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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책만 보는 바보
  • 무굴 제국의 역사
  • 마이클 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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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5
  • : 1,670

세계사 수업에서 무굴 제국에 대해 배운 적 있다. 인도의 마지막 제국으로 악바르 대제 시절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대영 제국에 멸망한 나라. 훗날 무굴 제국이 몽골족의 후예가 세운 나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무굴 제국에 대해 아는 전부다. 그리고 무굴 제국의 역사 개설서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굴 제국은 일정한 엘리트층과 거의 단일 종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린 토착 제국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무굴 왕조는 다양한 문화권과 집단 중에서 취사선택했으며, 왕조 역사 내내 군주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긴장이 계속되었다. (P.24, 들어가며)

 

무굴 제국은 인도의 토착 제국이 아니라는 점이 이 나라의 운명과 사후 평가를 좌우한다. 인도인에게 무굴 제국은 외부세력이다. 본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지역에 거주하던 바부르 일족이 세력다툼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와 힌두스탄을 공략하였다. 대개의 유목 제국은 농경 문화를 약탈하고 물러나는 게 일반적이지만 바부르는 아예 힌두스탄에 자리 잡고 나라를 세웠으니 그게 바로 무굴 제국이다.

 

무굴 제국은 끊임없이 영토 확대를 도모하였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포함하여 북인도 전역을 손에 넣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중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것은 그들의 선조인 칭기즈 칸과 티무르와도 흡사한데, 유목민족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통치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영토 확장은 사상누각에 불과한데, 끊임없이 생기는 반란을 다스리기 위하여 군주는 항상 국토를 종횡무진 누벼야 하기 때문이다.

 

무굴 제국의 황제들은 항상 사마르칸트를 마음의 고향으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힘을 더 키울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잃어버린 고향을 수복하리라 하는 마음은 바부르부터 최소한 샤 자한까지는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지배하는 인도에 온전한 마음을 주지 않았을까. 그런 까닭인지 무굴 제국의 지배층은 결코 인도 토착 문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종교는 이슬람 수니파이며, 언어와 문자는 페르시아를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인도인들은 그저 피지배층일 따름이다. 이것은 몽골과도 비슷한데, 몽골 지배층은 중화 문명에 동화되지 않았고, 뒤에 힘이 쇠락하여 중화에서 철수하였지 결코 민족이 패망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인도인의 불균등한 동화가 무굴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강조한다. (P.415)

 

이러한 평가는 사실 선택의 문제다. 지배 세력이 피지배 세력과 차별적으로 남을 것인지 동화될 것인지. 몽골은 차별하였고, 만주족은 동화되었다. 그렇다고 청 제국이 영속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떠한 정책이든 전성기 시절에는 잘 굴러가서 좋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고 나라가 어지러울 땐 부정적 평가로 돌아서기 마련이다.

 

무굴 제국의 반복되는 왕위 계승권 분쟁을 보면, 이것만이라도 정리가 되었다면 제국이 좀 더 오래 유지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따른다. 분쟁에 따르면 어마어마한 혼란과 무수한 인명의 살상을 말할 나위도 없다. 적장자상속제가 최고의 제도는 아니지만 최소한 왕위 계승권 분쟁을 감소시키는 효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예시가 바로 무굴 제국이 아닐까. 유목 전통의 강인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리라.

 

반세기를 재위한 악바르 황제는 무굴 제국의 최전성기로 일컬어진다. 그는 중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강역을 점령하였고, 무엇보다 이 책의 서술에 따르면 제국의 튼튼한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계급, 군대, 행정, 세금 제도를 마련하였다.

 

악바르의 측근들은 토지세.자기르.지방 행정 제도를 하나로 묶은 체제를 개발하는 한편, 최고위 장령과 관리를 위한 10진법식 계급 구조인 만사브 제도를 만들어 냈다. (P.183)

 

악바르에게 있어 특이한 점은 그의 종교적 관용이다. 그는 순니파 이슬람을 신봉하였지만, 자신의 라지푸트 아내들의 힌두교 신앙을 인정하였다. 지배층에 일정 부분 라지푸트를 허용하기도 하는 등 악바르의 관용 정책은 무굴 제국을 단순한 침략 외세가 아니라 제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위력을 수용하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는 그의 증손으로 무굴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던 황제였던 알람기르(아우랑제브)와는 전혀 다른 방침이었다. 알람기르는 이슬람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힌두교도에게 불리한 조치를 강제하였다. 그의 여러 실책 중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과오에 해당한다. 알람기르의 사후 무굴 제국이 급격하게 무너지게 된 배경은 결국 피지배층의 격렬한 반발에 있다.

 

인도의 대표적 볼거리로 타지마할을 꼽는다. 황제가 죽은 자기 아내를 기념하기 위한 건축물로 알고 있는데, 그 황제가 무굴 제국의 샤 자한임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엄연히 페르시아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영묘, 즉 무덤이다. 무굴 제국은 여러 영묘를 건설하였는데 타지마할이 가장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알람기르(아우랑제브)의 죽음은 곧 무굴 제국의 쇠망기로 이어진다. 그는 중인도를 정복하여 무굴 제국의 최대 영토를 이루어냈지만 그건 속 빈 강정이었다. 저자는 무굴 제국 황제들의 데칸 지방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손실과 정치적 불안정을 지적한다. 알람기르는 샤 자한을 유폐시키고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힌두교를 박해하여 사회 불안을 야기하였고, 무엇보다 자식들의 힘을 빼앗아 섭정들이 황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알람기르의 조치로 왕위 계승권 전쟁을 벌이기 위한 단독적 힘이 왕자들 가운데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굴 제국의 삼백 년 역사를 반분하면 전반기는 개국과 발전, 전성기인 반면 후반기는 쇠망과 멸망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추락의 시기다. 명목뿐인 황제는 섭정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고, 지방은 제각기 독립국을 자처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벵골에서부터 야금야금 인도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우리네 조선 왕조 말기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백 면에 달하는 분량 가운데 부록을 제외한 본문은 약 사백 면 정도다.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계보도 목록, 황제 가계 연표, 핵심 개념들의 부록이 풍성하다. 왕조사 또는 정치사에 치중한 탓에 문화, 경제 관련 내용은 상대적으로 빈약함이 이 책의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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