매해지고 있지만 우리가 릴라에게 부여한 능력은 변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해질 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릴라를 증오하다가도 결국 릴라를 존중하고 두려워하게 되곤 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면 나디아가 몇 번 만나지도않은 릴라를 싫어하고릴라를 해코지하고 싶어 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릴라는 나디아에게서 니노를 빼앗았고 혁명에 대한 나디아의 신념을 비웃었다. 릴라는 못된 데다 자신이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공격할 줄 알았다. - P565
릴라는 구제받고 싶어 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였다. 다시 말하면 나디아에게 릴라는 존경할만한 적이었고 그런 릴라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나디아에게 순수한 만족감을 줄 것이었다. 릴라에게 해코지를 하면서 파스콸레처럼 한 명을 마음먹고 희생양을 삼을 때와 같은죄책감은 느끼지 않을 터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비참해졌다. 갈리아니 선생님도 나폴리 만이 내려다보이던 선생님의 집도, 수많은 장서도, 그림도, 선생님과 나누었던 수준 높은 대화도, 아르만도도, 그리고 나디아까지. 나디아는 처음 학교 앞에서 니노 곁에 있었을 때만 해도, 부모님의아름다운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나를 맞이했을 때만 해도 정말 사랑스럽고 예의 바른 소녀였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훨씬 더 빛나는 옷을 입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자신이 누리던 수많은 혜택을내려놓았을 때까지만 해도 나디아에게는 특별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 P565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모든 혜택을 벗어던졌던 고귀한 이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나디아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토록 아둔하게 수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한 끔찍함과 모든 잘못을 벽돌공에게 돌리는파렴치함뿐이었다. 나디아가 한때 신인류의 선봉이라고 여기던 파스콸레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나폴리를 향해 운전하는 내내 데데를 생각했다. 나는 데데가 나디아와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본모습을 잃게 하는 그런 실수 말이다. 7월 말이었다. 바로 전날 데데는 최고 점수로 졸업시험에 합격했다. 데데는 아이로타 집안의 일원이었다. 데데는 내 딸이었다. 그렇게 똑똑하니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곧 있으면 데데는 나를 넘어설 것이다. 제 아빠도 마찬가지다. 내가 힘들게 노력하고 운이 좋아 이루어낸 모든 것을 데데는 마치 타고난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너무나 쉽게 성취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566
그런 데데의 계획은 무엇인가. 겨우 리노에게 고백이나 하는 것이다. 리노와 함께 침몰하는 것이다. 정의감과 연대감, 우리와는 다른어떠한 매력에 취해 자신이 누리는 모든 혜택을 포기하는 것이다. 데데가 허구한날 불평만 늘어놓는 리노에게서 대체 어떤 특출한 면을 보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백미러로 임마를 바라보면서 불쑥 물었다. "너는 리노가 좋으니?" "난 별로예요. 리노는 데데 언니가 좋아하죠." "어떻게 알아?" "엘사 언니가 말해줬어요." - P566
"엘사 언니한테는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데데 언니요." "너는 왜 리노가 싫어?" "너무 못생겼거든요." "그럼 너는 누가 좋은데?" "아빠요" 나는 순간 임마의 눈에서 불꽃을 보았다. 그 불꽃은 임마가 조금전에 세 아빠에게서 본 것이었다. 니노가 릴라와 나락에 빠졌다면절대로 가지지 못했을 불꽃이었다. 파스콸레와 나락에 빠짐으로써 나디아가 영영 잃어버린 불꽃이었다. 리노를 따라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데데도 그 불꽃을 잃어버릴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자기 딸이 파스콸레 무릎에 앉는 것을 보고 갈리아니 선생님이 느꼈을 불쾌감을이해할 수 있었고 그런 태도가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릴라를 버리기로 결정한 니노가 이해되고 타당하게 느껴졌다. 솔직히말하면 자기 아들과 나의 결혼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시어머니가 이해되고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P567
엔초는 리노나 리노가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가 아니라 티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몇 년 살다가 죽으면 죽는 거야. 그걸로 끝이지. 언젠가는포기하게 돼. 하지만 아이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러고서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면 살면서 그 무엇도 아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게 돼. 티나는 돌아올까 아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까? 돌아온다면 살아서 돌아올까 아니면 죽어서 돌아올까?" 엔초가 속삭였다. "매 순간 티나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묻곤 해. 거리에서 집시처럼구걸하고 있으려나? 슬하에 아이가 없는 부잣집으로 들어간 걸까? 사람들이 아이에게 몹쓸 짓을 시킨 다음 그 장면을 찍어서 사진이나영상으로 팔지는 않을까? 아이를 갈가리 찢어 다른 아이의 가슴에넣으려고 티나의 심장을 비싼 가격으로 팔아넘긴 건 아닐까? - P575
만약그랬다면 티나의 나머지 부분은 땅에 묻혔을까? 아니면 태워버렸나? 그도 아니면 납치됐다가 사고로 죽어버려서 통째로 땅에 묻힌걸까? 만약 흙이나 불이 티나의 몸을 갉아먹은 것이 아니라면, 티나가 어디에선가 잘 자라고 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 변할까? 길에서 마주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설령 알아본다 한들 티나가 사라짐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잃은 것을 누구에게서 돌려받을 수 있을까? 티나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어린 티나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누가 우리에게 알려줄까?" 엔초가 평소처럼 힘겹게 그렇지만 진중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눈물 맺힌 그의 눈을 보았다. 그제야 나는 엔초가릴라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려고 한 - P575
다는 사실을 알았다. 엔초와 함께한 여행은 의미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엔초보다 감수성이 섬세한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엔초는 지난 4년 동안 릴라가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에게 속삭이거나 악을 쓰면서 한 이야기를들려주었다. 그러다 서서히 내가 내 일과 내 불만에 대해 이야기할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엔초에게 딸들 문제와 책, 남자 문제, 시시때때로 밀려드는후회와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글 쓰는 일이 이제는 의무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나를 실력 없고 무례한 별볼일 없는 여자 취급하는 사람들과 싸우느라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 P576
"그 사람들은 오직 내게서 독자들을 빼앗으려고 나를 괴롭혀 원가 심오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그저 내가 발전하는게 싫어서 그러는거야. 자기들과 자기 애제자들을 보호하려고 보잘것없는 권력을 동원해 내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이야." 엔초는 내가 감정을 쏟아내도록 내버려두었다. 엔초는 내가 모든일에 열정을 보인다고 칭찬했다. "봐. 너는 매사에 열정적이잖아. 그렇게 열심히 사니까 네가 선택한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거야. 그렇기 때문에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거야. 무엇보다도 이 열정에 네 모든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너는 삶의 흐름에 떠밀려 갈 수 있는 거야. 물론 티나에게 일어난 일은 네게도 끔찍하겠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슬픈거야. 하지만 그 일은 이제 네게 먼 과거일 뿐이야. 릴라는 아니야. 지난 몇 년 동안 릴라의 세계는 떠도는 풍 - P576
문처럼 무너져 내려 티나가 남기고 간 공백 속으로 쓸려들어가 버렸어, 빗물이 홈통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말이야. 릴라의 삶은 티나에게서 멈췄어. 그래서 릴라는 티나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살아숨 쉬고 성장하고 번영하는 모든 것을 증오하는 거야." 엔초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릴라는 강해. 나를 막 대하고 네게 화를 내고 못된 말을 해. 하지만 멀쩡하게 설거지를 하거나 창밖으로 큰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던 적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 P577
나는 일에 치여서 한 번도 릴라의 새로운 열정에 대해 이야기를나눌 시간도 의지도 갖지 못했다. 릴라는 릴라대로 내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릴라가 어떤 일에 흥미를 느끼면 집착 수준으로 집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릴라가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게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다만 엔초와 고함을 치면서 한바탕 싸우고 난 다음 릴라가 사라지고 밤늦도록 도시를떠도는 릴라 위에 티나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면 조금 걱정이 됐다. 그럴 때면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나폴리의 지하 터널과 망자의 머리가 겹겹이 줄지어 놓여 있는 지하 묘지가 떠올랐다. 방문객을 불행한 영혼들의 세계로 인도하는 푸르가토리오 아르코 성당의 까맣게 변색된 청동 해골 상들이 떠올랐다. - P593
나는 다시 니노를 찾았다. 마리사에게서 니노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며 니노가 자기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긴 했다. 그러나 니노는 임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간접적으로나마 릴라에게 자기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서인지 내 부탁에는 바로 응해주었다. 하지만 니노마저 엔초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니노는 몇 번에걸쳐 몇 가지 가정을 들려주기는 했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신빙성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확실한 것은 나디아가 흐느끼며 자백할 때 엔초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앤초와 파스콸레가 트리부날리 가에서 열린 노동자와 학생들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었던 일을 폭로했다는 사실이다. 까마득히 먼 옛날 만초니 가에 있는 나토군 장교들의 사유지 앞에서 있었던 소규모 시위들에 대한 혐의를 엔초와 파스콸레에게 돌렸다는 사실이다. - P594
조사관들은 분명 파스콸레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범죄에 엔초도 연루된 것으로 몰고 가려 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일 뿐 그다음부터는 모든 일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나디아는 엔초가 비정치적인 성격의 범죄를 위해 파스콸레의 힘을 빌렸다고 증언했을 것이다. 아마 나디아는 브루노소카보의 살인을 포함한 몇몇 살인사건을 엔초가 기획하고 파스콸레가 실행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아마 나디아는 파스콸레에게서 직접 솔라라 형제를살해한 범인이 파스콸레와 안토니오 카푸초와 엔초 스칸노였다는말을 들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세 친구가 오랜 유대감과 그에 못지않게 해묵은 원한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 P595
복잡한 시대였다. 우리가 성장했던 세계의 질서가 사라지고 있었다. 올바른 정치 노선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며 습득한기존의 능력이 언젠가부터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자니 마르크스주의자니 그람시 추종자니 공산주의자니 레닌추종자니 트로츠키 추종자니 마오쩌둥 추종자니 노동자니 하는 표현들은 어느덧 한물간 구호나 심한 경우 야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취급당했다. 지난날 혐오의 대상이었던 타인에 대한 착취와 최대 이윤추구의 법칙이 지금은 장소를 불문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국가와 혁명 조직 내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으로 혹독하게 정산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너무나 허무하게 살해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평범한 사람들마저 우르르 떼를 지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니노나 아르만도 같은 사람들은 벌써 오래전부터 기류의 변화를감지하고 새로운 시기에 재빨리 적응했다. 그렇게 해서 니노는 국회 - P595
에 자리를 잡았고 아르만도는 방송 덕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주변사람들에게서 현명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던 나디아 같은 사람들은눈물 고백으로 양심 세탁을 했다. 파스콸레와 엔초 같은 사람들은 달랐다. 나는 그들이 여전히1960년대와 70년대에 배웠던 좌우명에 따라 생각하고 그러한 자기신념을 표현하고 공격하고 방어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파스콸레의 투쟁은 감옥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정부의 끄나풀에게 다른 사람을 고발하지도 않았고 변변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파스콸레와는 달리 엔초는 분명 뭔가를 말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를 계산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자신의 모든 혐의를 부정했을 것이다. - P596
릴라는 나름대로 자신의 뛰어난 지력과 못된 성격과 비싼 변호사들을 총동원해 엔초를 곤경에서 구해내기 위한 싸움에 전력을 다했다. 엔초가 전략가라고? 투사라고? 수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베이직 사이트에서 일하면서 대체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솔라라 형제가 살해당했을 때 엔초는 아벨리노에, 안토니오는 독일에 있었는데 어떻게 셋이 함께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세 친구가 솔라라 형제를 살해했다 할지라도 삼총사는 고향 동네에서 워낙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얼굴을 감춘다 해도 동네사람들은 이들을 바로 알아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주장해봤자 소용없었다. 정의의 수레바퀴는 계속굴러갔고 나는 이러다 릴라까지 체포될까봐 두려웠다. 나디아의 입에서는 계속 새로운 이름이 튀어나왔다. 경찰은 트리부날리 가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을 몇 명 더 체포했다. 그 가운데에는 유엔 식량농업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 - P596
다. 경찰은 에넬사의 기술자와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잘 살고 있는아르만도의 전 부인 이사벨라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나디아가 건드리지 않은 사람은 단 두 명, 자기 오빠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릴라였다. 아마 갈리아니 선생님의 딸은 엔초를 끌어들임으로써 이미 릴라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릴라를증오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존경했기 때문에 오랜 망설임 끝에 릴라를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믿고 싶은 것은 나디아가 티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파 릴라를 자기 일에 연루시키지 않기로 했다는 가정이었다. 아니 나디아는 그보다 어머니로서 그런 일을 겪은 이상 릴라가 다른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 P597
엔초의 혐의는 서서히 실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의는 전투력을 상실하고 기운을 잃었다. 수개월동안 제대로 따져본 결과 엔초가 저지른 일이 별일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파스콸레와 오랜 친구사이라는 사실과 산 조반니 아 테두초에서 노동자와 학생들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했었다는 사실 그리고 파스콸레가 숨어 있던 세리노산의 허름한 산장을 아벨리노에 사는 엔초의 친척 이름으로 임대했다는 것 정도가 사실로 판명되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엔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테러리스트 집단의 두목이자 야만적인 범죄의 기획자이자 집행인에서 일개 테러활동 지지자에 지나지 않는 걸로 밝혀졌다. 그 지지마저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한 개인의 의견일 뿐 그것이 한 번도 범죄행위로 발전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자 엔초는 집으로 돌아왔다. - P597
마리아로사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내린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평가는 사실로 드러났다. 아이로타 교수를 둘러싸고 휘몰아쳤던 언론의 광풍은 조금씩 수그러들었고 시아버지는 다시 자기 서재 안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가 법적으로는 결백하지만실은 분명 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죄인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 결백할 거라고 생각했다.이미상황이 이 정도로 진정된 다음에야 나는 시어머니에게 전화해도되겠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내 배려에 고마움을 표했다. 시어머니는 데데와 엘사의 생활과 학업에 대해 나보다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어머니가 말했다. "이 나라는 말도 안 되는 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곳이야.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은 서둘러 이민을 가는 게 나아." - P610
솔직히 릴라는 니노의 운명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니노가 법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소식에 릴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릴라는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줄 만한 일이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니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브루노 소카보에게 손을 벌렸지. 분명 한 푼도 돌려주지 않았을 거야." 릴라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빤히 보인다고 했다. "니노는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악수하면서 자기가 최고로 잘난줄 알았을 거야.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을 거야. 죄를 저질렀다면 분명 사람들이 자기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을 거야. 제일 똑똑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언제나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렇게 했을 거야." 그게 다였다. 그런 다음부터 릴라는 니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 P612
어찌됐든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엄마에게 한마디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핵심이 명확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리나 이모는 네게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구나. 엄마는좋아. 리나 이모가 뭔가에 빠지면 이모를 말릴 사람이 없지. 그렇다고 사람들이 가볍게 나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더구나 그 대상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나 상원위원이나 은행가들이나 카모라라면 말이다. 세상 일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으레 한때는 상황이 좋아졌다가 안 좋아졌다가 때가 되면 다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우리는 항상 열심히 노력해야 한단다. 우리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해. 실수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임마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P621
나는 엄마의 말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사실 내 딸은 내가 자기아빠에게 못되게 굴었으며 자기 아빠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내가 몰랐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정작 내게 예기치못한 영향을 미친 것은 ‘엄마는 책을 쓰지만 리나 이모 같은 선견지명은 없다‘는 말이었다. 임마의 말 때문에 나는 딸이 보기에 선견지명이 있는 여인인 릴라가 50세가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책을 읽고공부를 하고 글까지 쓴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피에트로는 예전에 그런 릴라의 행동을 티나가 사라짐으로써 생긴 괴로움을 잊기 위한 일종의 자가치유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향에서 보낸 마지막 일 년 동안 나는 피에트로의 세심한 의견 - P623
릴라는 말을 얼버무렸다. 내게는 좀처럼 마음을 털어놓으려 하지않았다. 하지만 가끔 릴라답게 갑자기 흥분해서 나폴리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폴리가 평범한 길과 일상적인 장소로만 만들어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나폴리는 오직 릴라에게만 자신의 비밀스러운 광채를 드러낸 것 같았다. 릴라는 몇 마디안 되는 문장만으로 나폴리를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바꾸어 놓았다. 릴라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일을 시작할 때면 영감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폴리에서 태어나 살면서 나폴리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큰 태만이었다. 나는 이제두 번째로 나폴리를 떠나려 하고 있다. 내 인생의 전성기 삼십 년을여기서 보내고도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피에트로가 나의 무지를 비난했었는데 지금은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릴라의 말을 듣다보면 나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 P624
릴라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다른 생각을 가슴속에 품어왔을까. 지금은 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릴라의 눈치아티나가 나의 임마콜라타 대신 납치됐다니 자기 딸이 납치된 게 내 성공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엄마에게 그토록 애정을 보인 것도 불안한 마음에임마를 지키고 보호해주고 싶어서였던 것일까. 티나의 납치범들이실수로 데려간 아이를 내다버리고 원래 납치하려던 아이를 데리러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또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릴라의 머릿속에는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일까. 자신을 떠나려는 내게 벌로 마지막 독을 부어넣으려는 것일까. 아, 엔초가 왜 릴라를 떠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릴라와 사는 것이 너무나 끔찍해졌던 것이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눈치챈 릴라는회피하듯 요즘 자기가 읽고 있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P631
하지만 말에 두서가 없었고 얼굴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릴라는웃으면서 아픔이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법이라고 중얼거렸다. 성당이나 수도원이나 책으로 가리려고 해도 소용없어. 책이 정말 중요한 것 같지? 그러니 너도 책에 네 평생을 바쳐왔겠지. 그래봤자 소용없어. 악은 결국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바닥을 뚫고 기어 나오16-458는 법이야." 릴라는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티나와 엄마와 나에 대한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회유적인 말투였다. 조금 전 자기가한 말에 대해 내게 사과하고 싶은 것 같았다. 릴라가 말했다. "사방이 너무나 고요할 땐 별 생각이 다 떠오르곤 해. 너무 신경쓰지 마. 모든 사람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올바른 말을 하고, 모든일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고, 호감과 비호감,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은 형편없는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야" - P632
릴라가 속삭였다.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티나가 돌아올 수 있어. 그러면 지금까지일어난 일은 아무 상관없어. 중요한 건 티나가 다시 이곳에 있다는사실이야. 정신을 딴 데 팔았던 엄마를 용서해주는 거야." 릴라가 말했다. "너도 나를 용서해." 릴라가 나를 껴안으면서 그날의 대화를 끝맺었다. "어서 떠나. 가서 지금까지 해온 일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하도록해. 내가 임마 곁에 있었던 것은 누가 그 애를 데려가 버릴까봐 겁이나서이기도 했어. 너는 너대로 네 딸이 리노를 버렸는데도 변함없이 - P632
리노를 사랑해줬지. 리노 때문에 많이 참았다는 거 알아. 고마워. 우리가 이토록 오랫동안 친구였고 지금도 친구여서 정말 기뻐."
티나가 내 딸인 줄 알고 납치했을지도 모른다는 릴라의 생각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릴라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게 된 복잡하게 뒤엉킨 모호한 감정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런 릴라의 감정을 나름대로 정리해보려 했다. 그러다보니 정말 오랜만에 릴라가 자기 딸에게 어린 시절 내가 애지중지하던 내 인형의 이름을 붙였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물론순전한 우연이었다. 하지만 가장 무의미한 것 같은 사건 속에는 한번 발을 내디디면 빠져나올 수 없는 모래늪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법이다. - P633
그 인형은 어린 시절 다른 사람도 아닌 릴라가 제 손으로 창고 속에 내던진 바로 그 인형이었다. 내가 그 일을 두고 생각에 잠긴 것은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래 생각하지 못하고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는 어두운 우물 앞에서 나는 끝내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의 깊은 관계 속에는 수많은 덫이 있고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려면 그 덫을 피하는법을 배워야 한다. 그때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 일로 결국 우리 우정의 빛과 그림자와 릴라의 길고 복잡한 고통을 다시 한번 느꼈을 뿐이다. 그 고통이 여전히 릴리를 괴롭히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는 사실을 또다시 깨달았을 뿐이다. - P633
릴라는 뛰어난 지성과 놀라운 기억력과 평생에 걸쳐 방대한 양의 책을 읽었는데도 (가끔 내게 책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내게 자기가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숨겼다) 기본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데다 서술가로서 갖춰야 할 능력이 없었다. 나는 릴라의 글이 너무나 좋은 글들을 그저 산만하게 모아놓은 것에 불과할까봐 두려웠다. 경이로운 문장을 잘못된 곳에 배치했을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맹세컨대 나는 단 한 번도 릴라가 상투적인 문구로 가득 찬하찮고 별 볼일 없는 글을 쓸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니 나는 릴라가 뛰어난글을 쓸 거라고 절대적으로 믿었다. - P635
릴라의 집착은 때에 따라 온도차가 있었다. 한번은 내 명성을 트집 잡아 악의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이름 하나에 딸린 이야기가 너무 많아. 유명하는 유명하지 않는이름이란 결국 피와 살과 말과 똥과 하찮은 생각으로 가득 찬 자루를 묶고 있는 끈에 불과해." 릴라는 이름 이야기로 나를 한참 놀려댔다. "엘레나 그레코라는 끈을 푼다고 그 자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그 기능은 변하지 않아. 물론 그전보다 엉망이 되겠지. 특별히 장점이랄 것도 단점이랄 것도 없이 망가져갈 거야." 릴라는 기분이 특별히 우울할 때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이름이라는 매듭을 풀어 버리고 싶어. 풀어서 내다버리고 싶어. 잊어버리고 싶어." - P639
릴라는 평소에는 그보다 평온했다. 나는 가끔 릴라가 자기가 쓰고있는 글에 대해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럴 때마다릴라는 여전히 글을 쓴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왠지 릴라가 한참 창작에 열중하다 내 전화 때문에 놀란 것 같은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전화를 걸었는데 그날 릴라는 마침 딱기분 좋을 정도로만 정신이 나가 있었다. 릴라는 모든 위계질서를부정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어. 주사위를 던졌는데우연히 좋은 숫자가 나온 것과 다를게 없는 것 같아." 평소 릴라가 하던 말과 별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날따라 릴라는 정확한 어휘력과 창의력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나는 릴라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느꼈다. - P639
그해 12월은 정말이지 즐거웠다. 나는 58세에 벌써 할머니가 됐다. 나는 하미드를 품속에 꼭 껴안았다. 크리스마스 저녁, 나는 하미드를 안고 한쪽 구석에 앉아 평온한 마음으로 내 딸들의 젊고 활기넘치는 육체를 바라보았다. 셋 다 나를 닮기도 했고 전혀 닮지 않기도 했다. 아이들의 삶은 내 삶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그 아이들은 내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고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생각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포기하고 멈춰설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고향을 떠났다가돌아갔다가 다시 떠나왔다. 그 무엇도 나를 내가 낳은 내 딸들과 함께 나락에 빠뜨리지 못했다. 우리 넷은 이제 안전했다. 나는 세 딸 모두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다. 이제 그 아이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살면서 다른 언어를 쓴다. 아이들에게 이탈리아는 휴가기간에나 잠시 머무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찬란한 장소이자 하찮고 비효율적인 곳이기도 하다. - P641
나는 하미드를 어루만지면서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나보다 훨씬 뛰어난 내 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나와같은 어려움은 한 번도 겪지 않고 살아온 내 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64 b아이들은 나로서는 아직까지 감히 생각조차 못하는 태도와 목소리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자의식으로 충만하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내 딸들과 같은 행운을 가진 것은 아니다. 부유한 국가에 만연한 평범함 속에는 부유하지 않은 세계의공포가 내재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공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폭력이 우리들의 도시와 일상에 침투하면 그제야 흠칫 놀라며 불안해했다. - P642
지난해 텔레비전에서 성냥을 가볍게 부딪혀 불을 붙이듯 비행기들이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불을 붙이는 장면을 보고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데데와 엘사, 피에트로와 한참 동안 통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보다 아래에 있는 세계에는 지옥이 있다. 딸들도 그것을 알기는 하지만 글로만 배웠을 뿐이다. 딸들은 분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누릴 수 있을 때까지 삶의 기쁨을 누린다. 아이들은자신들의 안락한 삶과 성공을 제 아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그 어떤 특권도 누려본 적이 없는 나야말로 아이들이 성공한 근원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무엇인가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마 딸들이 쾌활하게 각자의 파트너를 내 책을 꽂아둔 책장 앞으로이끌었을 때였던 것 같다. 내 딸들 가운데 누구도 내 책을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내 딸들이 내 책을 읽는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딸들에게서 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도 없었다. - P642
그랬던 딸들이 그때만큼은 책을 꺼내 책장을 뒤적이기도 하고 몇 문장을 큰 소리로 낭독하기도 했다. 그 책들은 내가 살아온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글이었다. 나에게 영감을 주고 나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을 바탕으로 쓴 글이었다. 나는 나의 시대를 한 걸음 한걸음씩 걸어오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유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악행을 지적했고 사람들을 악행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끝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사회 구제방안을 예측하고 제시했다. 일상적인 어휘로 일상을 표현했다. 나는노동과 계급투쟁, 페미니즘과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내 딸들이 그때 내 글을 되는대로 골라서 읽는 것을 듣고 있으니 당황스러웠다. - P643
엘사는 은근히 비아냥조로 내 데뷔작과 남성이 주조한 여성에 대한글,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낭독했다. 데데만 해도 엘사보다는 나를 더 존경했고 임마는 더 신중했다. 엘사는 글의 결점과 과한 부분, 과도한 감탄사를 연발한 부분과 지난날 내가 부정할수 없는 진실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고루해진 사상을 목소리로교묘하게 부각했다. 특히 엘사는 어휘를 짓궂게 물고 넘어졌다. 엘사는 유행이 지나서 지금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단어를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 저 아이는 내 앞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나폴리에서 흔히 그러했듯 애정을 담아 사람을 놀리고 있는 건가. 엘사의 말투는분명 나폴리에서 익힌 것이었다. 하지만 한 줄 한줄 읽어나가는 동안 엘사는 번역본들과 함께 가지런히 꽂혀 있는 내 모든 작품의 하찮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P643
나는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릴라와의 통화를 최대한 피했다. 이제는 릴라가 ‘내가 쓴 글을 좀 읽어봐 줘 몇 년 동안 작업한 결과야, 메일로 보내줄게‘라고 말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릴라가 정말 그렇게 말할까봐 두려웠다. 정말 두려웠다. 릴라가 내 전문 분야에 불쑥 침입해 작가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공허하게 만들 경우 내가어떻게 대응할지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분명 「푸른 요정」을 읽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릴라의 글을 출간할 것이다.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모든방법을 총동원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짝꿍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정체성이 확고한 어엿한 성인이었다. 나는 릴라 스스로때로는 농담 삼아, 때로는 진심으로 반복해 말했던 것처럼 ‘라파엘라 체룰로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그레코‘였다. - P645
지금은 내게 속한 그 무엇도 세월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내 작품들은 비교적 빨리 빛을 보았고 그 알량한 행운 덕에나는 수십 년 동안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왔다. 갑자기 그 환상이 희미해졌고 이제는 내 작품이 중요한 것같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릴라의 인생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릴라는 자기 부모님이 살던 집에 틀어박힌 채 도무지 내용을 예측할 수 없는 생각과 느낌으로 컴퓨터를 채워가면서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할머니가 다 된 지금이나 아니면 죽은 후에라도 예전에 릴라가 그저 자루를 묶는 끈에 불과하다고 했던 릴라의 이름이단 하나의 위대한 작품으로 영원히 남을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나처럼 수백만 페이지의 글을 쓰거나 내가 내 책으로 누렸던 성공을만끽하지는 못하겠지만 릴라의 책은 시간을 이겨낼 것이다. 수백 년동안 수많은 사람이 릴라의 책을 읽고 또 읽을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허비해버린 나와는 달리 릴라에게는 아직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내 운명은 질리올라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지만 릴라는 아니었다. - P648
또박또박 자기표현을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티나 생각이 났다. 기분이 특히 우울할 때면 릴라가 자기 딸에 대해 자세히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릴라가 교육받지 못한 사람 특유의 오만한 순진함으로 티나 이야기와 나폴리 이야기를 뒤섞었을 것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놀라운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이내 모든 것이 내 상상일 뿐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안과 질투와 증오와 애정을 더하고 있었다. 릴라에게는 그런욕망이 없었다. 릴라에게는 평생 욕망이 없었다. 자기 이름을 연관지을 만한 계획을 세우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릴라는 내게 자기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에게 좋아할만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 P649
그럴 때면 나는 애초에 릴라의 원고는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그럴 것이라고 확신하곤 했다. 나는 지금까지 릴라를 과대평가했다. 릴라에게서 영원히 기억될 만한 것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런 생각을하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릴라를 사랑했다. 릴라가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릴라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은 나여야만 했다. 그것이 내 임무라고생각했다. 나는 어린 시절 릴라가 직접 내게 그런 과제를 주었다고 확신했다. - P650
나중에 『어떤 우정』이라는 제목을 붙인 소설은 내가 가벼운 우울증에 빠져 있던 그 시절 나폴리에서 탄생했다. 그때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었다. 물론 나는 그 글이 릴라와 내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에 위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릴라가 내 행동을 참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과만 좋으면 결국 릴라가 내게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고마워. 나 스스로에게조차 말할 용기가 없었는데 네가 대신 내이름으로 말해주었어." 이른바 예술가, 특히 문학가들은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우리는 그 누구에게서도 그 어떠한 권리도 위임받지 못했는데 마치 위임받은 것처럼 작업을 착수한다. - P650
릴라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두려운 마음에 그러지 못했다. 릴라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고향동네 사람들과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을 쓰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내가 그럴 때마다 릴라는 고통스러울지라도 기어코 내 책이 형편없다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무질서함까지 고스란히 담아 현실을있는 그대로 들려주든지 아니면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의 가닥을새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나는 릴라에게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번에도 결국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릴라는 내 이야기를 탐탁지 않아 할 테고 내게 내색하지 않다가 몇년 후에야 내게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내게 이보다는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가라앉혔다. - P651
어느릴라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나를 소외시키고 나를 벌하고 좋은 작품을 썼다는 만족감까지 손상시켰다. 나는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자기삭제를 연출하는 행위도 이제 내게 걱정보다는 분노를 자아냈다. 아마 어린 티나와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네 번째 생일을 앞둔 아이의 모습으로, 가끔은 현재 임마처럼 30세의 다 큰 여인의 모습으로 릴라를쫓아다니는 티나의 유령과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오직 그리고 영원히 우리 둘만의 문제일 것이다. 타고난 천성과 자신이 처했던 환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것을 내가 이루기를 바랐던 릴라와 그런 릴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화가나서 나에게 복수하기위해 나도 자기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릴라와 수개월동안 쓴 글로 그런 릴라에게 경계가 해체되지 않은 형태를 만들어주고 릴라를 이겨내 릴라에게 평안을 찾아주고 그로써 나도 평안을 찾으려 하는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 P654
나 자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영원히 끝내지 못할 것 같았던 이이야기를 끝마친 것이다. 이야기를 완성한 후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글을 꼼꼼하게 다시 읽어 보았다. 글을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 몇 줄이라도 릴라가 내 글에 들어와 글에 이바지한 흔적이 없는지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내 이 기나긴 글이 오롯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릴라는 종종 내 컴퓨터에 침입하겠다고 나를 위협하곤 했지만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마 애당초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네트워크니 케이블이니 연결이니 전자세계의 요정들이 벌이는 일에 대해 무지한 늙은 여인의 오랜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을 것이다. 내 글에 릴라는 없었다. 내가 글로 쓸 수 있었던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릴라가 어떤 글을 어떻게 쓸지를 상상하다보니 내 글과릴라의 글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 P657
그러니 이 긴 글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릴라를 다시붙잡고 싶었다. 내 곁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내가 해낸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가끔 릴라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혼자 되묻곤 한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걸까. 오직 릴라만 아는 지하 터널이나 갈라진 틈 사이로들어가버린 걸까. 강력한산을 가득 채운 오래된 욕조 속에 들어간걸까. 아니면 내게 공들여 설명해주었던 예전에 쓰레기 폐기장으로쓰이던 ‘석탄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버린 걸까. 산속 깊이 버려진 작은 성당의 납골당에 있는 걸까. 우리는 아직 모르지만 릴라는 알고있는 다른 수많은 차원 가운데 하나의 세계에서 자기 딸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 릴라는 돌아올까. 늙은 릴라와 다 큰 어른이 된 티나가 함께 돌아올까. 오늘 아침, 포 강이 마주보이는 작은 발코니에 앉아나는 기다려 본다. - P661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릴라는 나를 속였던 것이다. 우리의 우정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나를 제멋대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평생 ‘내‘ 육체와 ‘내‘ 존재를 빌려 자신의 구원을 이야기한 것이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반세기 이상이 걸려 토리노까지온 그 두 인형은 릴라가 잘 지내고 있으며 나를 사랑하고 이제 드디어 틀을 깨고 세계 일주를 할 생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지난날 릴라의 세계만큼 작아진 세계를 여행하며 새로운 진실에따라 젊은 시절 다른 사람들 때문에 또는 자기 자신 때문에 누리지못했던 삶을 살아가면서 늙어갈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나는 두 인형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는 인형들을 내 책등에 기대어 놓았다. 보잘것없고 못생긴 인형들을 바라보고 있으니혼란스러워졌다. 소설과는 달리 진짜 인생은 일단 지나간 후에는 명확해지기보다 모호해지는 법이다. 릴라가 이토록 명확하게 자신을드러냈으니 이제 다시는 릴라를 보지 못해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 P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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