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권의 소설과 관련하여 단상을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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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소설 「고리오 영감」을 읽다가 인간은 오해하기 잘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였다.
보케르 부인은 하숙집 주인이다. 이 하숙집에 여러 하숙인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고리오 영감’이다. 두 여성이 고리오 영감을 찾아오는 것을 보고 하숙인들은 고리오 영감의 정부로 알고 그가 여자 때문에 재산을 탕진한 것으로 오해한다. 사실 두 여성은 고리오 영감의 딸들이다. 고리오 영감이 딸이라고 말했는데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싶어서다.
“저 영감 보았지요? 그런 여자들 때문에 저 영감이 망한 게 틀림없어요.”
보케르 부인이 보트랭과 다른 하숙인들에게 말했다.(「고리오 영감」, 64쪽)
보트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한 생각에 빠지면 끝까지 버티지. 어떤 특정한 우물에서 떠온 특정한 물만 마시려들거든. 대개 썩은 물이지. 하지만 그 물을 마시려고 부인과 자식들을 팔고, 자기 영혼까지도 악마에게 팔아버리지. 어떤 사람들에게 이 우물이란 도박, 증권시장, 그림, 곤충 수집, 음악이 될 수도 있지.
다른 사람들의 경우 남자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서 바칠 줄 아는 여자일 때도 있지. 이런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다 제공해도 코웃음칠 거야. 이들은 자기들의 정열을 만족시켜 주는 단 한 명의 여자만을 바라는 거지. 흔히 이 여자는 그런 사람들을 전혀 사랑하지도 않고 학대하면서 작은 만족을 비싸게 팔지. 그런데 말이네! 그런 녀석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그 여자에게 마지막 동전 한닢까지 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은 자기 이불을 전당포에 잡힌단 말일세. 고리오 영감은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지. 백작 부인은 고리오 영감을 착취하고 있어. (...)”(「고리오 영감」, 65쪽)
고리오 영감이 남들의 오해를 받듯이 나도 오해를 받곤 한다. 특히 첫인상만으로 나를 예단해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몸이 피로해서 집으로 올 때 택시를 타던 날이었다. 그때 택시 안에서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택시 기사가 나에게 말하기를, 여러 손님을 태우다 보니 손님 관상을 볼 줄 안다며 얼굴과 목소리만 알아도 어떤 사람인지 느껴진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 것 같으냐고 물으니 그건 말할 수 없단다. 그 말의 뉘앙스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였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는데 나를 자기주장이 강하고 깍쟁이인 줄로 아는 것 같았다. 나의 첫인상이 그렇게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본 경험이 있어 말해 주었더니, 택시 기사는 미소만 지을 뿐 내 말을 부정하지 않는 걸로 보아 그렇게 본 모양이다. 첫인상으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단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나는 친구들을 만날 때 돈 쓰는 데 인색하지 않으니 깍쟁이가 아니고, 우리 애들한테 ‘무심한 엄마’로 통하고 있으니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오해하기 잘한다는 점이다.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불필요한 오해를 쉽게 하고 틀림없다고 여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인간은 오해의 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자작 부인이 말한다.
“자! 라스티냐크 씨, 세상이란 이런 거예요. 세상을 알맞게 다루세요. 당신은 출세하고 싶지요? 내가 돕겠어요. 여성들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으며, 남자들이 얼마나 볼썽사나운 허영심에 빠져 있는지를 헤아리게 될 거예요. 세상이라는 책은 열심히 읽어보아도 알쏭달쏭한 페이지들이 있어요. (...)”(「고리오 영감」, 109쪽)
세상이라는 책만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이란 책 역시 열심히 읽어보아도 알쏭달쏭한 페이지들이 있기 마련이다. 타인에 대해 잘 알아도 전부를 알 수는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전부를 알 수는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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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로빈슨 크루소」는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이라는 원제가 말해 주듯이 놀라운 모험을 그린 소설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긴 세월을 홀로 무인도에서 살면서 생존하기 위해 투쟁한다. 모험기라고 볼 수 있는 이 책에서 작가의 통찰이 엿보이는 구절을 발견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글이다.(작가들은 좋은 글을 책의 앞쪽에 배치하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는 나더러 잘 관찰할 것을 명했다. 즉 인생의 재앙은 상류층과 하류층끼리만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나도 알 것이라 했다. 중산층은 재앙을 제일 적게 겪을 것이며 상류층이나 하류층이 겪는 그 많은 인생무상에 접하지 않을 것이라고, 틀림없이 그렇다고 했다. 중산층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숱한 병과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것과 달리, 상류층은 방탕한 생활과 사치와 낭비에 의해, 하류층은 노동과 생필품 부족과 형편없고 불충분한 식사로 인해 그들이 밟는 생활 방식의 필연적인 결과로 자신들에게 신체적·정신적 병을 몰아온다는 것이었다. 중산층의 생활이 모든 미덕이나 즐거움을 누리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 평화와 풍요는 중산층의 하녀라는 것, 절제와 중용, 평온, 건강, 사교, 기분 좋은 온갖 오락과 바람직한 모든 쾌락이 중산층을 향한 축복이라고 했다.(「로빈슨 크루소」, 7쪽)
이 글을 읽고 신문에서 쉽게 눈에 띄는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 소식이 중류층보다 상류층과 더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중산층의 생활이 모든 미덕이나 즐거움을 누리기에 안성맞춤”이라면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즐거운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범인(凡人)은 축복받은 존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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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금시조」
오래전 이문열 작가의 소설 「선택」(1997년 출간)을 읽고 저자가 반페미니즘 성향이 강한 것에 크게 실망하여 오랫동안 그의 책을 읽지 않았다. 그의 반페미니즘은 그 당시 신문에도 오르내리며 화제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얼마 전 오디오북을 들으려고 책을 고르다가 「금시조」라는 소설집에 담긴 단편 ‘사과와 다섯 병정’을 들어 보게 되었는데, 역시 이문열 작가는 소설을 참 잘 쓰는 작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종이책을 사서 천천히 음미하며 읽고 싶어 「금시조」를 구매했다. 「금시조」에는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 ‘어둠의 그늘’에서 밑줄을 그은 문장 중 뽑아 옮긴다. 미결수로서 감방에 수감되어 있는 ‘나’가 마음속으로 말했다는 글이다.
그리고 때로는 김광하 씨처럼 나도 기묘한 논리에 빠져들곤 했다. 예를 들어, 창살 밖으로 자유롭게 나다니는 모든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향해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당하는 이 고초를 보며 청년들은 성실하게 병역의무를 수행하고 당신들의 재산은 보호된다. 여기 강간한 동료가 와 있음으로써 당신들의 딸과 아내는 능욕당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 폭력범이 있으므로 당신들은 부당하게 폭행당하지 않을 것이고, 여기 증뢰자가 있으므로 당신들의 공무원은 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이곳에서 고통당하는 것은 순전히 당신들의 평안과 이익을 위해서이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감사하라…….”(「금시조」, ‘어둠의 그늘’, 126쪽)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은 자가 있을 듯하다.
『감방에 수감되어 있는 자기네들에게 감사하라니 어이가 없다. 아무튼 인간은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말로도 둘러댈 수 있고 못하는 말이 없다. 자기들 때문에 국민 혈세가 낭비되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번엔 어떤 말로 합리화할 것인지 궁금하다.
감방 안에 있는 그들 말고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감방에 수감될 가능성이 높은, 질이 나쁜 사람들이 여기 저기 있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늘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다. 집에서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단속을 해야 하고, 밖에서는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주의 깊게 살펴야 하고, 갈수록 교묘해지는 보이스 피싱이나 스미싱으로 인한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사느라 편안한 삶을 살 수가 없다. 누구든 제발 남에게 해를 입히는 짓 좀 하지 말아 다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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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
지난 6월에 스미싱 피해를 입을 뻔했다. 택배 기사라고 하면서 한 남성이 내게 전화를 했는데 내 이름으로 삼성 카드가 발급되어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카드 발급을 신청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전달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대리 수령인이 따로 있었으며, 전달받을 집 주소도 우리 집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사기를 치는 것 같다고 내가 말하자 택배 기사는 ‘소비자 보호원’에 신고하라면서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 전화번호로 전화하니 한 여성이 바로 전화를 받았는데 온라인 접속을 통해 신고하라면서 자기가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한다. 내 스마트폰으로 온라인 접속을 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이 놓이질 않았고, 뭔가 수상한 음모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온라인 접속을 할 줄 모른다는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기극이었다. 두 사람이 짜고 치는 고스톱에 속아 내가 사기를 당할 뻔한 것이다. 신기한 것은 택배 기사가 내 폰의 전화번호와 내 생년월일을 말하는데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러분도 조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