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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복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양영란 / 동문선 / 199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영화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조합을 맞춰 의사소통을 하고 글을 써내려가는 모습은 놀람 그 자체였다. 15개월 동안 20만 번 이상의 깜박거림으로 완성한 책. 이 책이 바로 <잠수복과 나비>이다.
영화도 좋았지만 책으로 읽는 느낌은 또 달랐다. 좀 더 담담하고 그의 내면에 있던 의식이나 생각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타인의 입장에서 그에게 닥친 사건은 그저 참 안됐군. 불쌍하군. 하는 식의 동정 혹은 위로였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느꼈던 고통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것이었으리라. 그는 자신의 자식을 앞에 두고도 안아주고 만질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 목이 메이기도 하고, 옛 연인과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슬프다고 울 수도, 화가 난다고 얼굴을 찌푸릴 수도 없다. 사람에게 육체의 자유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가 묘지 순례를 구경 갔을 때 조제핀에게 오히려 반대로 기적이 일어나 건강한 사람이 여기에 와서 갑자기 사지가 마비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거라고. 하고 말을 뱉었을 때 그 말이 본인에게 현실로 일어나게 될지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인생은 정말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것 같다. 나에게도 어느 순간 불시에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예전에 사고로 다쳤던 적이 있던 나로서는 앞으로 그때만큼의 나쁜 일만 생기지 않는다 해도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고라는 것은 얼마나 사람을 위축시키고 작게 만드는 것인지, 그것이 누구나 겪는 하찮은 사고라고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얼마나 큰 상처로 남을 수 있는 것인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만약 그가 무기력하게 자신의 상처에 함몰되어 남은 생을 마감했더라면, 이 책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기에 세상과 소통하는 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가 죽고 나서도 그의 영혼은 자신의 글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리라.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교신할 수 있게 된다. 자신에게 도착하는 편지들을 읽으면서 자신과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진솔함에 놀라기도 하고 잠들기 전 울음을 터트린 아이의 이야기, 저녁 무렵 꺽은 장미꽃의 이야기 등 소소한 삶의 조각에 감동을 받고 소중히 간직하기도 한다.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이 평범한 일상, 거리를 걷고, 음식을 만들고, 세수를 하고, 친구와 다투고 하는 이 순간들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애초부터 주어졌던 것이었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가끔씩 이런 순간들을 즐기며 깨어 있어야겠다. 차를 마시고, 서점에 가고, 늦잠을 자고, 이런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인 줄 알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느꼈으니 말이다.
그는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단지 아주 나쁜 번호를 뽑았을 뿐 나는 장애자가 아니다. 나는 단지 돌연변이일 뿐이다.”
그의 상황이 그를 힘들게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때로는 자책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힘들어 하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 속 한 편에는 이렇듯 긍정적이고 자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장 도미니크 보비는 15개월이라는 시간동안 그 누구도 아닌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지킨 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복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종점 없는 지하철 노선은 없을까? 나의 자유를 되찾아 줄 만큼 막강한 화폐는 없을까? 다른 곳에서 구해보아야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그는 마침내 그곳으로 갔다. 자신의 나비를 찾으러. 답답한 잠수복 안에 갇혀 있던 그는 자신의 글을 완성하면서 번데기에서 완전히 탈피한 나비와 같이 잠시나마 자유로움을 얻었을 것이다. 이 책은 비단 실화와 진정성뿐만이 아니라 위트나 글의 기교에 있어서도 작품성에 있어서도 다른 작품과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혹여 실화에만 기댄 지루한 일기 정도로만 생각했던 분들이 있다면 그 편견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