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잠
이란 지음 / 우원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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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을 보면서 장자의 나비가 생각나는 건 뭘까요?
꿈 속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 꿈에서 깨어 보니 자신이 장자라는 걸.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변해서 장자가 되었는지 난해한 문제.
나비는 자유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과연 소설 속에 나오는 허균이나, 매창이나 광해군은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신분적 제약을 벗어나 자유를 얻었을까요?
현실 속에서는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지만 꿈 속에서만큼은 훨훨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나비가 되어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요즘은 사랑에 나이도 없고 국경도 없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감정이 우선되어야 생각하지만 그보다 현실적으로 우리들은 항상 이성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잖아요.
비록 사랑하지만 가슴 아픈 사랑일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이야기.
단순한 사랑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역사 속 이야기가 함께 더 흥미로운 것은 어쩌면 잊혀진 사랑에 대한 느낌 때문이기도 해요.
지금은 너무나 쉽게 사랑을 하고 너무나 쉽게 헤어지고 느낌보다는 조건을 먼저 따지는 그런 사랑이잖아요.
정말이지 죽음을 각오한 사랑. 지고지순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요?
역사 속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정말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의 삶이 시대의 아픔과 가슴 아픈 사랑이 우리들 마음 속에 무엇인가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는 거에요.
허균의 죽음으로 부터 시작하는 이야기가 어찌보면 허무한 인생사를 나타내기도 하네요.
일장춘몽이라고 했던가요?
인생은 한 낮 꿈이라고 했던가요?
깨어날 때 깨어나더라도 행복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고 싶네요.
시대가 거부한 그들의 삶.
기생, 서자, 폐위된 왕.
깎이고 깎여야만 비로소 제 빛을 찾아 눈부신 아름다움을 빛낼 수 있는 다이아몬드처럼 어쩌면 그들이 그만큼 사람이 그리워기에 사람들 더 사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진정 그들이 원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비록 현실에서는 그들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다시 나비로 태어나서 그 꿈을 펼쳤으면 좋겠네요.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가 누군가의 꿈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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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는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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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그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얼핏보면 전혀 그와는 상관없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조금만 지켜보면 직접이던 간접이든 어떻게든 그와 연관이 되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세 사람인가 다섯 사람을 건너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알 수 있다고 했던 거랑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내 것이지만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쓰는 것.
넌센스 퀴즈같기도 하지만 정답은 이름.
이처럼 우리의 존재는 단지 내가 존재한다고 해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내가 정의되고 비로소 인식되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의 존재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그랬던 가요?
김춘추님의 꽃이라는 시에서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나는 그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기에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겠죠.
타인이 이야기하는 그.
예전에는 테이프에 나의 목소리를 녹음하곤 했는데 다시 들어보면 전혀 나처럼 느껴지지 않는 느낌처럼 정작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는 다르지 않을까요?
그럼 어떤 것이 정말 나의 모습일까요?
내가 생각하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의 모습?
그리고 보는 사람들마다 다른 모습들을 보게 되면서 마치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각각의 색깔로 나뉘어지는 것처럼 평상시에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마치 그것이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하나로 합치면 내가 되는 것처럼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들의 여섯가지 이야기들이 어떻게 보면 각각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그라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 것을 말이죠.
전체와 부분.
어쩌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많은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끔 어떤 사람들의 단편만 가지고 그것이 마치 그 사람의 모든 것인냥 판단해버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사는 그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그를 평가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이 책을 읽고 있는 우리가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그는 과연 어떤 색을 보여주게 될까요?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로 지금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해서 이야기 되어지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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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샤크
베르너 J. 에글리 지음, 배수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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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는 바다 속에서 공포의 대상일 수 밖에 없겠죠.
소말리아나 아프리카라고 하면 실상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지구 반대편 저 먼 곳의 어느 나라 정도만 생각되지 별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소말리아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심심찮게 그 곳의 해적 이야기가 각종 언론에 오르내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 선박도 소말리아 해적에게 잡혀서 몸값을 주고 풀려난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어릴 적 읽었던 보물섬 같은 책에서 막연하게나마 어느정도 해적에 대해서 동경을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상상 속의 이야기일뿐 그것이 막상 우리의 현실 속에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그저 강도일뿐이고 살인자일 뿐이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소설이나 영화에서 해적에 대한 이미지가 좋게 비쳐지는 것은 안 좋을 것 같아요.
블랙 샤크호에 점령당한 화물선 엠마 루 호.
어쩌면 자신의 생명조차 장담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아이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우리가 보기에 소말리아 해적은 당연히 범죄자이고 강도이고 살인자이지만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그들을 바라보면 왜 그들은 자신도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해적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아프리카의 현실이 가난과 기아로 허덕이는 그들이 어쩌면 생존을 위한 극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내몰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네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만 그런 원조의 손길이 과연 아이들에게 제대로 미칠지도 의문이 드네요.
탐욕스런 어른들에 의해서 내전에 휩씁리고 총알받이가 될 수 밖에 없는 아이들.
아프리카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서 아이들의 모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 흥미롭기도 해요.
누군가는 블랙 샤크의 부하가 되려고 하고, 누군가는 블랙 샤크에 대항하려고 하고, 마치 그것은 우리가 해적을 보는 시각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요.
우리에게는 해적이 범죄자이지만 또한 누군가에는 그들의 영웅일 수도 있잖아요.
소말리아의 현실을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떻게 보면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폭력의 결과라는 거에요.
인류가 처음 탄생한 곳. 아프리카.
동물들의 낙원이 지금처럼 굶주림에 허덕이고 내전에 신음하는 땅이 된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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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엔 좀 애매한 사계절 만화가 열전 1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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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으면 울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 수가 없는 현실은 과연 정상일까요? 비정상일까요?
아이들에게 꿈을 가져라고 말하는 어른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뭘까요?
너무나 일찍 세상 속에 나와버린 아이들.
세상을 너무나 일찍 알아버린 아이들.
과연 그들이 꿈을 꿀 수 있는 걸까요?
단지 이 책에 나오는 미술학원 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꿈을 빼앗는 어른들이 존재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어요.
입시를 위해서 미술학원을 다녀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들어본 거랑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리 다르지 않는 것 같아요.
재능은 있지만 그 재능을 마음껏 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네요.
각종 대회가 아이들의 재능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치맛바람이나 심사위원들의 입김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미술의 현실은 사실 예술을 어떤 정해진 잣대에 맞출 수 없기 때문이겠죠.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술을 하면 살기가 힘들다고 하잖아요.
돈이 많아야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말이죠.
원빈이 그토록 이루고자 하는 꿈이 과연 재능만으로 잡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부모님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초강력 미술학원은 욕망으로 가득찬 어른들과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아이들처럼 어찌보면 우리사회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막막해지는 것 같아요.
사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처럼 가난해서 학원을 다니지도 못하고 집안일을 도우면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지방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는 일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서울에 있지 않으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힘들고 더구나 학원을 다니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대학에 들어가기도 힘들어진 것처럼 부모님의 능력이 대학입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어찌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이룰 수 있을거라는 희망조차 주지 못하는 사회가 되면 안되겠죠.
단순히 미술학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네요.
제목처럼 울기엔 좀 애매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 속에서 찡한 느낌이 드는 건 뭘까요?
웃음 속에 감쳐진 냉혹한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겠죠.
어찌보면 현실이 힘들수록 더 열심히 일곱번 넘어지면 여덟번 일어나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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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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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허삼관 매혈기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아요.
일단 피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게 비슷한 것 같구요.
하지만 다른 점은 딩씨 마을에서는 그 피로 인해서 마을 사람들이 21세기에 들어서 인류가 겪고 있는 가장 무서운 질병인 에이즈에 감염이 된다는 게 다르구요.
어떻게 피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더구나 더 안타까운 것은 정작 이렇게 자신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사람들은 더 잘 산다는 것이겠죠.
최근에 사스가 전 세계를 휩쓸었을 때 중국이 자국의 사스 감염을 의도적이었던지 아니던 지연시키는 바람에 문제가 더 확산되었던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이 출간 되고 나서 판금되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소설을 통해서 사회적인 문제를 꼬집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에이즈라는 것이 문란한 성생활로 감염이 된다고 알려줘서 왠지 감염된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고 특히나 전염이 지금은 피나 상처 등으로 된다고 알고 있지만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중세의 패스트처럼 모든 사람들이 침이나 접촉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에이즈에 감염되어 치료도 안되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공포로 패닉에 사로잡혔을 때가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가정주부나 아이들까지 에이즈 환자로 보고 되고 있는데 그 전염된 과정을 살펴보면 잘못된 수혈이 많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지금도 수술에 많은 피가 요구되기 때문에 헌혈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피를 수입하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 현실인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소설에서도 보듯이 잘못된 위생상태로 인해서 에이즈가 감염되어지는 것을 보면 솔직히 꺼려지게 되는 게 사실이에요.
물론 주사기를 재사용하지는 않겠지만 만에 하나 이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이 봐온 게 사실이잖아요.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요?
정부의 대대적인 매혈 운동, 그 피를 사고 팔아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
자신의 피라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꿈을 살려고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해야 할까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함에도 힘없는 마을 사람이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사회를 보면서 물질만능주의로 팽배한 이 사회에서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배려나 존엄성, 생명에 대한 고귀함이 있는지 의문이 드네요.
작가가 어둠을 쓴 것과 동시에 빛을 쓴 것이라고 했듯이 절망 속에서 희망이 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걸 믿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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