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전기>를 읽은 후 자연스럽게 그의 <규칙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타인의 기록이 아닌 베네딕트 자신이 기록한 수도 생활의 규칙. 이로써 우리는 베네딕트 자신의 수도 생활의 실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규칙서>는 대략 삼종이 있다. 분도출판사의 이형우 역본은 <베네딕도 전기>와 같은 형식의 라틴어 원문 수록에, 충실한 해제에 추가된 연구서 느낌이다. 들숨날숨의 허성석 역본은 본문 외에 상세한 해설이 추가되어 분량이 두툼하다. 나로서는 종교적 목적보다는 베네딕트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한 것이므로 제일 작고 가벼운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은 서론과 73 개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장의 분량이 간략한 편이므로 읽기에 그리 부담되지 않는다. 내용 자체도 심오한 종교와 철학적 성격보다는 수도 생활의 실체적 규율에 있으므로 난해하지 않고 직접적, 구체적이다. 73개나 되는 규칙이 있다면 골치 아플 수 있겠지만, 기도와 찬송의 순서, 수도원 내의 위계질서, 주방과 식사, 손님 영접, 입회 절차 등 수도 생활의 전반적인 부분을 두루 다루고 있기에 때로는 이걸 규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정도의 항목도 들어있다.
이 학교의 규정을 정할 때, 우리는 가혹하거나 부담스러운 것은 그 어느 것도 세우길 원하지 않는다. (P.18, 서론)
베네딕트는 이러한 규칙이 절대로 가혹하거나 무거워서는 안 된다고 새삼 강조한다. 규칙은 어디까지나 수도 생활의 도움을 위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리라. 어쨌든 수도원이라는 단체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기초적인 규율은 불가피하다. 개인 생활에서도 필요할진대 단체 생활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게다가 베네딕트는 은수자보다는 수도원 생활을 보다 권장하는 삶으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충성스럽게 매진해야 하는 작업장은 수도원의 울타리 안과 공동체 안에서 정주하는 삶이다. (P.34, 제4장)
제4장 ‘선한 일을 위한 도구들’에 보면 준수해야 할 세부적 지침이 너무 많아 깜짝 놀라게 된다. 설마 이 모든 걸 수도사들이 다 지킬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건가? 그렇다면 지나친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만 보면 어렵겠구나 하다가도 현실 타협을 보이는 사례도 있으니 제40장의 수도사의 포도주 과음을 자제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수도 생활은 세속을 떠나 오롯이 생활 전부를 영적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바치는 삶이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조화 속에 규율을 통한 자기 규제와 상호 권면의 각오. 그러하기에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일’이 최우선시되어야 한다. 새벽기도, 낮기도, 저녁기도와 마지막기도를 포함하여 하루에 7차례의 기도 의식을 행하는 동시에 휴식과 독서, 노동을 병행하는 생활은 결코 간단치 않다. 자칫하면 의지가 약해지거나 규율이 무너질 수 있기에 외부인과의 접촉은 최대한 피해야 하며, 아무나 쉽게 수도자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이다.
베네딕트는 수도 생활의 가장 큰 덕목을 겸손과 순종으로 강조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없이 낮음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제7장에서 겸손의 열두 단계를 차근차근 제시하는 것은 그만큼 겸손이 갖는 중요성을 뜻한다. 수도원장은 가장 덕목이 높은 수도사를 추대해야 한다. 수도원장을 압바스 또는 압빠스라고 하는데, 이는 그가 지위상으로 아버지와 같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의미다. 그러기에 수도원 운영과 규율 유지에 있어 그에 대한 순종은 곧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동격으로 강조한다.
순종은 모든 자들이 수도원장에게뿐만 아니라 또한 형제들 서로서로에게 나타내야 할 덕목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순종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P.126, 제71장)
베네딕트는 모든 수도원에 공통적인 규범을 만들기 위해 이 <규칙서>를 저술한 게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과 동료 수도사들이 생활하는 수도 생활이 공공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가 강조하는 제반 규칙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규칙과 자신이 수도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지혜가 결합한 것이다. 그의 규칙들을 통해 우리는 베네딕트 자신의 수도 생활의 모습이 어떠한지 역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탈리아 산속의 한 평범한 수도사인 베네딕트가 작성한 <규칙서>의 영향력은 후대에 매우 커다란 파장을 미쳤다. 오늘날 ‘베네딕트 수도회’라는 모임은 베네딕트가 조직한 수도회가 아니다. 그가 제시한 수도 생활의 규칙을 준수하는 수도회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라고 한다. 세속과 종교의 물질적 욕망의 세계와 인연을 끊고, 오로지 영적인 깨달음과 성취만을 간구하는 그들의 절실함과 진지함은 점점 더 욕망으로 넘쳐나는 현대 사회일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 규칙을 기록한 까닭은, 수도원에서 이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우리가 어느 정도의 덕목을 갖추고 있으며 수도생활의 시작점에 있다는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P.128, 제7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