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참 신비한 것 같아요. 엄마 뱃 속에서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생명이 자랄 수 있는지 말이죠. 태어나기 전까지는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요즘은 초음파를 통해서 아기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아기의 심장소리도 들을 수 있잖아요. 아기가 엄마 뱃 속에서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고 엄마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하니까 사실 믿기지가 않아요. 어떤 연구논문에서는 태교가 별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고 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뭐든지 해주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어요? 아이가 들을 수 있던 없던 이런 것을 떠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아기와 함께 소통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할 것 같아요. 하지만 또 너무 좋다는 태교를 무작정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클래식 음악이 태교에 좋다고 듣게 되는데 만약 산모가 별 감동도 없고 싫어한다면 차라리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옛 선현들이 태교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요즘은 과학의 힘을 빌려서 아기의 모습도 볼 수 있고, 과학적으로 태아가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도 밝혀졌는데 그 때는 어떻게 알았을지 참 신기하네요. 하지만 태교는 많이 알아도 태담이라는 것은 조금 낯설기도 해요. 아이와 대화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많이 어색할 것 같네요. 하지만 책에 실린 실제 아이와 부모가 했던 태담 편지들을 읽어보면서 아이에게 어떤 좋은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정리할 수도 있고 단순히 말로만 그치지 않고 편지를 작성해서 보관해 둔다면 아이가 커서 다시 편지를 읽어보고 부모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지 추억에 잠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이가 혼자 양수에 있지만 항상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 그것이 바로 엄마와 아빠의 마음이겠죠. 태담 = 태아와 부모의 대화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아요.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할지 몰라도 아마 계속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싶네요. 아이에게 사랑을 전하는 한 방법으로서 태담이 참 좋은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것도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항상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자식과 부모간에 당연한 일이겠죠. 태담편지뿐만 아니라 태교에 관한 이야기도 있으면 예비 엄마, 아빠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클래식과 경영이라는 왠지 안 어울리는 이야기인데요. 사실 기업이라고 하면 제일 우선으로 치는 것이 이익을 얼마나 창출하는냐 아니겠어요? 그런데 클래식과 같은 문화활동으로 이익을 낸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클래식 경영을 한다는 건지 처음에는 참 의아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경영도 단순히 이익만을 추구하던 것에서 사원들의 복지나 사회참여와 같은 감성적인 경영이 많이 도입된 것 같아요. 단순한 이익을 넘어선 기업의 가치, 어쩌면 그것은 그 기업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해주느냐와 상관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지금 부각되고 있는 클래식 경영이 아마도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옛날에는 문화활동을 지배층에서 후원하고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이익보다는 사회환원이나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 많이 이용했던 것 같아요. 클래식과 경영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뭘 말할 수 있을까요? 경영이라는 것도 어떤 하나의 목표, 회사의 이익이 될 수 있겠죠? 를 향해서 회사 구성원이 함께 힘을 합쳐 이루어 나가는 것인데, 만약에 서로 협동하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잖아요. 정해진 목표로 이끌어갈 사람이 필요하고 경영진 즉, CEO가 있어야겠죠. 마찬가지로 클래식에서도 악단이 어떤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각자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불협화음이 되겠죠? 이런 불협화음을 조화롭게 하모니로 만들어 내는 지휘자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죠. 이런 관계 때문에 우리들은 오케스트라에서도 경영을 배울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특히나 이런 클래식 경영을 통해서 사원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할 수 있고 이것은 어떤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표출 될 수도 있으면서 지역 사회에 이런 문화적인 혜택을 제공하므로 해서 기업의 이미지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구요. 이런 것을 기업 메세나라고 하던가요?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 왠지 딱딱한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기업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을에는 왠지 기분이 센치해지잖아요. 기업에서 후원하는 문화공연이 있다면 한 번 참석해보고 싶어지네요. 이익도 중요하지만 이런 감성적인 부분도 무척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제목이 참 도전적이네요. 사실 회계학이라고 하면 온통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숫자들 때문에 어려운 학문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회계학을 만만하다고 할 수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회계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쓰는 것 같지만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말이죠. 예를 들어 가계부를 적는다고 해도 수입이 있고 지출이 있으니 당연히 자산과 부채, 이익 등으로 나뉠 수 있는 거잖아요. 뭐든지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지만 일단 한 번 부딪쳐보자구요. 회계라는 것을 모르면 물론 안 봐도 되겠지만 글쎄요?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회계에서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 같은 것은 배웠지만 실상 회사의 회계부서에서 일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이런 양식을 볼 기회도 없고 설사 본다고 해도 많은 숫자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은 힘들 것 같아요. 물론 회계를 통해서 자격증을 딴다던지 회계에 관련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고 모르면 손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읽다 보니 회계가 정말 어떤 정확한 기준에 의해서 아주 객관적인 데이터인 줄로 생각했는데 마치 통계처럼 주어진 자료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따라서 또는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의미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조금 충격적이었어요. 요즘은 다들 복식부기를 사용한다고 하더라구요. 가끔씩 뉴스를 보면 회계조작으로 수억원을 빼돌리고 사장이 구속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되는데 요즘은 은행 예금뿐만 아니라 많은 투자를 하게 되잖아요. 예를 들면 주식에서도 한 회사의 성장 가능성이나 지금 이 회사가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회계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읽어도 될 것 같아요.
글쎄요? 안다는 것과 사랑하다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아님 같은 건가? 아무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게 자신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뭐 그렇다고 너무 자만에 빠져서는 안되겠죠? 그 옛날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처럼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나 다 좌절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다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과 학업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어린 학생들의 자살 그리고 취업이 되지 못해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버리거나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젊은 사람들, 경제 한파에 명퇴를 당하고 가족과 함께 동반 자살을 해버리는 현실 속에서 어쩌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건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겠죠. 이 책에서는 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의 상실한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바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깨달음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어요.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언제 하늘 한 번 쳐다볼 시간이나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하고 그저 세상 속에서 하나의 부속품처럼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네요. 지금 당신은 행복합니까? 비단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높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어떻게 자기 자신을 버릴 수가 있는지, 그건 아마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책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이나 죽음과 같은 우리들 인생의 화두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어요. 삶과 죽음.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결국 삶이라는 것은 무의미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겠죠. 왜 우리가 불행을 느끼는지 왜 우리는 그토록 공허하고 우울해질 수 밖에 없는지 이제는 우리를 되돌아봐야하지 않을까요.
기욤 뮈소의 작품들을 보면 표지들이 하나같이 색감도 좋고 하나의 그림처럼 멋진 것 같아요. 제목도 보면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다시 사랑을 찾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2006년도 "구해줘"라는 책이 나온 후에 이번에 읽게 된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는 2008년에 나온 책이네요. 어쩌면 아시아의 사랑 감정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유럽식 프랑스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아요. 물론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이 책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정해진 해답이란 없는 거잖아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이다 보니 아무래도 감수성이 풍부한 것 같아요. 표지에서 느낄 수 있듯이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평론가들은 그의 책을 마치 추리작가의 방식으로 쓰는 감성소설이라고 했는데 아무튼 그의 이야기가 매력적이기는 해요. 아마도 한 번 읽게 되면 계속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사랑을 위해서라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과거를 버릴 수 있을까요? 주인공 에단은 어느 날 그의 모든 것을 남겨놓고 떠나버리죠. 사실 살아가면서 지금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생각나는 게 바로 추억이 아닐까요? 추억이 없다면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겠어요? 세상은 참 미스터리한 일들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 같아도 어느순간 보면 운명 앞에 한 없이 초라할 수 밖에 없는 게 바로 우리 모습이 아닐까요? 아무리 우리가 부정하려고 해도 과거는 바로 나를 잊게 한 과정들이잖아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실수를 하게 되고, 또한 인간이기에 사랑할 수 있고, 인간이기에 운명에 장난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이기에 꿈을 꿀 수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을 찾아 돌아올 수 있을지 한 번 지켜볼까요? 어쩌면 상상하지 못할 반전이 있을지 모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