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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의 서재
  • 어둠에 새기는 빛
  • 서경식
  • 22,500원 (10%1,250)
  • 2024-12-18
  • : 4,188
서경식 선생님이 타계한지 어느덧 1년하고도 수개월이 지났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책에 이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2011년부터 2023년까지 칼럼의 내용을 엮어서 모아 놓은 것이다.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려니 어쩐지 안타까움과 함께 씁쓸함이 몰려왔다(사실 눈물을 좀 훔치기도). 2차례의 큰 세계 전쟁을 거친 후 최소한의 선의와 도덕, 양심에 기반한 정책들이 후퇴하고 전 세계적인 반동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저자처럼 타자에 대한 선의와 양심을 가진 지식인은 세상을 뜨고 있고 자기 자신만 알고 잘못된 혀와 지식을 놀리는 인간은 배를 두드리는 형국이라니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다.
책에 플래그를 붙여나가다가 포기했다. 공감가는 말들이 대부분이라 어느 순간에 플래그를 더 이상 붙이지 않고 계속 읽었다.

서두에 노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늙음을 마주한다. 갑작스런 사망이 아니라면 자연스레 누구나 노인이 되기 마련인데 우리는 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곱씹어야 한다. 우리는 노인을 더 이상 생산력이 존재하지 않는 무용한 존재이자 짐짝처럼 취급하려하지 않는가 말이다. 저자는 그런 압력에 반기를 들며 결코 생산력이나 이윤으로 잴 수 없는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얼마 후 다가올 나의 노년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볼 질문이다.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온 저자에게 ‘디아스포라’는 저자의 삶에 응축된 단어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을 차지한 것도 디아스포라, 경계를 넘나든 지식과 이를 설파한 사람들의 향연이었다.

악몽의 시대 예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여겨진다. 예술마저 권력에 빌붙은채 눈치를 본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숨구멍을 찾을 것인가.
허가를 받아야 하는 예술. 예술가는 그런 허가에 눈치를 보게 되는 현실. 그러나 예술가는 허가가 있든 진실을 발굴하고 이야기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종말‘의 도래를 막을 수 없다.(P151)
이 책에서는 많은 예술 작품과 예술가를 다루지만 그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윤이상이다. 그는 동베를린 사건(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 사건.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 교육을 받고 대남 적화 활동을 펼쳤다)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서독 정부 등의 항의로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2024년 7월 대법원 결정에 따라 윤이상에 대한 재심이 확정되었다).
어느 예술가가 ˝꿈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꿈을 모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실로 윤이상의 생애는 이 꿈처럼 절대적인 해방의 환희에 겨우 4분의 1음을 남기고 도달하지 못하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또 그것은 그 개인적 좌절의 역사라기보다 우리 민족의 경험을 상징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4분의 1음이라는 미세한 공극이 만들어 내는 음의 울림이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美)‘을 낳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P206~207)
그의 생애는 너무나 안타깝다. 한반도의 분단 이후 지나치리만큼 매몰된 이념 사회로 그는 남한을 결국 끝끝내 방문할 수 없었다(남한은 끝끝내 자신들의 입장을 윤이상에게 강요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그는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영상>(1968)을 작업했다. 당시를 생각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에 간 것이었을텐데 정말 많은 용기를 갖고 떠난 것일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사고가 난 이후 여러 차례 주변 지역을 방문해서 기록을 남겼다. 후쿠시마에 갈 때마다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현실만이 지니는 비현실감‘이라고나 해야 할까. 이미 결정적으로 손상당했고 지금도 계속 위협에 노출된 환경.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얼핏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다.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것이 매우 비현실적으로 생각된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방사능 재난의 특질이 아닐까. 요컨대 방사능 재난은 우리의 감각이나 상상력의 원근법에 도전한다.(P227)
후쿠시마의 일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게 된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괜찮겠지, 거기서 많이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으니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 말이다. 저자는 그것을 ‘동심원의 패러독스’라고 명명하는데 우리는 거기에 갇혀서는 더 나아진 환경을 만들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이 요구된다는 저자의 일침에 자극을 받게 된다.
프리모 레비는 나치 수용소의 만행에 대한 증언으로 주목을 받았다. 타자의 고난에 대한 상상력과 존중 의식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알고 있다. 특히나 증언의 불가능성을 깨고 용기를 내주었기에 그의 말이 계속 살아남아 유효성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상화는 1922년 간토 대지진을 목격하고 돌아와 조선의 식민 지배 수탈을 확인하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를 지어 조선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동시에 재일조선인의 마음을 노래하였다. 그 무렵 재일조선인의 1세대가 일본에 형성되었다. 조선의 환경이 악화되어 떠밀려 일본에 정착한 이들이었다.
프리모 레비의 말과 글, 이상화의 시와 후쿠시마를 관련 짓는 일은 동심원의 패러독스를 뛰어넘는 하나의 행위가 되었다.

냉전은 끝났으나 그 후 분단이 고정화되면서 세계는 오히려 극우화되어가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전후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더욱 사태는 심각해졌다고 느낀다.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악마화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여기에 미국과 유럽, 중동의 책임도 무관하지 않다). 남북한의 대립과 끊임없는 위기, 미국과 유럽의 이민 배척의 심화(이는 한국도 마찬가지), 일본의 평화헌법 폐기와 군사국가 행보, 장기 집권하는 푸틴에 빌붙어 권력을 30년 이상 놓지 않고 있는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여전히 진행중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등등.
피에르 비달-나케는 기억을 부정하려는 자들을 향한 경고의 저술을 남겼다. 기억을 살해하는 것은 언어를 살해하는 것이라는 말이 인상깊다. 일본이 패전을 종전이라 표현하고 전멸을 옥쇄라 명령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까. 일본의 전후 지식인인 가토 슈이치는 <언어와 탱크>에서 ‘탱크는 모든 목소리를 침묵시키고 환경을 파괴시킬 수 있지만 탱크라는 존재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혹함의 역사는... 언제 끝을 고할까. 애당초 그것이 ‘끝날‘ 수는 있을까.(P272)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왜 인간은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는지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나를 냉소주의로 점점 몰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안되. 그래봤자 안되. 이전에도 똑같았잖아.’ 이런 생각들 말이다. 이상이 없으므로 힘과 돈만을 진실로 여기는 시대, 국가주의가 횡행하고 이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국가주의를 앞장서 추종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상마저 포기한다면 결국 돈과 권력 같은 욕망에 정복당해 파멸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인간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연대‘다.(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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