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풍경 - 박태원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0
박태원 지음, 장수익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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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이상한 작가다. 오랜 세월 동안 금지된 이름의 작가가 쓴 금서 <천변풍경>을 읽어보니 더욱 그렇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쓴 사람이 자진해서 남조선노동당에 들어가 월북을 했을까? 박태원. 광교쯤으로 보이는 청계천 상류에 사는 도시 소시민들을 섬세하고도 따뜻하게, 굳이 경향으로 치면 리얼리즘 작가가, 공산주의 독재 치하에서 정말 자기 뜻대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줄 알았을까? 1950년이면 이미 소련에선 레닌을 거쳐 스탈린이 철권을 휘두르며 거의 모든 예술가들을 질식시키고 있었을 당시였던 것을. 다른 건 아직 안 읽어보고, 단지 <천변풍경> 하나만 두고 이야기하자면 박태원은 아무 생각 없이 옆에서 가자는 대로 그냥 가다보니 어, 어 하는 동안 자꾸 북쪽으로 가고 있었던 거 같다.
  더구나 박태원은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노골적으로 친일 문학에 힘을 써, 내신일체 사상의 고양에 혁혁한 공훈을 세운 바 있거늘, 어찌 제 발로 북쪽을 선택했을 수 있었을지 못내 궁금하다. 무소의 뿔처럼? 이이의 외손자가 누군지 아시지?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탄 봉준호. 물론 봉준호는 외할아버지 얼굴도 모르니 그가 박태원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꿈에도 생각을 안 한다. 그냥 그렇다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태원의 창작 유전자 일부가 봉준호에게 조금은 이어졌다는 것이 생물학적 진실이긴 하다는 거.
  근데 어째 박태원에게 리얼리즘 작가라는 딱지를 붙이기가 좀 어색하다. 아직까지 읽어보지 않아 우리나라 옛 작가들에게 미안한바 작지 않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 제목은 최인훈의 것으로 읽어서 상당히 오랜 동안 <소설가 구보....>는 그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세월이 좋아져 <소설가 구보....>가 원래는 자진해서 월북한 박태원의 중편소설이고 최인훈이 나중에 박태원을 본받아, 요새 쓰는 말로 패러디한 것임을 알게 됐으나 그렇다고 새삼스레 다시 찾아지지는 않던 거였다(조만간에 꼭 읽어보리). 하여간 박태원의 구보는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그것이 우리나라 모더니즘 문학의 한 기념비라고 하도 많이 들어서, 모더니스트가 월북을 해? 보나마나 가자마자 숙청당했겠군, 했더랬다. 뭐 그런데 잠깐 고생을 하고 난 다음 죽을 때까지 장편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했다고 하니 소설가로 천수를 누렸던 모양이다.
  경성의 광교 부근. 북악에서 흐른 맑은 물이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곳엔 동네 아낙들이 빨래를 할 수 있게 샘터를 만들어놓고 샘터 주인이 한 번 빨래하는데 5전씩을 받아 호구를 한다. 샘터를 제외하고 유유히 흐르는 천에는 여지없이 생활하수 같은 것이 둥둥 떠다녀 발 한 짝이라도 집어넣으면 곧바로 썩어질 것 같다. 샘터에 동네 가겟집의 안집 살이, 드난살이 하는 아낙네 십 수 명이 입춘 지났다고 좀 덜 매운 개천 물에 빨래들을 척척 휘두르며 동네 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주절이, 주절이 떠들어대는 것으로 이 재미있는 옴니버스 식 장편소설의 막을 연다.
  기생 취옥이는 원래 이름이 언년인데, 언년이 엄마가 딸을 권번에 보내 본격적으로 기생이 되니 이젠 딸 덕에 호사라, 같은 동네 최고로 어여쁜 이쁜이 엄마는 왜 그리 고운 이쁜이를 권번에 보내지 않는지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도통 씨알이 먹히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취옥이와 같은 권번에 있는 명월이는 이상하게 고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열 시간도 못 불려 다니지만 그래도 종로에 있는 은방 주인이 홀랑 반해서 해달라고 하는 건 웬만하면 다 해주니 기생팔자보다 더 좋은 게 세상에 몇이나 되느냐는 말이지.
  그러나 이쁜이 엄마 입장에서는 천만의 말씀. 열세 해 전에 남편 죽고 소녀과부가 되어 그거 하나 바라보고 키우는 재미로 살았는데 어딜 권번이 말이나 되는가. 이제 전매국 의주통 공장에 다니는 강석주라고, 키는 작지만 귀염성스럽게 잘 생긴 청년과 식을 올려준다. 신부화장을 한 이쁜이를 보고, 감히 이쁜이를 며느리로 삼기엔 자기 아들과 살림이 턱없이 척진다는 것을 아는 점룡이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옛적에 당명왕을 녹여낸 양귀비보다 못하지 않다.”
  했으니 독자들은 이쁜이의 어여쁨이 어떤 수준인지 짐작이나 하시라.
  그러나 그러면 뭐해. 쥐뿔도 없는 서방 아이는 옛적부터 조선의 고관대작은 일처양첩, 본처 하나에 첩을 둘은 두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30년대 전매국의 공원 신분으로 캐시미어 외투에 양복을 쪽 빼입고 구리개니 종로니에 있는 술집, 카페, 그것도 모자라 새문교회 동생까지 반반한 아가씨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반면, 취미생활로 광교 근동에 가장 고운 자태를 자랑했던 맘씨 좋은 어린 마누라 두드려 패기로 정해버린 것을. 여기다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가히 막장 수준이라, 원래 성질머리도 더러운데다가 자기 남편, 그러니까 이쁜이의 시아버지가 며느리 쳐다보는 눈길이 또 묘하다고 근거 없는 질투까지 섞여 며느리한테 해대는 바람에 세상에 그리 매운 고초당초가 있을까 싶게 시집살이를 사는 것을.
  천변에 앉아 빨래 주물러대는 여인들을 고용해 사는, 소위 방귀 깨나 뀌는 인물들로는, 첫째가 한약국집을 들 수 있을 터. 일찍이 결혼해 남편에게 두드려 맞기를 밥 먹기보다 더 자주 당하다가 남편은 그것도 모자라 시앗을 보고, 하나 있는 아들도 일찌감치 지긋지긋한 삶을 접어 혼자가 된 후 그길로 내빼 이 집의 안집 살이, 즉 대표 하녀로 취직해 죽기까지 함께 하기로 작정을 한 귀돌어멈이 고단한 머리를 뉘는 곳이다. 약국집 주인 내외는 여간만 하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안고 지내는 성질이지만, 새로 살러 들어온 만돌이네는 도무지 참아주지 못했다. 만돌 어멈은 사람이 그리 넉넉하고 수더분하고 얌전하고 일 하나 맵시 있게 야물딱진데, 아 그만 만돌 어멈의 부탁으로 함께 살러 들어온 만돌 아범이 술만 마시면 곧바로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 멍멍이가 되는 것은 봐주지를 못해 그만 내치고 말았다.
  또 먼 친척의 부탁으로, 사람의 새끼는 낳아서 서울로 보내랬다고 동네에선 똑똑하다고 소문 나 경기도 가평에서 애꾸 아버지 손에 이끌려 한약국의 사환으로 취직한 창수는 서울살이 불과 몇 달 만에 아주 발랑 까진 도시내기가 되어버려 약국 주인 말씀 알기를 개떡으로 여겨 주인 영감 입에서 ‘당장 나가’라는 하명이 나오기 전에 자기 발로 때려치우고 잠깐 귀향했다가 다시 돌아와 종로의 당구장에 게임 보이로 활약한다. 그래도 약국의 노부부가 자식농사를 잘 짓고 마음도 넉넉하여 동경의 유명 사립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아들이 결혼하기도 전에 일 년 동안 이화 나온 지금의 며느리와 자유연애를 하는 것에도 아무런 까탈도 하지 않았으며, 아들도 부모를 닮아서 그런지 결혼하고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루에 꼭 한 번씩 아내와 어깨를 나란히 천변을 산보하고는 하는 거였다.
  또 한 명의 문제적 인간이 ‘민주사’다. 돈푼깨나 있는 양반으로 아내와 아들아이 하나와 편안한 가정을 꾸렸음에도 관철동에 집을 하나 얻어 첩을 두었으니 그건 당시만 해도 이 정도는 해야 그래도 장안에서 행세한다고 믿었던 까닭이었다. 이 양반이 올해 천명을 아는 나이, 첩 안성댁은 딱 절반인 스물다섯. 그래 머리털에 희끗희끗, 흰 털이 자꾸 느는 것이 불만이긴 하나 세상에 어느 장사가 있어서 세월을 거스르나. 이 양반의 진짜 문제는, 국회의원이 아니고 당시 식민지 치하라서 경성부, 부회의원이 돼보고자 출마했다가 수천원만 쓰고 장렬하게 준우승을 해서가 아니라, 관철동 안성댁이 일편단심 늙은 자기만 보고 있지는 않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안성댁이 자기를 공깃돌 놀리듯 손 안에 쥐고 흔드는 걸 도무지 인식하지 못한다는데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대낮에 관철동 집에 대문을 열고, 중문까지 열고 쑥 들어가 보니, 안성댁과 대학의 교복을 입은 청년 하나가 마루에서 전축을 틀어놓은 채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옆으로 자빠져 있는 거였다. 비록 옷고름 하나, 단추 하나, 양말 한 짝 흐트러지지는 않았지만 남녀가 유별한데 훤한 대낮에 눈을 맞춘 상태에서 연놈이 자빠져 있다 함은 세상에서 둘 사이에 해볼 것은 이미 다 해봤다는 증거 아닌가 싶은데도, 안성댁이 동향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너나들이 했던 터라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 초대했다고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말하는 걸, 1930년대엔 너무나도 흔했던 방식으로 옆구리나 한 대 쥐어박지 못하고 아무소리도 못 한 채 그냥 발길을 돌려 집을 나선 순간, 청요리 배달 소년이 커다란 음식 상자를 들고 인사를 꾸벅 하고는 자신이 방금 나온 집으로 쏙 들어가는 것까지 목격하고도, 그냥 집으로 왔다는 거 아닌가. 이런 인간을 우리는 흔히들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한다. 원래 이리 나사가 좀 빠진 사람이 행복할 확률이 더 높으니 뭐라 하기도 좀 그렇다.
  이외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해 다 소개하려면 내일 아침 해가 뜰 때야 마칠 수 있을 터이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딱 한 명,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소개하고 독후감을 끝내겠다.
  청계천변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사건의 목격자는 이발소에서 사환으로 일하는 소년 재봉이의 눈을 통해 언급이 되는데, 이발소에서 천 너머로 카페가 있으니 옥호를 ‘평화’라고 했다. 평화 카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급은 하나꼬. 얼굴도 예쁘고 나긋나긋하고, 알고 보면 마음씨도 옹골찬데다가 매운 마음도 있는 괜찮은 ‘젊은’과 ‘어린’ 사이의 아가씨. 그러나 소개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꼬가 아니라 무뚝뚝하고, 못생기고, 늙은 여급인 ‘기미꼬’다. 이런 여급이 아직도 평화 카페에 있을 수 있는 건, 다른 건 몰라도 술 하나 장하게 마셔 이이가 앉은 테이블에서는 남자들이 여럿 마신 술보다 기미코가 목구멍으로 부은 술의 양이 더 많아 매상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해주니, 주인 입장에선 감히 기미코를 외모가 안 된다고 함부로 내칠 수 없는 일. 거기에다가 이를테면 웬만한 불량한 남자는 말도 못 붙일 만큼 협기俠氣도 대단한데다 천성이, 이거 정말인데, 천사다, 천사. 소설 속이니까 이런 사람을 볼 수 있지 실제의 삶에서는 도무지 찾을 도리가 없는 의리의 여걸.
  책의 주인공은 없다. 청계천변에 사는 무수한 소시민과 소자본가와 광교 다리 밑 깍쟁이들까지 눈에 띄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이들이 사는 모습을 구태여 힘주어 찬양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조금쯤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박태원의 시선. 글쎄, 앞에서 말했듯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박태원은 이 작품을 써서 모더니즘과 작별을 고하려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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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6-15 14: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박찬순이라는 작가의 <암스테르담 완행열차>라는 소설모음집에 보면 ˝성북동 230번지˝라는 단편이 들어있는데 이곳이 예전에 박태원이 살던 곳 주소래요. 박찬순 소설가가 박태원에 대한 오마주로 쓰게 된 소설이라고 하더군요.
박태원이 다른 소설가의 오마주 대상이 되는 매력이 무엇일까요.
저도 그때 박태원의 소설을 찾아읽어보는 대신 작가의 이력만 훑어보다가 봉준호 감독과의 관계를 알게 되는데서 그쳤지요.
구보는 박태원의 호. 이번 기회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부터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0-06-15 14:57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박찬순을 검색해봐야겠습니다.
후세 작가들은 주로 그의 초기작, 모더니즘을 지향하던 작품들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우리나라 근대 소설 가운데 괜찮은 작품이 생각보다 제법 있더라고요. 그간 건방지게 우리 근대 소설을 멀리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인간 문제 - 강경애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7
강경애 지음, 최원식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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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에 이름을 듣지 못했던 작가. 아마 들었어도 강O애, 이런 식이어서 기억도 나지 않고 아무리 외워봤자 시험문제로 나오지 않던 카프 작가여서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저번에 읽은 이기영도 그렇고 강경애도 그렇고 꽤 괜찮은데 이들이 쓴 것을 몇 십 년 동안 학교에서 제목조차 가르치지 않았다니, 세상에 이런 손실이 있나 그래. <인간문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한다. 리얼리즘이면 리얼리즘이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또 뭐야? 오스트로프스키나 고리키 같은 부류의 작품이라는 뜻인가? 굳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까탈을 잡지는 않겠다.
  강경애. 1906년 황해도 송화 태생. 평양숭의여고 입학, 2년 후 동맹휴학 건으로 퇴학. 이때가 1923년인데 개성 출생이지만 황해도 장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나중에 스스로 ‘국보’, ‘한국의 3대 천재’라 칭하는 양주동과 연애사건을 벌이다 결국 찢어진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양복 주머니에 땅콩을 넣고 강의실에 들어가 땅콩을 까먹으며 강의하는 습관을 들였던 양주동이 세 살 위인데, 아시다시피 이이가 젊은 시절에 계급(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의 절충을 주장했던 적이 있다. 이점을 주목하시라.
  강경애는 일본 유학을 하지는 않았지만 평양 최고의 여성교육기관인 숭의여학교와 당시 식민지 치하 지사들의 따님들이 주로 다니던 동덕여고(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쳤으니 지역 유지의 따님이었을 것. 그럼에도 주로 간도를 무대로 공산주의 운동을 펼치고, 심지어 진위는 모르겠으나 김좌진 장군 암살의 배후에 있었다는 의혹도 있는 강경애가 스물아홉 살에 쓴 <인간문제>에 근본적으로 탈출구, 안전한 배후가 있는 지식인 출신 운동가의 전향문제를 아주 제대로 비틀어버린다. 아니겠지만, 혹시 프로와 민족의 절충을 주장함으로써 퇴로를 확보한 양주동을 그때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닌지 궁금하다, 뭐 아니겠지만.

  1931년에 영국 여자가 쓴 <파도>를 읽은 바로 뒤에 1934년에 한국 여자가 쓴 <인간문제>를 읽으니 속이 다 시원하다. 스토리와 표현과 주장하는 바를 쓴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 순간 즉각적으로 이해, 흡수, 소화까지 되어버리는데다 내용 자체가 펄떡펄떡 뛰는 날것이라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우리나라 프로 문학의 대표선수가 쓴 작품이어서 당연히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인텔리겐치아 쁘띠 부르주아가 등장한다. 그리고 프로 문학의 공식에 의하여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치아는 완전한 악인들이거나 결국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편안한 길을 찾아 간다. 그렇다고 러시아 운동권 작품처럼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공고한 신념, 죽음을 초월하는 불사의 운동성까지는 보여주지 않아 좀 더 리얼하다.
  <인간문제>는 1934년 동아일보에 약 다섯 달 동안 연재했던 작품이다. 그래 분량도 많지 않고, 시퍼렇게 눈을 도사리고 있는 일제의 검열도 피해야 했으니 완전한 사회주의 문학이 되기 전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고, 저절로 작품 속 사건의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는 읽는 맛을 주기도 하지만 저자 입장에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앞뒤 짜임새 있는 구색을 맞춰 전개하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것처럼 읽힌다.
  황해도 모처에 있는 가상의 ‘용연동네’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먼저 원소(怨沼)라고 이름이 붙은 못에 관한 전설을 소개한다.
  예전에 원소가 생기기 전에 장자 첨지가 살았는데 곳간에 온갖 곡식과 고기와 술이 넘쳐났단다. 근동엔 몇 해에 걸친 흉년이 들어 온통 굶주림에 아이들 우는 소리만 희미했음에도 혹시나 없는 것들이 몰려올까 두려워 문을 꼭꼭 닫고 밥을 지어먹고 짐승을 잡아먹었단다. 배를 곯던 백성들은 어쩔 수 없어 패를 지어 장자 첨지 집을 습격해서 쌀과 살진 짐승들을 끌어냈단다. 그랬더니 첨지가 관가에 이를 발고하여 근방 농민들을 전부 잡아다가 혹은 죽이고 혹은 때려 불구를 만들고 나머지는 모두 멀리 쫓아냈단다. 그래 이제 남은 동네의 노인들과 어린 것들이 첨지네 마당에 몰려들어 울고, 울고 또 울어서, 눈물이 모여 못이 생기니 원한의 못이라 원소(怨沼)라 했단다.
  원소를 낀 용연동네에 전설 속의 장자 첨지를 빼닮은 정덕호라는 지주가 살고, 슬하에 오직 딸 하나를 두어 이름을 옥점이라 했다. 옥점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에 학교 교사의 아들로 몽금포로 해수욕을 겸한 요양을 떠난 신철을 우연히 만나 집에 데려온다. 시골에서 젊은 아가씨가 사내를 데려왔으니 당연히 서로 내약內約을 한 사이로 이해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신철이 옥점을 보니 그저 하루 데리고 놀만은 하지만 평생을 두고 반려로 삼기엔 부잣집 외동딸이 그랬듯 세상에 아둔패기에다 천하 게으름뱅이라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수밖에.
  동네엔 어여쁜 딸 ‘선비’와 함께 사는 과부댁이 있었는데 선비가 열다섯 살 때 같은 동네 소작도 떼인 빈농이자 행실 나쁘다고 소문난 또 다른 과부의 아들 ‘첫째’도 있었다. 서로 어려서 그랬는지 첫째는 바구니 가득 싱아를 따서 담고 가는 선비를 쫓아가 싱아 한 줌을 빼앗아 먹은 적이 있었다. 근데 둘은 몰랐을 걸? 이 추억이 그들의 남은 생애를 끈질기게 쫓아다니게 될지. 이때부터 삼 년이 흐른 뒤에 그만 선비의 천사 같은 어머니가 폐를 앓다 모진 목숨을 버리고 정덕호네 몸종으로 들어가 갖은 고생을 한다. 첫째 역시 삶은 언제나 힘든 것이라 힘도 좋고 농사도 잘 지음에도 불구하고 덕호로부터 소작을 떼이고, 깊은 겨울을 날 수 없어 동네 없는 사람의 부엌을 털어 쌀을 훔쳐내다가 도무지 안 되겠어서 도시로 도망치고 만다.
  그럼 그림이 그려지시지? 학대와 착취를 피할 수 없는 어여쁜 하녀와, 버릇없는 주인집 딸이 혼자만 사랑해마지않는 대학생, 어려서 추억을 간직한 시골 총각이 도시로 도망. 그러나 여기까지가 아니다. 잘 생긴 대학생은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 가출 후 소위 현장운동에 헌신하고, 와중에 서로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첫째와 한 패를 이룬다. 여기에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정덕호의 씨받이 겸 작은댁으로 들어갔던 간난이가 나중에 동네에서 도망한 선비와 역시 동패를 만들어 급속하게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기에 이르고, 이의 실천에까지 가담한다.
  이렇게 대강의 줄기를 그려보니 <인간문제>의 참맛을 느끼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이젠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스토리보다 강경애가 그려놓은 강경한 참상의 실제 모습. 그것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가난과 배고픔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가난과 배고픔에서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진실인 현실. 가난하면 몸이라도 팔아야 하고, 싸움과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1930년대였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그대로 그려내는 강경애의 철필 맛은,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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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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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수준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연설문 모음 <자기만의 방>을 제외한 버지니아 울프를 읽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봐야 <등대로>와 <델러웨이 부인>을 읽어봤을 뿐이지만. 울프가 작품 속에 작가의 십팔번인 ‘의식의 흐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들 하는데, 의식의 흐름은 글을 쓰는 한 방편, 방식, 형식, 기교일 뿐이라, ‘의식의 흐름’이 책 읽기에 더욱 재미를 줄지언정 글이 어려워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댈러웨이 부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딜레탕트 주제에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다중 관찰자 시점’을 사용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출간하고 6년이 흐른 1931년에 이 작품 <파도>를 간행하는데, 6년의 세월동안 위에서 말한 ‘다중 관찰자 시점’이 ‘다중 화자 시점’으로 확 진화해버린다.
  책을 열고 모두 아홉 개의 섹션 가운데 첫 번째 섹션에 들어간 순간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전주prelude는 이렇게 시작한다.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에 태양이 바다 위에 여명을 비추기 시작하고 그래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드러나고 파도가 육지로 끊임없이 밀려와 소멸하는 것이 보인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첫 번째 섹션으로 접어드는데, 모두 여섯 명의 소년 소녀들이 뚜렷한 공통의 화제 없이 발언하기 시작한다.
  수잔, 로우다, 지니, 이렇게 소녀 세 명과, 버나드, 네빌, 루이스, 세 소년들.
  여섯 명의 아이들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따옴표 안의 대사로만 이루어진 섹션을 읽고, 일단 두 손 들었다. 도무지 읽을 수 없다. 여간해서 쓰지 않는 최후의 수법, 책 뒤편에 실린 역자 해설을 먼저 조금 읽기로 했다.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인 역자 박희진은 <파도 Waves>가 버지니아 울프의 가장 현대적인 실험소설이며, 세계의 많은 울프 전문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울프의 작품으로 꼽는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한 다음에, 책을 읽는 법을 알려준다. 분류 편의상 소설로 구분할 뿐, 작가 자신도 나중에는 “희곡-시”라 표현했다고 한다. 구성은 모두 아홉 개의 섹션으로 되어 있으며 섹션 사이의 간주interlude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산문시로 되어 있고 태양의 위치에 따라 유년기부터 노년기까지를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해설을 읽은 다음 책을 여니 이제는 오히려 재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모두 여섯 명의 화자가 등장해 오직 대사로만 자신과 자신의 다섯 친구들, 그리고 마지막 섹션까지 중요한 인물로 이야기하는 퍼서벌Percival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한다. 물론 각 화자의 출신, 교육, 직업, 사랑 등도 간략하나마 소개되기도 하고. 역자 박희진에 의하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퍼서벌이라고 한다. 퍼서벌, 이름만 가지고도 충분히 대단하다. <아서 왕의 전설>에서 가장 으뜸가는 기사이며 이름을 파르지팔Parsifal로 바꾸어 바그너의 오페라 주인공으로 등장해 성창과 성배를 찾아오는 인물이다. 작품 속에서도 남자들이 학교에 입학하는 두 번째 섹션에서 처음 등장해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해 인도로 가서 낙마사고가 생겨 스물다섯에 죽어버리는 캐릭터이지만 여섯 명의 친구들 모두에게 많은 면의 탁월성 때문에 숭배를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왜 퍼시벌이 그토록 숭배를 받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화 차이일 수도 있고, 여성 작가와의 젠더 차이일 수도 있을 터이고, 백 년 전 사람들과 세대 차이일 수도 있을 터이다. 아무래도 특별한 존재가 작품 속에서 필요해서 이에 타당한 이름을 가져다 붙인 거 같다. 에이, 아무려면 어떠랴.
  스토리? 특별한 거 없다. 굳이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면, 버나드가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로 마지막 아홉 번째 가장 긴 섹션에서 온통 자신의 입장에서 등장인물 모두와 퍼서벌의 유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고 급기야 죽음이 오기까지 한 시절을 정리하고, 마치 파도처럼 스러지지만 계속해서 같은 파동이 뒤를 이어 오는 존재의 연속성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 표지부터 본문까지가 312쪽에 불과한데 중요한 등장인물이 여섯 명이다. 그러니 아무리 간략하게 쓴다고 해도 여섯 명 모두의 인생을 개연성 있는 스토리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각자가 화자가 되어 대사로 자신을 설명함으로써 삶의 모든 스토리 가운데 친구들과 관련된 것만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라 저 위에 ‘다중 화자 시점’이라 말도 안 되는 정의를 내렸다.
  어느 책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가 소위 ‘위대한 책’이라 말하는 것을 보고 골라 있었다.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서 혹시 이 책에 관심이 있으시면, 당신 역시 큰 <파도>에 휩싸일 수 있을 것임을 단단히 각오하시어, 혹시 모르니, 공기 호흡기 하나쯤 장만하시면 좋을 듯하다.

 



* 질문.


  "난세스"가 어떤 뜻인지 아시는 분 계시면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솔 출판사 포스트에 제가 질문을 하기를,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파도> 298쪽 첫 줄에 '시와 난세스를 한데 섞으면....', 이어서 6~7 줄에도 '운율과 허밍이, 난세스와 시가 멈춰버렸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저 앞쪽에도 한 번 '난세스'란 단어가 나오는데 그냥 '난센스'의 오타겠거니 하고 넘어갔었습니다만, 아닌 거 같더군요. 근데 사전에도, 검색을 해봐도 '난세스'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첫줄의 '난세스'는 이 책의 키워드 가운데 하나인 '오너라, 오너라 죽음이여'와 긴밀한 연관이 되어 있어서 더욱 궁금합니다. '난세스'가 어떤 의미인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도움을 청합니다."


 아직 도움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긴, 궁금한 것마다 잽싸게 답변이 온다면 세상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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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1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1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1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1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금모자 2020-06-11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 원문에 nonsense로 되어 있습니다. 오타 맞습니다.

Falstaff 2020-06-11 11:31   좋아요 0 | URL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알라딘은 신기한 곳이예요. 출판사에선 아직 한 마디 답변이 없는데, 알라딘은 거의 즉시 말씀을 해주시니 말입니다!

꼬마요정 2020-06-11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느낌일 것 같아요. 친구 서 너명이 앉아서 이야기 할 때요, 각자 다른 이야기 하는데 묘하게 다 연결되는...^^

마지막 줄 말씀... 탁 와 닿아요. 세상이 지루하지 않은 건 원하는 걸 얼른 얻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ㅎㅎ

Falstaff 2020-06-11 15:47   좋아요 1 | URL
아, 이거 읽다고 뇌가 막 섞이는 느낌이 자주 들었습니다. 묘하게 연결될 거 같은데 각 섹션이 시간 차이가 크고 독백이 자기들 마음대로라 쉽지 않았던 겁니다. ㅜㅜ
ㅋㅋㅋ 다 인생이 그렇지요? 다행입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서요. ^^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김영랑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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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랑 김윤식, 하면 떠오르는 시가 표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사진으로 보면 참 강건해 보이고, 실제로 어려서 강진의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검거되어 대구까지 이송돼 짧게나마 옥고를 치루기도 했으며, 일본 유학 후에 중앙에 진출하는 대신 강진에 칩거해 시를 쓰고 음악을 들을 뿐 이름자를 왜식으로 바꾸지도 않고 왜의 신사에도 참배 한 번 하지 않은 채 그 시절을 버텨냈으니 덩치 못지않게 마음도 참 옹골졌을 듯하다. 이런 이가 <모란이....> 속에서 사용한 시어를 보면 에둘러 말하지도 않고 곧바로 설움, 서운, 섭섭, 울음, 슬픔 등의 단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차하면 유치나 신파로 빠져들 위험이 있는 이런 단어들이 비탄이나 통곡의 벽에 막히지 않고 다시 새로운 희망으로 향하고 있는 점이다. 읽어보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전문)


  그렇지 않은가. 여차하면 유치찬란할 수 있는 시어들이 마지막 ‘기다림’의 출구를 통해 가볍게 신파에서 벗어나고 있다. 물론 지금 시대에 이런 시를 쓸 필요도 없고 쓸 수도 없지만, 아직도 이 시를 읽는 일은 너무도 충분하게 유효하다. 작은 아이에게 이 시를 읽어보라니까 어떻게 오월 어느 날이 무더울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거야 음력 오월이니까 그렇지. 대략 하지부터 한 달 사이에 모란이 툭 떨어져 꽃잎이 시들고 자취마저 없어졌단다. 그러자 이제 시인의 남은 한 해는 극성의 여름과 가을, 겨울 모두 사라지고 오직 다시 모란이 필 내년의 봄을 기다린다니, 영랑의 지사적 생활을 기억하는 이들은 ‘봄’을 조국의 해방으로 여겨도 나쁘지 않겠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나는 그냥 시인 개인의 ‘슬픔의 봄’으로 읽는 것을 양해해주기만 바랄 뿐이다. 세상에 슬픔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을 슬픔이라 말하는 사람이 드물어 그 가운데 몇 명을 우리는 ‘시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물론 대표시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데 의견이 없으나, 나는 아무래도 영랑의 시, 하면 그이 특유의 짧은 시편들, 제목도 없이 그저 번호만 죽 늘어놓은 시들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쪽이다. 이 시집에서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라 제목을 두었으나 사실 이 시는 제목이 없거나 <2>라는 번호만 달려있는 시다. 옛 시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당시 언어로 낼 수 있는 낱말 특유의 향을 흠향해보는 것인데 출판사 시인생각의 한국대표명시선 100 시리즈는 약간 과하게 시를 현대어로 고쳐서 조금 불만이다. 모바일로 독후감을 읽으실 분은 감상하기 불편하겠지만 그래 원래 시와 대조해 비교해보겠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전문)



  2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 아래 우슴 짓는 샘물가치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우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십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붓그럼가치

  시의 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십다  (전문)



  읽기에 어떠신가. 나는 <2>가 더 낫다. 그러나 진리는 아니다. 우리가 쓰는 한글이 표음문자라서, 시간이 흐르며 매우 빠른 속도로 진화를 해 읽기는 읽어도 도통 모르는 단어를 만날 확률이 매우 높다.
  그것 아니더라도 영랑은 자신이 시어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그대 내 홋진 노래를 들으실까 / 꽃은 가득 피고 벌떼 닝닝거리고 // 그대 내 그늘 없는 소리를 들으실까 / 안개 자욱이 푸른 골을 다 덮었네 (후략)(<내 홋진 노래> 또는 <13> 부분) 이 부분에 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홋지다”가 무슨 뜻이지? 심지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 단어는 우리나라의 모든 책 가운데 영랑의 시에서만 딱 한 번 등장한단다. 목포대학 허형만 교수가 분석하기를 하나를 뜻하는 단어 ‘홑’과 ‘기름지다’ 할 때의 ‘지다’를 합해 ‘홀로 남겨져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들다’라고 했다. 그렇게 단어의 뜻을 알고, 적어도 이해는 하고 시를 읽는 일과, 전혀 모른 채 읽는 건 또 얼마나 다른지. 그리하여 “그대 내 홋진 노래를 들으실까”는 이 시대에 읽어도 쿨하게 다가온다. 독후감을 쓰고 있는 휴일 새벽의 이 홋진 시간에.
  세월이 흘러 1940년대에 이르면, 일제에 의한 내선일체 사업이 극성을 이루고,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조선의 시대상도 암울하게 변해버리고 만다. 독립이란 것이 몇 년 후 하늘에서 뚝 떨어질지는 꿈에도 모른 채 많은 지식인은 시대에 좌절해버리고 더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에 기생하기 시작한다. 영랑은 여전히 강진, 40년대 기준으로 보면, 옛 시절의 귀양지에 불과한 촌구석에 틀어박혀 회의와 죽음의 골짜기를 탐색하기도 한다. 이 시절에 쓴 시 <거문고>를 읽어보자. 우리는 일본인들을 흔히 원숭이로 얕잡아보고, 원숭이의 다른 우리말이 잔나비인 것을 염두에 두자. <거문고>를 소개하며 독후감을 마감한다.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위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 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 둘 곳 몸 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게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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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 대산세계문학총서 91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김옥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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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코’라고 하는 열아홉 살의 젊은 아가씨. 1년 전 조선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고 이 전쟁터에 맨몸으로 펜 하나만 든 채 투신해 날마다 특종을 보도한 반半 영웅적 이름을 떨친 젊은 기자가 있었으니 이름을 ‘기베 교코’라 했다. 1년이 흘러 기베가 도쿄로 귀환했을 때 당시 저명한 의사의 아내이자 요코의 어머니 오야사 여사는 도쿄 기독교부인동맹의 간부 회원으로 출중한 젊은이들을 자주 집에 초대해 밥을 먹이고는 했던 바, 당연히 ‘천재기자’라고 불린 기베 청년도 명단에 포함이 됐었다. 요코가 비록 스물 전이기는 했지만 이미 당돌하고, 교만하며 선민의식에 꽉 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젊음을 즐길 줄 아는 재능을 지녀서 이미 숱한 남성들과 교제를 경험했던 터였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일단 애정을 허락하면 남자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거의 직감적으로 알고 있어서 수컷들이 잔뜩 독이 올랐을 즈음해서 야멸스럽게 상대를 걷어차며 묘한 흥분을 느끼고는 하는 매우 특별한 취미생활에 맛을 들였다.
  이런 경력을 지닌 요코 앞에 기베가 등장했는데, 이번엔 탁월한 청년이라고 알려진 기베와의 교제를 어머니가, 틀림없이 질투라고 단정할만한 이유로. 둘의 사이가 멀어지게 하기 위해 갖은 방해를 서슴지 않는 거였다. 요코는 이에 반발해서 곧바로 기베의 하숙방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하야마(葉山)에 있는 작은 집에 신혼살림을 차린다. 청일전쟁이 1894년. 19세기 말의 동아시아에서 결혼한 상류층 남자들이 아내를 대하는 일반적인 관행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살림을 시작하자마자 사랑은 곧바로 냉각하기 시작했고, 기베는 지극히 평범하고 나약하고 박력 없는 천생 서생에 불과한 것이 극명하게 증명이 됐을 뿐더러, 생계마저 은근히 요코에게 떠넘기는 둔감한 도련님이어서, 본능적으로 물질적 욕망이 충일한 요코는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 결국 이들은 짧은 혼인관계를 서둘러 취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다.
  이혼을 한 후, 요코는 기베의 딸을 낳는데, 누구에게도 아이가 기베의 자식인 것을 알리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 오야사 여사에게도. 하지만 외할머니는 친부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책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혼 후 요코는 광란의 삶을 몇 년 구가한다. 숱한 남자들과 밤을 보내고 쉽게 헤어져, 몇 년 후 갑자기 불쑥 나타난 남자가 자신의 영혼을 담아 사랑한다고 울며 호소하는 경우가 생겨도 요코는 남자의 얼굴은 물론이고 언제 어디서 관계를 맺었는지도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 그러다가 ‘기무라’라는 젊은이가 나타나 어머니의 추문을 적극적으로 무마해주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이민에 앞서 이제 죽음의 침상에 누운 어머니 오야사 여사 머리맡에 나타나 요코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여 가족회의의 허락을 받아, 요코는 자기 의견과 아무 상관없이 요코하마에서 시애틀로 가는 여객선에 오른다. 때는 19세기 말. 이 점에 유의하시압.
  시점은 이제 1901년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이후 1년 동안 요코의 스토리가 책의 척추를 이룬다.
  20세기가 막 시작한 일본이라는 사회. 여성의 입장에서는 거의 모든 결정과 생활과, 수입과, 이동을 남자의 도움이나 결정에 따라 해야 했던 시기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이런 시기에 요코라고 하는 팜 파탈이 등장한다. 요코는 미국에 있는 약혼자 기무라의 절친한 친구이며 아직 동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고토를 유혹하기도 하고, 여객선의 건장한 체격과 완력의 사무장 구라치 씨의 털이 숭숭 난 가슴 피부의 냄새를 맡고자 그의 내의에 얼굴을 파묻기도 하는 특이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요코는 당장 내일 어떤 불행이 닥칠지언정 눈앞의 환락과 쾌감과 단발마를 버리지 못하는 인물. 시애틀로 향하는 여객선 안에 특별히 속물적인 귀족 다가와 씨 내외가 영 불쾌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코는 바로 어제까지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계급인 사무장 구라치 산키치를 자신의 객실로 불러들여 무아지경의 환희에 빠져들고 만다.
  여태 경험하지 못한 환락을 경험한 요코는 곧바로 약혼자 기무라를 떠올린다. 기무라가 어쨌다는 거야? 돌봐야 하는 두 동생? 미국? 내 딸 사다코가 도대체 어쨌다는 건데? 내내 내게 엄습했던 불안이 뭐가 대수야. 도사리던 자존심이 도대체 뭔데? 그리하여 요코는 시애틀에 정박한 배에서 내리지 않고 그 배를 타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단 하나, 털이 숭숭 난 큰 가슴을 지닌 거대한 체격의 구라치와 함께 빠질 수 있는 환락을 위하여. 구라치에게서 아내와 세 딸을 떨쳐버리게 하고 오직 자신이 그를 독점하기 위해서.
  스토리는 여기까지. 1부를 아주 대강 요약한 정도다.
  읽어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성과 장면과 에피소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환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따라 좌우를 둘러보지 않고 달리기만 하는 경주마처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감안하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상대의 피부와, 냄새와, 존재와 궁극적으로 환락을 포함한 사랑을 향하는 질주. 그렇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풍미하던 자연주의적 전개가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주기는 한다. 당연히 질주의 끝에는 비극이 있을 것임을 책을 읽는 초반부터 알게 되지만 결과를 미리 안다고 해서 재미가 줄어든다는 법도 없다.
  책이 이제 품절이라 헌책방에서 산 것인데, 생각보다 재미있고, 표지보다 매력적인 ‘뽕짝’, 트로트다. 은근히 끌리는 장르. 만일 이 책을 <실락원>의 와타나베 준이치가 대강 두 배의 분량으로 늘여 썼으면 어땠을까? 아마 도쿄 인근의 종이 값이 천정부지였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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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으셨군요! 저도 이 책 예전에 중고로 어렵게 구해놨어요. 아직까지 *구해놓기만*..... ㅎㅎㅎ
폴스타프 님 글 보니 예상처럼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Falstaff 2020-06-08 09: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일제 자연주의 소설입니다!
재미있어요. 근데 좀 오래된 소설이라, 글쎄 짜릿한 묘사가 안 나오네요.
내 그것만 나왔어도 별 다섯 개 다 주는 건데 말입지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