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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책만 보는 바보
  • 한강
  • 10,350원 (10%570)
  • 2016-05-25
  • : 10,002

수년 전에 구입한 책인데, 아무리 서가를 뒤져도 찾을 수 없다. 기가 막힌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도서관 신세를 빌린다. 표제 아래 ‘한강 소설’로 명시하고 있다. 왜 굳이 소설이라고 강조하는가. 독자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 그것도 시적 산문으로 받아들일 우려 때문인가. 작가의 자전적 성격과 에세이적 요소가 짙게 담겨 있다. 어쨌든 작가는 분명히 이를 소설이라 밝힌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위기 자체는 작가의 의도적 연출이리라.

 

흰 것에 대해 쓰겠다는 화자의 결심은 흰 것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슨 연유로 흰 것에 대한 글을 쓸 마음을 먹었을까. 흰색이 상징하는 의미는 다양하다. 순결, 순수가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눈과 얼음에서는 투명함과 차가움이 연상된다. 극도의 뜨거움은 흰색에 가깝다. 백발과 수의는 소멸, 죽음과 연관된다. 음양오행에 따르면 서쪽은 저승을 가리키며, 색으로는 흰색이라고 한다. 괜히 좌청룡 우백호가 아니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P.10, _)

 

화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변화시키고자 희망한다. 한편으로 흰 거즈 아래 숨는 게 아닐까 망설이는 심정이다. 화자의 바람과 주저는 이후 서술하는 다종다양한 흰 것에 대한 문장을 통해 하나씩 확인해 볼 수 있다.

 

달떡같이 희고 어여쁜 아기에 대한 회고가 반복적으로 서술된다. 스물세 살 산모가 조산하여 두 시간 동안 살다가 삶을 이별한 아기, 화자의 언니.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에도 미처 세상을 겪지 못하고 떠나간 아기 언니를 화자는 계속 의식한다. 그 아기가 무사히 자랐다면 자신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아기 언니와 화자는 대척점에 놓인 관계이다. 화자는 아기 언니에 대해 모종의 부채감을 지니는가. 또는 자신의 힘겨운 삶을 대신 떠넘길 수 있기를 바라는 일종의 대체 인물인가.

 

그렇게 당신이 숨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결국 태어나지 않게 된 나 대신 지금까지 끝끝내 살아주었다면. 당신의 눈과 당신의 몸으로, 어두운 거울을 등지고 힘껏 나아가주었다면. (P.118-119, 당신의 눈)

 

화자는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한다. 한 개인 또는 집단에게, 사회 전체에게, 아니면 국가로부터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결국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로 도망치듯 떠난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절대적 고독감에 휩싸인 그녀. 무상적 사물인 하얗게 내리는 눈에도 날카롭게 반응할 정도의 심정.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P.55, 눈송이들)

 

극도로 자폐적인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흰 개와 지금 그녀의 처지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니면 화자의 좌절과 고통은 내면에서 비롯한 것은 아닐까. 그녀는 왜 “모국어 문장, 혹은 몇 개의 단어들이 불쑥 떠올라 혀밑에 고이기를”(P.50, 주먹) 기다려야 하는가. 화자를 작가와 동일시한다면 글쟁이로서 한계에 봉착했다는 자각은 아니었을까.

 

원인이 무엇이든 그녀는 삶에서 상처를 받았고 고통을 쉽사리 잊지 못한다. 아기의 죽음, 유대인 게토에서 학살당한 죽은 어린 형의 넋, 공포로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흰 개, 멸치 떼의 신비를 화자에게 알려주고 이태 뒤 세상을 떠난 작은아버지, 무명 소복을 선물로 불태우는 대상인 망자인 어머니. 비슷한 시기에 죽은 대학 동기 두 사람.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83, 각설탕)

 

후반부에서 화자는 치유와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순면의 침대보에서 받는 위로는 절대 이상하지 않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당당할 수 있다면 내외의 고통도 나를 부식할 수 없다. 새로운 회고 속 스물세 살 난 어머니에게서 조산한 아기는 의식하지 못한 채 젖을 물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온다. 화자는 비로소 죽은 아기 언니의 기억에서 벗어나 그녀를 놓아줄 수 있다. 그것이 “최선의 작별의 말”(P.128, 작별)이다. 죽지 말라고 하는 중얼거림은 아기에게 뿐만이 아니라 자신에도 해당하는 애절함의 반영이리라.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P.36, 빛이 있는 쪽)

 

이 작품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수많은 단편적인 흰 것들의 이야기는 개별로서 어렵지 않지만, 그것들이 전체로서 갖는 이야기는 다른 차원이다. 작가의 집필 동기를 헤아리기 어렵다. 작가가 화자의 형태로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이 짤막한 소설에서 독자는 자기의 이해와 감정와 염원에 따라 제각기 다른 독해를 얻게 된다. 흰 것들의 이미지와 이야기에 보다 큰 의의를 부여하는 독법도 의미 있다.

 

다만 우리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상실하고 상처받고 세상에 등을 돌려 슬픔과 괴로움으로 함몰하려는 화자. 그 순간 모든 흰 것들의 이미지와 기억과 추억을 통해 빛과 밝음의 세계, 생명의 세상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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