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 자기치유와 자기돌봄을 위한 자기관계 심리학
문요한 지음 / 해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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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해법은 자기와의 관계를 이해하고 삶의 동반자로서 스스로에게 친절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돌봄'이다. 우리는 흔히 돌봄을 나약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마치 아이들에게나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평생 동안 돌봄을 필요로 한다. 고통은 삶의 일부이며, 우리는 취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체적 돌봄과 함께 정서적 돌봄도 필요하다. 나아가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가도록 관계를 돌보는 것도 필요하고, 활력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영혼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다. 돌봄은 전인적이고 총체적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돌봄이란 한마디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9


당신은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자존감도 높아지고 성격도 좋아지고 친구도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자기 부족함 때문에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자아상 때문에 자기 부족함에 집착하는 것이다. 내면화된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어내지 않는 한 내적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인 결과가 자신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뜨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삽질을 멈추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 질문을 맞닥뜨릴 것이다.

'나는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이러한 고질적인 자기비난의 습성을 약화 시킬 수 있는 것은 진실뿐이다. 자기비난은 문제나 결점을 실제보다 확대 시키고, 미래로 확장 시키고, 문제를 존재와 일치 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비난이 들리면 우리는 무엇보다 진실을 살펴보아야 한다 '정말 그런가?'를 물어야 한다. '내가 정말 실패자인가?''정말 해도 안 되는 것인가?''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없는가?''나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인가?'라고 말이다,

자신에 대한 느낌과 생각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은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리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이제 이 질문을 당신에게 드리고자 한다.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이 질문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 57



게다가 실제 부모들이 자기 고통과 불행을 자녀들 탓으로 돌린다면 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너 대문에 내가 못살겠다''넌 왜 사람을 힘들게 하니!''넌 매사 거짓말이야''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도대체 넌 누구 닮아서 그 모양이야' 하는 말들은 고스란히 아이의 마음속으로 내면화 된다. 이는 신경학적 손상을 초래한다. 각성조절, 감정조절, 충동조절의 창이 협소해질 뿐더러, 면역력, 수명, 인지기능 전반을 떨어뜨린다. 특히 자율신경계의 조절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가장 원시적인 자기보호시스템인 '부동화'를 자꾸 초래하게 된다. 작은 위협만 가해져도 얼어붙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스트레스 반응패턴은 고정화되어 이후 비슷한 자극에도 쉽게 얼어붙어 버리게 된다. 74


원초적 수치심, 신경증적 죄책감, 근본적 무력감은 아동기에 부정적 경험을 겪은 사람들의 핵심 감정이 된다. 일반적인 감정은 어떤 자극과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데 비해 핵심 감정은 자극과 상황에 상관없이 마음의 바탕을 이룬다. 핵심 감정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올라온다.

그러므로 이들은 핵심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 나는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모든 게 나 때문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어떤 경우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술이나 게임 같은 중독으로 빠져들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역으로 타인을 깍아 내리고 자기가 우월하다는 나르시시즘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79


많은 경우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괜찮은 사람임을 타인으로부터 학인 받으려는 인정 강박을 지니게 된다. 이를 위해서 '나는 ~해야 한다''혹은 '나는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높은 기준과 지나친 당위를 만들어 낸다. 당위란' 당연히 그렇게 하거나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들일수록 당위적 사고가 많다. 즉, 당연한 것이 아님에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거나 도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이는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향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흔히 강한 사람, 똑똑한 사람, 사랑 받는 사람, 착한 사람, 성실한 사람, 독립적인 사람 등 자기 실재 보다 과장된 이상적인 자아상을 좇는다. 이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그래야만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80


내적 안전기지가 형성되지 않은 채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마음이 허하고 자꾸 흔들린다. 밖으로도 안으로도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애착 손상이다 고통 속에 혼자 방치되었거나, 돌봄을 받아야 할 시기에 돌봄을 받지 못했거나 오히려 때 이르게 누군가를 돌봐야 했던 이들이다. 이들은 그 공허감 때문에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우거나 다른 사람을 잘 챙기거나 많은 성취를 이루려고 애를 쓴다. 133


그러나 의지력 훈련에 있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은 의지력을 길러내는 정말 중요한 기회이다 의지력 훈련이란 계획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이를 알아차리고 다시 행동으로 돌아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즉 꾸준히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게 아니라 '재시도 능력'을 높이는 것에 목표를 둔다.  187


그것이 꼭 칼로 자해하는 것과 같은 노골적인 자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은밀한 자해를 동반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움직이다 잔 부상을 입고, 이를 거칠게 닦고, 안 좋은 자세로 계속 생활하고, 아무 음식이나 먹고,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잠을 안 자려고 애를 쓰고, 아파도 병원을 안 가는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이루어 진다. 

이들은 자기를 함부로 대하고 건강을 돌보지 않고 생활에 질서가 없고 삶을 가구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그러한 자신의 안 좋은 생활 습관 때문에 또다시 비난을 하게 되지만 사실은 자기 비난에 걸맞은 자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왜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을 더 큰 고통으로 몰아갈까? 정말 그렇게 비난할 만큼 잘못이었을까? 원래 그런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정말 친절이나 위로를 받을 만한 자격도 없어서 일까?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 혹은 '잘못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기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도록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잘못된 존재여서가 아니라 자기를 잘못된 존재로 느끼게 된 잘못된 경험 때문이다. 220


아픔은 보편적인 1차적 고통을 말한다면 괴로움은 주관적인 2차적 고통을 말한다. 1차적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거나 비난에 휩싸일수록 2차적 고통은 커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친절을 통해 1차적 고통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2차적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자기 친절은 힘들었던 수많은 날들을 견뎌온 나에게, 그리고 앞으로도 힘든 삶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나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응원이자 예의이다. 자기 친절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고통에 힘들어하는 자기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것이 목적이다.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그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자기 친절의 마음이 조금씩 스며들면 '내면의 관찰자'와 함께 '내면의 벗'으로 자리 잡는다.227


이는 모든 변화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뉴욕주립대학교와 피츠버그대학교의 중독 연구자들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절주를 하지 못하고 과음을 했을 때 어떤 심리적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관찰했다. 알다시피 술을 많이 마신 사람들은 그다음 날 두통, 구역질, 피로감 등으로 기분이 안 좋았다.

하지만 이들의 불행은 숙취로 끝나지 않았다. 전날 많은 술을 마신 것 때문에 자책하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일수록 그날 저녁이나 다음날 저녁에 술을 더 많이 마시는 일이 벌어졌다. 죄책감이 더 많은 음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236


다시 말해 즐거움은 도파민만 분비되는 것이라면, 기쁨은 도파민과 스트레스 호르몬이 함께 분비되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행복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과 쾌감이 섞여 있거나 혹은 불쾌감을 거치고 난 뒤의 쾌감을 말하는 것이다. 단, 그 불쾌감이란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기꺼이 겪는 불쾌감을 말한다. 272

중독은 기쁨이 결핍되고 즐거움이 과잉된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에 중독의 회복은 쉽지 않다. 중독의 회복은 단지 중독의 대상을 끊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쁨의 회로를 복원 시켜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자기 돌봄은 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자기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균형을 맞추는 기술이 바로 자기돌봄이다. 274


이 행복감을 느끼려면 '자기 밑천'을 잘 이해해야 한다. 자기의 강점과 욕구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무엇을 할 때 기쁨을 느끼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자기를 잘 이해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배움을 통해 그 밑천을 가꾸는 것이 필요하다. 그 밑천을 갈고 닦는 것이 일이 될 수도 있고 여가 활동이 될 수도 있다. 277


'괜찮아'라는 위로에서 시작된 자기돌봄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라는 도전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다름 사람과 경쟁하거나 인정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자기다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건강한 삶이다. 아프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활기 있는 삶을 사는 것이며,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늘리는 것에 있다. 마음을 배터리라고 비유 한다면 배터리 용량을 늘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활기를 느끼고 배터리의 용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 답은 도전이다. 이 도전에 따르는 스트레스는 우리를 강하게 하는 좋은 스트레스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나쁜 스트레스와 좋은 스트레스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삶의 활력은 늘 스트레스를 필요로 한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잘 분비되어야 우리는 삶의 활력과 적정 각성 상태를 인지할 수 있다. 아드레날린이 담당할 수 없을 만큼 분비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분비되지 않는 것 또한 문제이다. 그것이 바로 '권태'라는 감정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권태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지만 맹독성의 감정이 될 수 있다. 건강한 삶이란 긴장만 하는 삶도 아니고 이완만 하는 삶도 아니다. 긴장과 이완이 잘 순환될 때 삶의 활력은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인간은 아무런 노력이나 어려움 없이 쉽게 얻는 쾌락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것을 위해 스트레스와 노력을 통해 얻어내는 기쁨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는 존재이다. 282










아동기의 과도한 스트레스는 신경학적 손상을 초래하고 자기조절 기능을 크게 저해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소한 자극에도 강렬한 스트레스 반응이 유발된다. 이는 쉽게 극복 되지 않는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다그칠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기르듯 수많은 기다림과 이해심 그리고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지만 분명 아이는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것처럼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 간다. - P31

그 대표적인 자기반성의 감정이 바로 부끄러움과 후회, 자책감이다. 자책감이나 부끄러움은 수치심과 다르다. 자책감과 부끄러움은 자기가 한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자기 ‘존재‘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그렇기에 자책감과 부끄러움을 통해 우리는 자기 행위를 반성하고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수치심은 자기반성 시스템을 작동 시키는 것이 나라 자기비난 시스템을 작동 시킨다. 개선으로 이어지는 반성이 아니라 문제를 심화시키는 비난으로 치닫는다. 이는 수치심이 맹독성의 감정인 이유다. 수치심은 자기돌봄과 자기친절의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다. 자기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데 어떻게 자신을 돌볼 수 있겠는가? - P63

그러나 아이는 이러한 감정을 양육자에게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발달상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사랑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상대를 증오하면서 의지할 수 있겠는가! 상대가 밉고 분하고 슬프지만 그 파괴적인 마음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릴 수밖에 없다. 결국 아이는 자신을 비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모가 자기를 거부한 것은 자기 때문이고, 심지어 부모가 싸우는 것 역시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P72

중요한 것은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다시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치도 분열도 아니다. 통합일 뿐이다. 자기돌봄이란 바로 자기의 모든 부분과 관계를 맺고 연대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 P86

진정한 지기친절은 그때 나타난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인간관계에서 상처 받을 때, 갑작스럽게 몸이 아플 때, 예기치 않는 불행이 자기를 덮칠 때 우리는 자기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 P142

누구나 뜻대로 되지 않는 삶과 함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느끼면 연결감이 끊어지고 보편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나만 힘든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문제 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원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 혼자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 혼자뿐이라는 느낌‘을 가장 큰 고통으로 느낄 만큼 뼛속 깊이 사회적인 존재이다. - P148

치유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기 보다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것에 가깝다. 자기 생각이나 관점에 사로잡혀 상황이나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이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재구성 혹은 재평가라고 한다 이는 부작용 없는 안정제와 같다. - P154

이렇게 관찰의 힘이 커지면 일상에서 나를 관찰할 수 있다, 자기 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틀로 바라보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찰의 힘이 길러지면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가까워진다, 덜 흔들리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관찰하는 마음이 길러지면 우리는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고 상대의 마음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 할 수 있다. - P205

물론 이렇게 반성한다고 해서 바로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오래된 문제일수록 바로 바뀌지 않는다. 그만큼 습관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개선에 대한 관대함이다. 자기에게 불친절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리한 계획을 세우고 큰 결심을 통해 한꺼번에 바뀌어야 한다고 다그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태도에서 벗어나 포기하지 않고, 조바심을 내지 않고, 조금씩 바꿔가는 것이다.
자기관찰자가 되어 삶을 돌아보고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것! 이는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어른들의 존재 방식이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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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은 자라서 더 나은 어른이 된다."

술에 취해 사느라 나이를 헛 먹었다. 신체는 진작부터 노화가 진행중인데도 마음은 애써 모른 척

아 몰라....그냥,.... 마시면 그만이지 뭐.....이러고 수십년을 헛살고 있으면서, 타인에게는 왜 그렇게 박하게 구는지....제 정신에 제 앞가림이나 할 것이지....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미 나이는 꽤 먹어버렸는데, 이미 어른이어야 하는데, 이제 성숙 해야 할 어른인데 아직 제대로 성장조차 하지 못한 나는 이제서야 장래 희망이 생겼다.


"우선은 어른이 되자, 그리고 그다음에는 좀 더 자라서 더 나은 어른이 되자.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주변에 친절하고, 배우고 행동하는 어른이 되자."






 어린이는 우리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입니다. 어른은 어린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어른은 어린이를 존중 해야 합니다. 어린이와 함께 미래의 위기와 새로운 기회에 대응해야 합니다. 이때 어린이는 누구보다 적극적인 동료 시민입니다. 왜냐하면 미래는 곧 어린이가 살아갈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세요, 여러분, 세상에는 언제나 어린이가 있습니다.

어린이를 환영해 주세요.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봐 주세요, 처음 보는 어린이와 대화해야 한다면 존댓말을 써주세요. 그럴 때 여러분에게는 "나도 이제 다 컷다!" 하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어린이와 보호자에게 순서를 양보해주세요. 어린이 일행은 언제나 시간이 더 걸립니다. 뒤에서 천천히 해도 된다고 하고 시간을 벌어 주세요. 제 말을 믿으세요, 여러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집니다. 유아차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보호자가 보이면 도와주세요, 어린이를 가르치고 돌보는 선생님들께 감사하고, 그분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도록 목소리를 모아주세요. 생각보다 빨리 우리 생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린이는 빨리 자라니까요. 131


 그런 날들을 보내면서 나는 사랑 받는 게 무언지 배웠다. 선생님들이 나만 꼭 집어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랑 받는 아이 중 하나라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랑은 자격을 갖추지 않아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학교에 있는 동안 만큼은 가정의 그늘을, 폭력을, 냉담함을, 긴장과 불안을 잊을 수 있던 아이들이. 169

나는 학교가 정말 좋았다. 무섭고 어려운 아버지, 늘 슬프고 신경질적인 엄마가 없는 공간인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이 있는 그 공간 자체가 너무나 좋아서 중학교, 고등학교 6년 동안 거의 매일 전교에서 일등으로 등교를 했다. 방학이 괴로웠을 정도니까. 물론 성적이 좋아서 학교가 좋았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학교라는 곳에서 나는 편안하고 위로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도 그럴까? 그럴 수 있을까? 마냥 친구가 좋고 존경하는 그리고 사랑하는 선생님이 있고 학교에 가는 날만 손 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을까?  행복지수 꼴등인 우리 아이들에게 학교는 어떤 의미일까. 


 그러니까.....나 하나쯤은 인생을 좀 대충 살아도 되지 않을까? 부분 부분 망치는 건 정말 티도 안 날 것이다 무력감이 거의 권태가 될 때 변하지 않는 세상이 걱정스러울 때 , 흔적 없이 사라진 거대한 동상과 사람들을 떠올린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되는 대로 살아보자, 인생은 소중하지만, 딱히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말 모르겠으니까. 어쩌면 없을지도 모르고, 혹시 내 삶에 의미라는 게 있다면, 수많은 사람의 하나로 살아가는 것 자체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일단은 존재하는 게 내 의무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다. 225


네 그래서 일단은 존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덕분에 장래 희망도 생겼거든요.


 그러니 '노 키즈 존'이 없는 세상은 그저 이상일 뿐일까?아니다. 그렇지 않다. '노 키즈 존'은 사라져야 한다. '어린이'라는 사실은 명백히 어린이의 정체성이다. 정체성 때문에 특정한 장소에 출입을 못 하게 하는 것은 , 실질적으로 어쩔 수 없다 해도, 논리적으로 어떨 수없이 차별이다. 이 차별이 사회적으로 허용된다면 '노 휠체어 존'이, '노 시니어 존'이. 또 '노 무슨 무슨 존'이 생길 것이다. 사실 문제 상황을 가정한다면 차별과 배제는 제일 쉬운 해결책이다. 나는 이 어려운 문제를 어렵게 풀고 싶다. 평등을 찾아가는 길은 원래 어려운 법이니까. 264

2024년 신생아 출생률이 0.75명이다. 이대로라면 노 키즈 존을 할 수조차 없게 될지도 모르겠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어른들이 미래를 더 이상 꿈꾸지 않으니 미래가,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혹시 나는 '나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 뒤로 숨었던 게 아닐까? 나 자신도 어른이면서 아닌 척하느라고, 겸손한 외양을 하고 존경하는 어른의 이름을 읊어온 것 아닐까? 그분들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는 건 먼 훗날의 일로 미룬 것 같다. 어른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말은 '훌륭한 어른'한테 여러 책임을 떠넘겼다는 뜻도 된다. 내 생각이 지나친 걸까?

나는 존경하는 어른들이 있으면서도 툭하면 '이 시대는 진정한 어른이 부족하다''본받을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아쉬움을 부풀렸다. 내가 어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게 참조할 세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거리를 미리 만들어둔 것 같다. 303


한편으로 나는 내가 존경하는 어른들 처럼 좋은 어른이. 지금 당장 되고 싶다. 김장하, 박막례,채현국, 김영만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그래서 이제부터 안간힘을 써보려고 한다. 내가 마치 그런 어른인 척하고 사는 것이다. 따뜻하게, 힘 있게, 현명하게, 재미있게,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부조리를 잊지 않은 그 '젊은 어른'처럼, 솔직하고 진지한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가 기댈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아니, 꼭 되고야 말겠다. 306


날마다 보는 험악한 뉴스만큼, 험악한 뉴스에 무감해지는 나 자신에게 겁이 난다. 그럴 때 친절해지기로 한 번 더 마음을 다진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주려면 상황 파악도 잘 해야 되고, 용기도 내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여기까지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게 '친절함'이라면 나는 그에 걸맞은 판단력도, 용기도 갖고 있을 테니까.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용감한 어른이 도고 싶다. 그게 나의 장래 희망 이다. 327

                       <현재 내 책상 위 작은 책장에 현시점 내 인생 책들>



우울하고 불안하지만,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술을 마시지 말고, 이미 지나온 50년 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자.

공복 슬로우 조깅, 근력 운동, 식단을 지금처럼 꾸준히. 몸이 먼저다. 여유와 친절은 건강한 몸이 기반이다.

마음에 경고등이 켜지면 반드시 몸을 움직여야 한다. 



작가님 비밀인데요, 저 제 직장에서 작가님을 아는 사람인척 했어요. 읽는 세계 안에서 알고 지내는 거지만요. 

되게 되게 자랑스러웠거든요.

 읽는 사람들은 읽는 세계 안에서 서로 알고 지낸다. 정치가 책을 미워하고 사회가 책을 소외 시키고 경제가 책을 의심해도, 독자는 계속 생겨난다. 브레히트는 " 암울한 시대에도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래도 노래 부를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대해"라고 했다. 우리는 계속 읽을 것이다, 우리 세계에 대한 책을.151



세상의 어떤 부분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을 때, 변화를 위해 싸울수록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미래에서 누군가가 와서 지금 잘하고 있는 거라고, 미래에는 나아진다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 미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어린이다.어린이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고, 어린이가 ‘나답게‘ 살 수 있게 격려하고 보호해야 한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의견을 가질 수 있게 가르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시민으로서 존중하면서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어린이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미래가 바로 그러하듯이. - P123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어린이한테는 ‘무심히‘하면 안 된다고, ‘별 뜻 없이‘하면 안 된다고. 어린이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아니다. 특별 대우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어린이가 있다는 걸 안 이상, 상대가 어린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비건인 친구와 외식을 하려면 비건 식당에 가야 한다. 당연하다. 다리가 불편한 노인과 식당에 가려면 앉기 편한 식당을 찾아야 한다.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이 라면 주문에 시간이 걸려고 그러려니 하게 된다. 어느 자리에 어린이가 있다면 그를 ‘무심히!‘새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한테야 "빨리 가세요" 할 수 있어도(사실은 안 되지만), 어린이한테는 그러면 안된다. 보행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호자도 없는 어린이한테는. - P252

나는 어린이가 미워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어른스럽게 대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운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고 그런 걸 마주하면 불편한 게 당연하다. 그래도 나는 어른이니까 그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 생겨난 미움을 잘 처리하고 새 얼굴로 어린이를 보고 한 번 더 어린이를 다독이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그런 어른이 될 수 만 있다면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다. 이론서에서 읽은 적은 없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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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예쁜 우리 셋째딸 연희가 고양이 별로 돌아갔다. 

2월15일 입원한지 일주일 만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해서 보내줘야만 했다. 

추억이 많으면 많은데로 없으면 없어서 이래도 저래도 아직은 아직은 그렇다......

15년을 함께 살았다. 

15년 동안 변함없이 그 예쁜 눈으로 나를 바라봐 주고 그 작은 발로 내게 와 안겨 고로롱하며 행복해했다.

행복했었을까? 나와 할께 사는 동안, 이 술주정뱅이랑 사는 동안 행복했을까?


미지막에 너무 힘들어했던 모습 때문인지 이제 아프지 않으니까 다행이다 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렇다.......

2월 15일이 단주 두달째였다. 두달동안 한번도 안마시고 지내다가 그날 바로 꺽여 버렸다.

아직 남아있는 세 냥이를 위해서라도 다시 단주 해야 하는데 멈춰 지지가 않는다.

병원도 상담도 별 도움이 안된다. 단주 해야 한다고 생각만 할 뿐 스스로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하고 싶은데로 살면 안되는데.........


예전에도 한번 올렸던 뽀짜툰  캡쳐.



아직도 보살펴야 하는 아이들이 셋이나 더 있다. 16살, 14살 13살의 노묘들이 셋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아이들이 떠날 때 마다 이렇게 무너지면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나....



괜찮아지려면 술을 그만 마셔야 한다. 마실수록 더 슬프고 우울해 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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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30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31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년 12월 15일 부터 현재까지 큰 어려움 없이 금주중이다. 그동안 책과 여러 매체들에서 보고 들었던 금단증상은 딱히 없다. 물론 가끔씩 짜증이 폭발하긴 하지만 오히려 전보다 내 감정을 알아채고 다루는 것에 더 능숙해 진 듯 하다. 

 술을 안마시는 사람. 매일 운동하는 사람,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 잠을 잘 자는 사람으로 내 정체성을 정립했다.

 사실 나의 현실 상황은 달라진 딱히 것이 없다. 내가 술을 마시던 모든 이유들, 사실은 핑계일 뿐 이였던 상황들은 모두 그대로 이지만,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다르게 선택 한 것 뿐인데, 나는 많은 부분 달라졌다. 


 아마도 그런 나였지만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고 쓰고, 시도해보고 실패하고 그래도 또 다시 시도해보고 했던 시간들이 쌓인 결과인 듯 하다.


 인간은 최후에 최후까지 선택이란 것을 할 수 있고, 책은 인간이 그나마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중요한 도구라는 것. 새삼 깨닫고 있다. 

 나는 느리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비혼중년여성인 나는 사회적으로 소수자의 입장 일 수밖에 없다. 몇몇 남류작가들의 책을 읽다가 느낀 그 괴리감들.....


 대단하지 않은 것을 엄청나게 대단한 깨우침의 발견처럼 써 내는 능력은 여성작가들이 좀 본 받을 만한 면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책들은 이제 더 접하고 싶지는 않다. 스피커로써의 역할을 해주는 남류작가의 책이면 충분할 듯 싶다. 읽을 필요가 없는 책도 읽어 봐야,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니 시간낭비라기 보다는 피할 수 없는 경험으로 생각한다.



장애란 어떤 본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이든, 취업이든, 사랑이든,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어떤 불가능의 체험이며, 그때 자신에게 생겨나는 '무능'과 '포기'의 정서이다, 어떤 불가능성의 체험, 그리고 그와 함께 일어나는 자기 무능과 자기 포기의 정서를 겪을 때 어떤 사람은 장애인이 된다. 그리고 불가능의 체험과 포기의 정서가 커질수록 그는 중증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불가능의 체험과 포기의 정서를 사실상 방치해 왔다.

그런데 수십 년 간 집이나 시설 , 그리고 작업장에만 갇혀 있던 어느 장애인이 야학 사람들과 모닥불을 피우고 밤하늘을 함께 보았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어떤 불가능이 가능으로, 어떤 무능이 능력으로 바뀌는 체험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는 정서들의 대변혁이 일어났을 것이다. 모닥불이 있는 밤하늘이 그에게 무언가를 일깨운 것이다. 이 일깨움, 이 깨달음, 이 배움은 분명 앞으로 그가 만날 지식과 정보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움 이전에 일어나는 배움'이다. p 82


그런데 눈여겨볼 대목은 니체가 '위대함' 을 어디서 찾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자기의 혈통, 자신이 앓았던 병과 치유법, 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해 적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꼼꼼하게 적었다. (...)" 이 사소한 사항들은 이제껏 중요하다고 받아 들여졌던 것보다 상상을 추월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여기서 바로 다시 배우는 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런 게 바로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고 '가치의 전환'이다, 따로 갈음하는 말없이, 니체의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해두고 싶다. 여러분, "사소한 것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p 104


구원이든 처벌이든, 축복이든, 나는 신체를 떠나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신체가 존재하는 동안에, 신체와 더불어 일어나는 우리의 일상이다. 거기서 일어나는 구원과 축복, 즉 신체와 더불어 신체를 통해서 겪는 우리의 좋은 삶이 내게는 철학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p 112


지은 죄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함석헌의 말에 참 많이 웃었다. 그러면서 또 깊이 감동했다. 그건 그대로 결산하고, 안 되면 나중에 신에게 벌 받기로 하고, 지금 '살아있는 마음', 지금 보잘것없지만 '옳은 생각'하나 들거든, 그것을 힘써서 할 밖에, 지금 이대로라도 말이다. 지금 이대로라도, 지금 이대로라도... 참 여러 번 되뇌게 되는 말이다.  p 122


주류 질서에서 쫓겨나 불안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자기를 쫓아낸 이들에 반감을 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 그런 권력을 가진 이들로서 살고 싶어 하고 안정된 질서에 편입되기를 원한다. 불안한 삶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 하이네에서 카프카, 그리고 어쩌면 찰리 채플린까지, '무례해 보일 정도로'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추방되었기에 더 출세하려 하고 내 것에 더 집착하는데, 소수의 사람은 추방되었기에 그 추방의 진실을 증언하는 운명을 택한다. 다수는 저 자신이 추방된 자들이었으면서도 다른 추방된 자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주류가 되려 했지만, 소수는 추방된 자들로 기꺼이 남아 진실을 증언하고 다른 추방된 자들과 연대하려 했다. p 138-139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를 '해석 노동'이라고 불렀다. 그는 '해석 노동'의 기본 내용을 남녀의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가령,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이해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해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남녀에게 성별을 바꾸어 서로의 일상에 관해 기술해보라고 하면 여성은 대체로 남성의 일상을 자세히 적는데 비해 남성은 여성이 하는 일 자체에 대해 별 개념이 없는 답변을 한다. 이는 여성이 남성의 관점에서 사태가 어떻게 보일지를 자주 상상하며 남성의 시각을 자기 사각으로 만드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가부장제 사회일수록 크다고 한다.  p 161


복지원에서는 '이유 없는'폭력도 자주 휘둘러졌는데(어떤 때는 단순히 날씨를 이유로, 또 어떤 때는 말 그대로 '그냥'), 이는 권력이 그 순수성이나 절대성에 다가갈 때 드러나는 권력의 참 모습이다. 권력은 절대적으로 되어갈수록 그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권력 자체가 이유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시설에서 자의적인 폭력, 이유 없는 폭력이 행사되는 것은 권력을 확인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병영사회에서 권력자들의 이념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광주학살 이후 철권통치 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전두환 정부는 '정의 사회 구현' 이라는 미명 아래 유신체제에 이루어진 이런 조치들을 계승하고 강화해 갔다. p 187-188


앞서 말한 것처럼, 시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사회적 관계로부터 배제된 공간이지만 음각화의 방식으로 사회를 그대로 비추는 공간이다. 그것은 전체 사회를 대칭적으로 비추는 거울 이미지다. 따라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거울 이미지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유용한 출발점일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거울 이미지를 바꾸어서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라도 그 거울이 비추고 있는 곳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사회 말이다. p 190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 그 믿음을 과시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처럼 사는 사람은 드물다. 니체가 예수만이 유일한 기독교도였다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 였다. 천국은 예수의 실천 속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예수에 대한 믿음에 달렸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말씀을 듣고 읽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는 무소유 정신을 갈파한 어느 스님의 책을 백만 권 넘게 사지만 정작 무소유를 실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좋은 말을, 박물관이나 명승지를관람하듯 그저 듣고 구경하면서 입장료로 책값을 내는 것이다. p 248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들었다면 최소한 한 번은 내 목소리로 그것을 다시 들어야 한다. 그때만이 그것은 내 피가 된다. "높이 오를 생각이라면, 그대들 자신의 발로 오르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구원해 달라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던진 말이다. 확실히 그렇다. 내 발로 오르지 않은 산은 풍문과 구경거리로만 존재하는 산이다. 그러니 산에 오르려면 스스로 오르는 수밖에 없다.  p 252




 





바보는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다. 바보는 다만 ‘욕구가 멈춰버린 자들‘, ‘의지가 꺾인 자들‘이다. 의지가 꺽인 곳에서 지능은 발휘 되지 않는다.불평등의 현실을 본래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때, 또 현실사회에서 우월한 자들이 실제로 자신보다 우월한 자들이라고 생각해 보릴 때, 우리는 정말 ‘바보‘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바보‘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 차별을 그래도 인정하고 심리적으로 수긍하기 위해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 P69

이해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어떤 불이익조차 감수하고 나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니 행동에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맘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지켜보며 맘속에 공감이 일어날 때,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 를 느끼는 것이다. 그때만이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가 ‘나아지고 있는지‘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다. (...) 요즘 들어 ‘외부세력‘ 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왜 이해당사자도 아닌데 끼어드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칸트 식으로 답하자면, 구경꾼들의 맘속에서 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개인‘을 넘어 ‘인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내일이 아닌데도 아파하고 고통을 무릅쓰는‘ 그것 때문이다.

- P74

나는 이 고대적 금욕주의에 중요한 메세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월스트리트의 탐욕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그것의 극복은 세금의 증대와 일자리 창출로 환원되는 차원 너머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욕망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월스트리트에 않은 인물이나 기업을 바꿀 수는 있어도 월스트리트의 존재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증세나 일자리 창출, 복지 증대가 시급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금욕하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내가 고대 금욕주의를 끌어들인 것은 욕망을 줄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다른 삶을 욕망하라는 것이었다. 현재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 못지않게, 현재와는 다른 삶을 욕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 P117

교양을 쌓는 호기심이 아니라 ‘나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호기심,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는‘그런 지식욕,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우리가 어디까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비판적 사유, 푸코는 그것을 철학이라 불렀다. - P133

물론 이것이 쓸데없이 제 고집을 세우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아집이야말로 내 습관과 편견(그것을 심어준 사회아 문화)에 굴복하는 것이다. 내게 낯선 존재,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게 기꺼이 나 자신을 개방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용기를 낼 때, 우리는 뭔가를 깨우칠 수 있다. 그래서 기꺼이 동의 할 때도 자유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삐딱하게 고집을 세울 때도 노예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노예란, 저 자신이 옳고 그름을 따져볼 능력이 없는 존재 혹은 그런것에 무관심한 존재를 가리킨다. 그래서 노예는 습관에 의탁하고 언론에 의탁하고 권력자에 의탁하고 다수에 의탁하는 것이다, 쉽게 굴복한다는 것은 스스로 따져볼 능력과 의지가 없는 것이니 그에게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바탕이 없는 것과 같다. - P149

신자유주의와 수형인구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본 골격을 생각해보면 이해될 만한 대목이 있다. 신자유주의 정부들은 대체로 탈규제를 통한 시장의 자유화, 공적인 부문의 대규모 민영화 등을 추진한다. 다만 정부의 역할을 최소로 한정하는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과 달리 신자유주의 정보는 매우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시장에 대한 개입은 최소화하지만, 시장을 위한 개입은 매우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이때 정부가 빈번히 표방하는 것이 법치주의다. 정부가 법질서를 지키자고 말하는 게 무슨 문제일까 싶지만, 문제는 법질서에 대한 강조가 시장 자체의 실패(사회적 양극화, 빈곤층의 확대)에서 파생하는 여러 사회적 문제를 공안의 시각에서 해결하려고 한다는 데 있다. - P180

인간이 인간을 상품으로 사고판 것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대의 노예들은 그 인격이 통째로 팔렸다. 그들은 사실상 살아 있는 물건이었다. 근대 자본주의도 인격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일정 시간 동안 자기 생체 능력의 일부를 상품으로 판다. 그것이 바로 노동력의 상품화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정신이 극단화 된 곳에서 새로운 사태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인간을 가두어두는 것, 인간의 부자유에서 어떤 수익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수익모델로서 인간 수용소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해 할까? - P183

소수자들의 경우에는 여기에 약간의 어긋남이 있다. 프로이트가 말하듯 떠나간 ‘대상‘과 ‘나‘ 를 동일시하긴 하지만, ‘떠나간 대상‘ 을 원망하기보다 ‘그렇게‘떠나갈 자기 운명을 미리 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거리감보다는 ‘나 역시 그처럼 죽을 것이다‘는 동질감이 크고, 단순히 ‘떠났다‘는 사실보다는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힘들게 살다가‘떠났다는 사실에 더 크게 반응한다. 떠나간 대상과 거리감이 없으니 대상에 투여된 리비도를 좀처럼 회수할 수가 없다. ‘그렇게‘살다 죽는 것이 사실은 내 운명일 수 있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대상의 죽음을 인정하고 ‘현실의 나‘, ‘살아 있는 나‘로 돌아와야 하지만, 나는 그 현실 속에서 ‘산송장‘ 으로 살아갈 것임을 예감한다. (...)당연히 자기 비하가 일어나기 쉽다. 회복의 과정이 무력화의 과정인 셈이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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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와 그에 따르는 행동들은 인생을 편하고 쉽게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돈이 많으면 많은 부분 삶이 편해지는 것이 사실이고, 건강한 육체(매력적인 육체) 역시 삶을 덜 힘들게 덜 어렵게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싶고 건강하고 싶은 것일텐데, 문제는 부자가 되고 건강한 육체와 정신은 갖게 되는 과정이 편하고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종자돈이 모여서 돈이 돈을 벌어 들일 때 까지 꽤 오랜 시간을 아끼고 인내하며 살아야 하고, 요요현상 없이 살을 빼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매일매일 좋은 것을 먹고, 잘 자고, 운동을 하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과 돈이 필요하고 훌륭한 인성과 지성 역시 한순간에 쉽게 얻을 수 있는 가치들이 아니다. 가치 있는 것들이 가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갖기 어렵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욕망을 내가 성취해 낼 수 없어서 불행하다면, 욕망을 크기를 줄이거나 노력의 크기를 늘려야 한다. 선택하지 않으면 아마도 일생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 할 껄, 누구 누구 때문이야, 뭐 뭐 때문이야 하고 후회와 원망만 하면서 살아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만 후회와 원망의 삶은 좀 멀리 두고 욕망은 조금 줄이고 노력은 조금 더 늘리기로 선택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는 내려 놓고, 나의 내일에 대한 기대만 가지고 갈 것.

어느 누구도 타인을 이해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다. 나만이 나를 알고 나를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외부로부터의 것들은 잘되면 땡큐고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것.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에만 집중.





실패의 원인이 노력을 다하지 않아서 라고 치부하기보다 각 개인의 능력에 맞는 분야를 찾아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얼마든지 스스로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p 131


실패도 두렵지만 사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조차 모르고 산다는 것 아닐까.

이책은 꽃밭과 진흙탕을 오락가락한다.

아..또 뻔한 소리들이네.....였다가 아!!! 이 뻔한게 이런 소리구나!!! 싶다가 한다.







접근 동기는 성장에 집중하고, 긍정적인 결과에 민감하며, 성공과 획득에 큰 관심을 갖고, 잘되면 즐거움을 느끼고 잘못되면 우울감을 느끼게 한다. 회피 동기는 거꾸로 성장보다 안정에 집중하고, 긍정적인 결과보다 부정적인 결과에 민감하며, 성공과 획득에 대한 관심보다 손실과 실패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잘되면 즐거움보다 편안함을 느끼고 잘못되면 우울감보다 초조함을 느끼게 한다.

왜 한국인과 동양인들은 접근 동기보다 회피 동기에 집중할 까? 꼭 성공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실패해서는 절대 안 되기 때문이다. 꼭 존경 받을 필요는 없지만 무시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고, 꼭 예쁠 필요는 없지만 못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으며, 꼭 행복할 필요는 없지만 불행해서는 안된다 고 생각한다. 이런 경향은 타인의 시선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나는 다름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라는 체면에 대한 우려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과 관계가 깊다. '체면을 얻었다'는 표현은 안 해도 '체면을 잃었다'는 표현은 자주 한다. 타인의 시선을 생각할 때는 나쁜 일로 체면을 잃지 않는 것이 좋은 일로 체면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한번 잃어버린 체면은 다시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체면을 잃는 것은 한 개인에게 치명적이다. 직장에서 일을 잘하면 칭찬을 받아 체면이 서지만 칭찬을 못 받았다고 해서 직장생활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일을 제대로 못하거나 잘못해서 체면을 구기면 직장생활은 힘들어진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과 평판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남들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찍히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p 158

내가 타인을 그렇게 까지 의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는 접근 동기보다는 절대적으로 회피 동기가 강한 사람이다.

남의 이목보다는 한번 실패하면 끝짱이라는 생각때문에 그런것 같다. '꽝~다음 기회에~' 이런건 없다고 생각하니까 도전도 실패도 두려워서 술로 도망친 것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타인은 당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신경 쓰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힘이 세거나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괜스래 당신 혼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지도 모른다. 당신이 당신에게만 관심이 있듯이 다른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음을 기억하라. p 165




사람은 감정의 동물인 만큼 바른 말이나 꾸중을 들으면 설령 그것이 정확한 피드백이라 할지라도 기분이 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보라면 순간 기분이 나빠도 바른 말을 해준 사람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 하고서 라도 (때로는 상처가 될 수 있을지라도)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싶은 동기가 높다. 정확한 자기인식이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람은 바른 말을 해줄 사람을 찾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과장된 꾸중은 관계를 멀어지게 할 수 있지만 정확한 꾸중은 오히려 신뢰를 두텁게 할 수 있다. p 207

상대방이 의견을 요청하면 그때 의견을 말해 줄 수 있고, 그가 내 의견대로 하는지 안하는지 까지 신경을 쓰는건 간섭이다.

묻지 않는 말은 해줄 필요가 없고, 이미 내게서 떠난 말은 내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두 가지다. 첫째는 각 개인의 행동과 결과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개인이 소유한 유전적 특성과 성격적 기질, 그리고 그 개인이 속한 사회적 상황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이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것들은 각 개인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고 선천적으로 부모에게 물려받았거나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유전자를 갖고 태어날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의 자원과 부에 대한 분배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원칙을 만들겠는가? 존 롤스는 이 원칙이 가장 정의로울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안 좋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분배 원칙을 정할 것이라는 것이다. 안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난다 할지라도 큰 불편 없이 잘살 수 있는 분배 원칙을 만들 것이다. 당신이 안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원칙이 없다면 당신의 삶은 처참할 것이다. p 252

유전, 성격적 기질 그리고 환경등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요건들이 자신의 거의 전부라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선택은 인간에게 무엇인거지?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인건가?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좋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분배 원칙을 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은 안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을꺼라고 믿고 싶어 할테니까. 

내가 이해하는 인간의 선택은 그런것이다.  아직까지는....

위계질서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 즉 스트레스다. 암이나 병원균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어서 어떤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고약한 병인지 실감하지 못하지만, 많은 연구에서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으로 정신적 건강과 신체적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고 한다. (...)그러면 이 스트레스와 위계질서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스트레스는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하지만 가장 강력한 원인 중 하나는 ‘통제감 상실‘이다. 통제감이라는 것은 각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갖는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스스로의 삶을 지휘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 P93

문제는 사회적 위치가 낮은 사람들을 직급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까지도 낮다고 여기는 풍토다. 위계질서의 문제는 운영 체계로서의 위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가치에 대한 위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위계질서가 강한 사회에 살면 그 위계에 맞게 인간의 가치도 변한다. 위계가 낮은 사람은 위계가 놓은 사람을 모시는 ‘부하‘가 된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상사를 소개할 때 "제가 뫼고 있는 분입니다"라고 말하며 상사를 더욱 높이고, 지위기 높은 사람은 "제 밑에서 일하는 직원입니다"라고 말하며 부하의 신분을 더욱 낮춘다. - P99

김경일 교수는 1999년에 발표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책에서 유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라고 말한다, 특히 우리나라에 편만해 있는 신분 사회 가부장 의식, 여성 차별, 권위 의식 등을 유교 문화의 폐단으로 보며 위계질서가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한다고 비판했다. - P100

이미 세상은 변했고, 우리는 아무리 위계를 강조해도 위계가 세워질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합리성이라는 대전제 앞에서 위계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위계는 사람들은 서로 힘들게 할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해야 할 일을 하기 싫게 만든다. 기업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모든 곳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물론 조식의 이사 결정과 운영을 위해 위계와 직급은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예의 역시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이외의 상황에서는 위계는 약하면 약할수록 좋다. - P119

반면 자신의 실력을 현실적으로 직시하고 정확하게 평가하는 부류가 있다. 장점과 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인지하는 것이야 말로 성장과 발전의 기초다, 단점을 회피하고 장점에 마음을 두려는 태도도, 장점은 제처두고 단점에 집중하는 태도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삶의 방식이니 말이다. ‘단점을 생각해서 뭐해? 장점에 집중하는 게 옳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반대로 ‘잘하는 거에 집중할 필요가 뭐 있어? 잘못하는 부분에 마을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들은 성장을 위한 바른 판단을 방해하고, 필요한 노력을 저지 시킨다. 긍정적인 부분이든 부정적인 부분이든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다 - P176

자기 자신을 현실적인 관점으로 정확하게 평가하는 사람, 즉 실력이 없을 때 실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불행하고 우울증을 많이 경험할까? 흥미롭게도 이런 사람들은 실력이 있을 때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복을 많이 느끼고 우울증을 적게 경험했다. 신기하게도 가장 행복한 사람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이었다. (...)
과도한 긍정적 자아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현실에서 힘든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 단점이 드러나는 것을 최대한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와 전략들은 당사자의 정신 건강을 취약하게 할 수밖에 없다. - P185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유전적 요인, 성격적 요인 그리고 환경적 요인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있다. 이런 이해 없이는 사회적 갈등과 계층 간의 갈등만 증폭될 뿐이다. 나의 인생도 내가 전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고, 타인의 인생도 그들이 전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성패와 타인의 성패를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 P255

우리는 남들이 어떤 상황에서 얼마의 노력을 했는지 절대 알지 못한다.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든 상황과 처지를 직접 보더라도 그 노력을 평가절하한다. 직접 해보지 않고 눈으로만 보아서는 절대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남의 기여도에 대해서는 과소평가 할 수밖에 없다. - P280

남들 다 뛰는데 나만 안 뛸 수도 없지만 무조건 다 같이 달리다 보면 낭떠러지로 내몰릴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하는 행동이라고 해서 항상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쩔 수 없이 달렸더라도 잠시 멈추고 왜 달리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P296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며 우리는 자율적으로 특정한 전통에 동조하기도 하지만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동조하도록 압박을 받기도 한다. 이 압박을 통해 전통이 강화되는 것이다. 어떤 전통이 유지 될 때는 그 전통으로 항상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다 .아무도 이익을 보지 않는다면 전통이 유지되기 힘들다. 또한 이런 이익은 주로 나이 많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이 취하기 때문에 더욱 쉽게 유지되고 강화된다. - P302

목숨을 희생하거나 퇴사를 불사하며(남들과 다른 것처럼 느껴졌던) 본인의 생각을 외친 사람들도 많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사람인 당신이(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처럼 느껴지는) 비합리적인 전통과 관습에 "아니오"라고 작게나마 의견을 표명할 때 당신은 두가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당신의 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천천만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둘쨰는 당신으로 인해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보게 딜 것이다. 엄청난 희생과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현 하나면 충분하다. 이 작은 표현이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을 일깨울 것이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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