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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책만 보는 바보
  • 사막의 안토니우스
  •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 13,500원 (10%750)
  • 2015-03-19
  • : 578

페트라르카의 일련의 저작을 읽는 가운데, 사막에서 홀로 고독한 수행을 하는 인물들에 관한 내용이 더 궁금해졌다. 이 책의 주인공인 안토니우스는 들어보지 못하였지만, 저자인 아타나시우스는 세계사에서 언급되었던 인물이다. 언제나 아리우스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수도원 같은 단체생활이 아니라 홀로 외딴곳에서 숨어 지내며 수행을 하는 사람을 기독교에서는 은수자라고 부르나 보다. 어쨌든 안토니우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을 거쳐 백세 이상의 삶을 누렸던 그는 수도승의 시조, 은수자의 사부로 평가받는다. 이 말은 안토니우스 이전에 사막 또는 산속에서 홀로 수도하는 관습이 없었다는 뜻이리라.

 

여기서 드는 궁금증. 왜 안토니우스는 기존처럼 집에서, 마을에서, 마을 근처에서 수행하면 되는데 굳이 인적이 드문 곳을 골랐을까. 이것은 그의 수행이 금욕수행이기 때문이리라. 그는 육체적 욕구를 극도의 최소한으로 충족시키며, 일체의 정욕을 억제하고자 한다. 육체가 풍요로워지면 마음이 느슨해지고, 정욕을 쫓다 보면 신심이 흩어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안토니우스는 애초에 세속의 유혹을 차단하기 위해 최대한 자급자족하며 숨어 지냈던 것이 아니겠는가. 사막과 깊은 산속처럼 인적이 드문 곳은 세속의 유혹이라는 측면에서 안전하지만, 야생의 위협에 취약하며 안토니우스가 끊임없이 투쟁하였던 악령이 난무하는 장소이다. 위험으로 가득하지만 여기서 승리하며 영광을 구할 수 있는 곳.

 

“그러나 네가 참으로 평화 중에 살고자 한다면 내적 사막으로 가거라.” (P.122)

 

“사막에 거주하며 평화를 찾는 사람은 세 가지 싸움에서 벗어났는데, 곧 귀와 혀와 눈의 싸움이지요. 그에게 오직 마음의 싸움, 이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P.184, 금언)

 

안토니우스는 악마, 악령과 그침 없는 대결을 벌인다. 그의 정진이 심오할수록 악령은 한층 거칠고 적극적으로 그에게 도전한다. 악령이 성자와 성경을 두려워하여 멀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들은 동료이자 우호자인 양 그들의 눈과 귀를 속인다. 강약과 화전의 모든 수법을 동원하여 악령은 수행자를 유혹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애쓴다. 영적 구원에 실패하는 사람이 많아야 그들은 즐거우므로.

 

정신과 영혼 면에서 깊은 수양을 쌓을수록 어찌 악령의 유혹이 많아지는가. 여기서 악령은 실체인가 허상인가. 육체와 정신의 욕구를 억압할수록 내면의 본능은 이를 충족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발현하기 마련이다. 본디 내게서 나온 것이지만 내가 허용할 수 없는 현상, 곧 그것의 물화가 수도자의 악령 아닐까.

 

수양이 높아질수록 그의 영적 능력은 한층 강력해진다. 악령의 물리침은 물론, 광인과 병자를 치유하는 예시를 이 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안토니우스가 부인하듯이 오로지 높으신 분의 능력이라고 할지라도 속세인의 눈에는 그의 행위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낭중지추라고 한다. 아무리 숨어 지낸다고 할지라도 그의 명성을 눈덩이처럼 커지고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 안토니우스의 주변에 몰려들어 수행을 따라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문맹이다. 글자를 전혀 모른다는 뜻인지 아니면 성경 해독을 못 한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그가 성경과 종교 이론에 해박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여기 실린 안토니우스의 가르침과 서간 내용을 보면 그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금욕과 기도로 절대자에게 다가가라는 게 요지다. 대중과 교회의 요청에 따라 그는 가끔씩 은수처를 떠나지만 볼일을 마치면 황급히 귀가하였다. 로마 황제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고 수사로 영원히 남았다.

 

우리는 범인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일을 행한 사람을 존경한다. 안토니우스의 삶이 그러하다. 모든 기독교도가 그를 따라 은수자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며, 될 필요도 없다. 그의 금욕수행은 극단에 치우쳐 고행을 지향한다. 모든 종교적 수행은 일정 부분 금욕을 요구하지만 고행이 과도하여 자기학대에 가까우면 곤란하다.

 

육체는 무엇보다도 단식과 숱한 철야, 그다음 육체를 쇠약하게 하고 육체의 온갖 욕구를 끊는 다른 모든 금욕적 수행을 통해 순수하게 됩니다. (P.213, 서간 1)

 

안토니우스는 아타나시우스의 글로 인해 불후의 영광을 얻었다. 반대로 아타나시우스 또한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기록함으로 인해 영원한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아타나시우스의 전기 자체로만 보자면 흥미롭다. 인간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신앙인의 전범으로 그를 바라봤기에 글에는 온통 종교적 이적과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모든 걸 떠나더라도 자신의 믿음을 완성하기 위해 모든 걸 버리고 평생을 헌신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확실히 값어치가 있다. 비기독교인의 시각에 이 정도인데 기독교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그의 금언 38개와 서간 7편이 동일한 맥락이다.

 

그나저나 이집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다 간 안토니우스가 오늘날 그곳이 기독교도를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이슬람 땅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게나 기독교 이단 아리우스파를 배척하고, 그리스 철학자들과 논쟁하였던 안토니우스가. 마지막으로 그의 금언 중 하나를 소개한다. 관용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다.

 

“사람들이 실성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이 미치지 않은 누군가를 보게 되면 ‘넌 미친놈이야!’라고 말하며 그를 공격할 것입니다. 단지 그가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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