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안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의 저작집을 읽다가 문득 호기심이 생긴 인물이 이 책의 저자인 그레고리오 대종, 즉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다. 평생 은수자로 살아가길 바랐으나 불가피하게 교황이 된 인물이다. 서양음악의 원류인 ‘그레고리오 성가’의 주인공과 동일인임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레고리오 대종은 <대화집>이라는 네 권의 저서를 남기고 이탈리아의 종교 성인과 그들의 일화를 두루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소개한 사람이 바로 베네딕도[베네딕토, 베네딕투스]이다. 솔직히 베네딕도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베네딕트 수도회는 들어본 기억이 있다.
아타나시우스로 인해 이집트의 안토니우스가 기독교 세계에서 유명해졌듯이, 그레고리오 대종의 저작은 이탈리아 산속의 일개 수사에게 불후의 명성을 갖게끔 하였다. 비록 표제는 전기라고 되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전기는 아니다. 베네딕도의 출생과 죽음을 다루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가 수사로서 겪는 영적 시련과 깨달음을 통해 기적을 행하는 사례 모음집이다.
<대화집>의 전체 구조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레고리오는 성 베네딕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성인들을 들러리로 세우는 형식을 취한 것은 이탈리아의 성 베네딕도를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나 갈리아의 성 마르띠누스와 필적할 인물, 아니 그 이상의 인물로 소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P.77, 해제)
장문의 해제를 제외하면 180면 남짓한 본문인데, 본문은 라틴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문의 대역 구조로 이루어진다. 분량으로도 수록 내용으로도 읽기에 부담될 수준은 아니다. 저자 그레고리오와 수사 베드로 간의 대화 형태로 진행된다.
저자가 강조하는 점은 수사로서 베네딕도의 불멸의 모범성과 위대성이다. 그는 이미 수비아꼬 시기에 각종 시련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이전에도 이적을 행하였지만 그를 질시하는 다른 수사들을 피하여 몬떼까시노에 정착한 이후 기록은 방대한 이적의 기록이다. 때로는 저자가 베네딕도를 너무 신성시할 정도로 띄우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에 따르면 베네딕도는 제자에게 물 위를 달릴 수 있도록 하였다. 사탄과의 잇따른 대결은 가뿐히 제압할 정도며 예언의 능력마저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의 소관이라고 손사래 치던 죽은 이를 살리는 이적마저 이루어냄으로써 베드로와 같은 사도와 동격으로 추앙한다. 제35장에 이르면 거의 천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을 정도다.
하느님 안으로 이끌려 올라간 그분은 하느님 이하의 모든 것을 (아무) 어려움 없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분 눈에 비춰졌던 외적 빛 안에는 영혼의 내적 빛이 있었다. (P.231, 제35장)
그레고리오가 유독 베네딕도를 높이 평가하는 사유는 무엇일까? 이탈리아에도 위대한 성인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가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거의 동시대 인물로서 훗날 베네딕도 수도회가 크게 발전하였음을 내다봐서도 아니리라. 그레고리오 대종이 교황에 재위하던 시기는 이탈리아에서 일대 혼란기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이 한때 이탈리아를 수복하였으나 다시 세력을 잃고 이탈리아반도는 주인 없는 땅으로 여러 게르만족이 횡행하여 법과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윤리적, 종교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전범을 내세우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게다가 베네딕도가 몬떼까시노에 세운 수도원은 로마 신전의 자취에 자리 잡았으니 이교도 선교의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레고리오는 현실을 인정하고 게르만족을 포교 대상으로 삼는 정책을 폈는데, 그들에게 멀리 있는 그리스도와 사도들보다 베네딕도가 훨씬 현실적으로 소구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저자의 집필 목적이 어떠하고, 기독교인이 베네딕도를 어떤 존재로 존경하는지와 상관없이 나와 같이 비신도들에게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일단 그의 무수한 이적은 흥미로운 일화, 즉 옛날이야기로 생각하면 된다. 중요한 건 그가 육신적, 정신적 유혹을 물리치고 치열한 수도를 거쳐 차근차근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마침내 도달하였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풍요로운 물질로 넘쳐 나고 있기에 오히려 정신적으로 빈곤하고 타락할 위험이 크다. 베네딕도의 삶에서 어떤 교훈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체로서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베네딕도는 <규칙>이라는 책을 유일하게 남기고 있다. 이는 수도원과 수사들이 올바른 수도 생활을 위해 지켜야 할 규칙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따르는 수도원들의 연합체가 베네딕트 수도회라고 한다. 단순히 규칙서라면 내게는 관심 밖일 터인데, 그레고리오는 여기서 솔깃한 발언을 하고 있다. 조만간 이 규칙서도 대강이나마 훑어봐야겠다.
만일 누가 그분의 생활방식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면, 그분이 제정한 규칙서 안에서 지도하신 그분의 모든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실상 성인께서는 당신이 사신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도무지 가르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P.233. 제3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