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그 사관이 여전히 번창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아직까지는 지성사 연구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어떤 면에서 휘그 사관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널리 퍼져있다. 대중적인 역사 잡지나 어느 도시 책방의 ‘역사‘ 코너, 또는 라디오나 TV에 출연하는 인기 있는 역사가가 말하는 내용을 훑어보면, 예기적 해석, 즉 과거가 미래의 관심사를 앞질러 말해준다는 식의 독해가 지금까지 이를 비판해온 연구자들의 낯이 뜨거워질 만큼 여전히 지배적으로 유통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식의 잘못된 역사서 쓰기는 과거를 오늘날의 도덕적 관점에서 판단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다음으로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매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이어지는 무언가의 기원을 찾아내는 것이 두 번째 단계라면, 역사 속의 행위자들에게서 단순명료한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 세 번째 단계다. 그런 교훈의 예로는, 과거란 얼마나 별나고 흥미로운 때였는지, 또는 종종 되풀이되듯 과거에 비해 우리가 더 합리적이고, 더 윤택한 생활 수준을 누리고, 더 커다란 부를 누리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등등의 뻔한 내용이 있다. - P198

이런 출판물에 실리는 글을 몇 편 읽어보면, 수많은 현직 역사가들이 여전히 다음과 같은 잘못된 믿음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들은 과거의 연구에서 오늘날의 선행 사례를 찾아내야 하고, 과거는 우리 자신이 - P199

살고 있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흥미로우며,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범주들을 활용해 과거의 쟁점들을 캐물어야 하고, 우리가 과거의 행위자들 및 그들이 살던 시대를 반드시 도덕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믿음들이다. - P200

이러한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과거가 현재와 지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혹은 과거가 지금과 너무나 다르다는 점에서 신기하게 보이도록 역사를 제시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곤 한다. 그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는 이렇다. 점점 더 많은 수의 정치가들 혹은 공인들이 역사책을 적어도 한 권 정도 쓰는 일을 통과의례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책장은 스스로가 다른 이들의 작업을 적절히 각색했으며 1차 자료를 거의 또는 완전히 무시했다고 고백하는 책들로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 P200

지성사 연구가 목표하는 바는 과거 사상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이를 더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그런 사상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어째서 역사적인 문제를 풀고자 하는 서로 다른 해결 방법들이 각기 나름대로 타당할 수 있는지, 사람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이데올로기적 체계가 역사 속의 인간 행위에 어떤 한계를 부여하는지 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역사 속 행위자에게 공감하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세가 꼭 역사가가 과거의 사상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지성사 연구자는 인간과 사회가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기획에 회의적인 견해를 가질 확률이 높으며, 마찬가지로 혁명가로 살아가게 될 가능성도 적다. 이는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역사에 작용하곤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느 저자가 개진한 관념이 그 저작을 곧바로 대면한 청중들에 의해 수정되고 또 시간이 흘러 그때와는 달라진 지적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 미래의 세대들에 의해 어느 정 - P210

도 재발명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지성사 연구자들은 한편으로는 과거 혹은 현재와 연관된 주제들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충분히 수긍한다. 동시에 그들은 과거에 또 현재도 계속해서 사람들의 지적인 삶을 형성하고 있는 역사의 여러 층위들을 알고 있기에, 과거 어떤 관념이 중요했던 이유와, 역사 속 행위자들 혹은 우리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211

혹시 지성사가 스스로 과거의 저자에게서 혐오스러운 주장 혹은 관념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요점은 왜 저자가 그런 관념을 세계에 내놓았는지, 그리고 당시의 맥락에 입각할 때 어떻게 그런 논변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상황을 좀 더 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며, 더불어 당시에 해당 논변이 (설령 지금 우리들에게 매우 끔찍하다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 유효했는지 통찰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텍스트를 평가하는 작업을 피할 수 없다. 지성사 연구자들이 역사적인 텍스트를 두고 피상적인 비평을 내놓을 뿐인 접근법을 공격하는 것은 타당하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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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암울한 세계관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를 읽기 훨씬 전인 어린 시절에 형성되었다. 열일곱 살에 부모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던 쇼펜하우어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세상은 선한 존재의 작품일 수 없다. 세상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려고 생명체를 창조한 악마의 작품일 것이다." 몇 년 후 철학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쇼펜하우어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삶은 끔찍한 사건이야. 나는 이러한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기로 결심했다네." - P150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감사와 연민의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경험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동양의 신비주의자들처럼 이러한 인식이 환상이라고 믿었다. 세계는 하나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손가락의 통증을 느끼듯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 낯선 것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서. - P152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 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은 잘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 가능하다. - P153

매일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처럼 정신에서 구성된, 즉 인지적 세계를 경험한다. 이 세계는 실재한다. 호수의 표면이 실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리처럼 매끈한 수면이 호수의 전부가 아니듯이, 인지적 세계 역시 실재의 일부만을 나타낸다. 호수의 깊이를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 P155

쇼펜하우어가 매우 즐겁게 플루트를 연주했다는 사실은 그의 팬이었다가 비판자로 변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염세주의에 의문을 품게 했다. 매일 그렇게 즐거워하며, 그렇게 사랑을 담아 플루트를 연주한 사람이 어떻게 염세주의자일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아무 모순도 느끼지 못했다. 이 세계는 실제로 고통이자 엄청난 오류이지만, 그 고통이 일시적으로 유예될 때가 있다. 짧은 즐거움의 순간들. - P163

예술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예술, 좋은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다. 예술가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식을 전달한다. 실재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는 창문, 예술은 "한낱 개념"을 넘어서는 지식이며, 그러므로 말의 표현 범위를 넘어선다.
또한 좋은 예술은 정념을 초월한다. 욕망을 키우는 모든 것은 고통을 키운다. 욕망을, 쇼펜하우어의 표현에 따르면, 의지를 줄이는 모든 것은 고통을 완화한다. 예술 작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포르노가 예술이 아닌 것이다. 포르노는 예술의 정반대 지점에 있다. 포르노의 유일한 목적은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욕망을 자극하지 못하면 그 포르노는 실패작으로 여겨진다. 예술에는 더 고귀한 목표가 있다. - P164

쇼펜하우어는 음악 외의 다른 예술은 그림자를 이야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음악은 본질을, 물자체를 이야기하고, 그러므로 "모든 삶과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성을 표현"한다. - P164

진정한 듣기를 위해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처럼 아무런 판단 없이 음악을 들을 때 "절대적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 P169

다른 철학자들이 저 바깥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한 것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내면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내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명백하다.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가, 다른 방면으로는 똑똑한 작자들이, 이 사실을 놓치는 걸까? 내 생각에 그 이유 중 하나는 외부를 살피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환한 불빛 아래서 자기 열쇠를 찾는 술주정뱅이나 마찬가지다. - P175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 P179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 P179

인터넷은 디지털 시대에 나타난 쇼펜하우어의 의지다. 끝없이 분투하고, 절대 만족하는 법이 없다. 나의 가장 귀중한 자원인 시간을 포함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행복이라는 환상을 제시하지만 오로지 고통만을 가져온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처럼, 인터넷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금욕적인 삶을 살거나, 미학적인 삶을 살거나.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 P180

나는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 유예가 아닌, 더욱 풍성한 다른 세상으로의 침잠,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음악 안에서 본 것임을.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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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여러 가지 이유로 잊혔거나 거부되었던 정치적 논의들은 오늘날의 정치를 위해 다시 복원 · 활용될 수 있었으며, 바로 그 작업이 이제 지성사 연구가 수행해야 할 과제 중 하나였다. - P155

정확히 말해 지성사 연구자들이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톰슨이 저지른 것처럼 역사적 기록에서 후대에나 만들어진 관념을 투사해 읽어내는 오류를 찾아 판별하는 일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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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성 영웅은 스스로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능력을 알 뿐만 아니라, 자신이 찾던 보물을 발견한다. - P132

1980년대의 슈퍼우먼 숭배 문화는 젊은 여성들에게 높은 임금과 개인적 성취감을 주는 직업, 애정이 넘치고 동등하며 안정적인 결혼 생활, 어머니로서 느끼는 환희,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약속했다. 현대의 많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들이 1950년대에 견디거나 혹은 즐겼던 ‘여성의 신비"에 대한 반작용으로 슈퍼우먼이 되었다. 그들의 어머니들은 남자들의 세계에서 경쟁을 할 선택권도 없었고 자녀 출산 선택권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과 자녀를 부양하는 남자들에게 의존했다. 외부의 ‘남성적‘ 세계에서 얻을 수 없는 권력을 가족 내에서 휘두르는 권력으로 보상받았다. - P134

많은 여성 영웅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아버지가 원했고 또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자신을 보살펴주는 누군가의 존재이다. 사랑과 힘을 주고, 고충을 들어주고, 전투에 지친 몸을 마사지로 풀어주고, 성공을 인정해주고, 상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여성 영웅은 여성성과 관계 맺기를 원한다. 내려놓고 싶어 하고, 보살핌받기를 원하고, 자신이 이룬 것이 아니라 바로 그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기를 바란다.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무엇인가를 애타게 그리워하지만 정작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이럴 때 여성 영웅들은 외부 활동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고통을 달랜다. - P138

남편과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취를 의존했던 어머니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성 영웅은 어떤 것이라도 성취할 수 있도록 어떤 남자보다 독립적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탈진하기 직전까지 자기 몸을 혹사한다. 거절하는 법을 잊어버린 여성 영웅은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들면서, 보살핌받고 사랑받고 싶은 자신의 욕구는 무시한다. 통제불능이다. 내면의 남성과의 관계는 뒤틀리고 폭력적으로 변했다. 내면의 남성은 절대로 여성 영웅이 쉬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억눌린다고 느끼지만 이 괴로움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 P139

무의식의 남성에 붙들려 있을 때 여성은 자신이 무엇을 하건, 어떻게 하건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그가 계속해서 또 다른 것을 추구하도록 몰아대기 때문에 한 가지 과업을 완성 - P142

하는 것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가치가 없다. 무의식 속의 남성은 미래를 생각하라고 다그친다. 여성은 비난받았다고 느끼지만 내면의 결핍된 부분에서 이런 반응이 나온다. "맞아. 어떤 걸 좀 더 해야 해. 이걸로 충분하지 않아." - P143

대부분의 영웅 이야기는 인생 전반부를 다룬다. 그 전반부에서 영웅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세운다. 이 과업에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기술을 습득하고, 탁월하게 성취해내는 일들이 포함된다. 이 과업은 그녀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그 일이 무엇이건 간에 의식적으로 선택했다면, 그 일은 ‘영혼을 빚어내는(soul-making)‘ 과정이 된다. - P144

여성들이 완전한 존재가 되려면 먼저 자율성을 찾아야 한다. 자율의 의미를 엄밀히 따지다 보면 성공에 관한 진부한 생각을 버리게 된다. 많은 여성이 성취라는 이름으로 영혼의 많은 부분을 희생했다. 외부로 향하는 모험의 보상은 유혹적일 수 있지만, 어느 순간 깨어난 여성 영웅은 자아의 영웅적 행위에 ‘아니오‘라고 말한다. 그 영웅적 행위는 이제까지 큰 대가를 치러 왔다. - P144

내면의 성취를 이루려면 영웅성에 관한 잘못된 관념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여성 영웅은 진정한 보물을 발견한다. 이제 여성은 자아의 변덕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근원이자 더 깊은 힘에 닿을 수 있으며, "나는 모두의 비위를 맞출 수 없어. 그리고 난 충분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현실적이고 솔직해지며, 약점을 인정하고 진정한 의미의 영적 각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 P145

겉도는 내면의 남성성에 자신의 인생을 맡긴 여성은 남성들이 세운 기준에 맞추어 성공하려는 욕구에 휘둘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건강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려면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영웅적 여정의 보상에 관한 여성 영웅의 예상은 틀렸다. 물론 그녀는 성공과 독립과 자율 따위의 보상을 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이나 영혼의 한 조각을 잃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성은, 목표 지향적인 남성적 사고를 신뢰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문화적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개인적 사고방식에도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착한‘ 딸이 되어라, 그러면 ‘아버지‘가 널 돌봐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위로받지 못하고 철저히 혼자라고 느낀다. 그녀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녀의 질서정연한 세계에 금이 간다. - P154

대부분의 여성들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녀들은 필사적으로 남성 신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냉담하고 비판적인 아버지라 할지라도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딸이 세상의 다른 남성들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를 결정하는 힘이 있다. 여성이 자신의 삶에서 이 첫 번째 남성이 끼치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깨닫는다면, 남성성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을 버릴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녀는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다. - P159

지난 5천 년 동안 대체로 생산 지향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관점과 지배-피지배의 방식으로 삶에 접근한 남자들이 우리 문화를 규정해 왔다. 삶에 경의를 표하는 것, 그리고 자연의 순환과 한계, 그 산물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 P164

여성이 자신을 지배하는 내면의 목소리, "그가 옳아. 네 경력에 손해가 될 거고 결국 되돌아오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거부할 때,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공허감, 혹은 어쩐지 확실한 출세의 길을 밟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당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한 그들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데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아니오‘라고 말하고,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내면의 폭군을 침묵시키면서 우리는 강해진다. - P168

여성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멈추었을 때는 그저 존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존재함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신선놀음이 아니다. 존재함은 훈련이 필요한 행위이다. 여성 영웅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진짜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이 일은 그녀에게 무엇이든 하라고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목소리들을 침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형태가 분명히 떠오를 때까지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설익은 것은 성장을 멈추고, 변화를 거부하고, 변형을 번복하게 한다. 그저 존재하는 일에는 용기와 희생이 필요하다. - P170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낡은 방식과 결별해야 한다. 비록 이러한 행위가 외부 세계에서 받은 갈채의 상실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여성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직위를 거절하기 시작해야 한다. 물론 대개는 갈채를 잃는다. 또한 새로운 길이 분명해지기 전에는 치유가 필요한 커다란 상처가 남는다. - P170

가부장제를 거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남성성과 새로운 관계를 발달시키기 위한 새로운 공간을 우리 내면에 창조하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새롭게 관계를 맺을 남성은, 우리 문화에서 많은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세기에 걸쳐 여성성과 분리되어 있던 남성적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를 위대한 어머니에게 데려다 줄 창조적인 남성이다. 위대한 어머니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여성적 본성에서 분리된 상태를 치유할 수 있다. 가부장제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5천 년 동안 추방된 여성성의 힘과 열정이 잠들어 있는 땅속 깊숙한 곳, 여신의 정신을 향해 하강"을 시작한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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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는 초월주의자로 간주된다. 철학 사조 중 하나인 초월주의는 다음 다섯 어절로 요약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하지만 소로는 보이는 것을 더욱 굳게 믿었다. 실재의 본성보다는 자연의 실재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정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그럴 수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도 상당히 경이로우니,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소로는 지식보다 시력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완전하다. 오늘의 확신은 내일의 헛소리다. "그게 무엇인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뿐이다." - P119

본다는 것은 사진보다는 언어에 더 가깝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 저게 뭐지? 머그컵처럼 보이지 않아? 내가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해본 다음에 알려줄게. 맞네. 머그컵이 맞아.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머그컵을 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 앞에 머그컵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한다. 머그컵은 그저 우리의 눈과 뇌에 전자기파를 보낼 뿐이다. 이 미가공 데이터로부터 우리는 정보를, 그다음엔 의미를(앞서 말한 경우엔 우리 앞에 있는 물체가 ‘머그컵‘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창출해낸다. - P120

가끔 우리는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어쩌면 머그컵처럼 보이는 저 물체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 있다. 물건과 사람을 너무 빨리 정의 내리면 그것들의 유일무이함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소로는 그러한 경향을 경계했다. "보편 법칙을 너무 성급하게 끌어내지 말 것." 소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특수한 사례를 더 명확하게 들여다볼 것." 눈앞에 보이는 것을 바로 규정하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소로는 그 속도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추측과 결론 사이의 틈, 보는 것과 본 것 사이의 틈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소로는 더 오래 머무르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오랜 시간 들여다봐야만 볼 수 있다." - P120

소로에게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소로는 느끼지 않고는 보지 못했다. 어떻게 느끼느냐가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결정했다. 소로에게 보는 것은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상호적인 행위였다. 예를 들어 장미를 보면 소로는 장미와 대화를 주고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협력하기도 했다.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 다소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 안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도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낀다. 이들 모두가 미친 것일 리는 없다. - P121

차가 꽉 막히면 우리는 "차가 왜 이렇게 막히냐"고 불평을 해대면서 나 또한 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 나 또한 문제의 일부라는 사실은 무시한다. - P131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있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시력을 향상시킬 수 없다. 보는 것의 역학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는가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다. 《베다》에서 말하듯,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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