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서평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서평의 소재는 책이고, 방식은 비평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평하는 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서평의 본질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평’을 책에 대한 모든 언급으로 착각하는 일도 많지요.
실제로 서평이라고 작성했는데 내용은 독후감인 경우도 흔합니다. 책에 대한 소감을 나열하고, 이를 책에 대한 평으로 오인하는 겁니다. 요약에서 멈추는 경우도 자주 보았습니다. 서평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모호한 탓이겠지요. - P21

책에 다가가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책에 대한 나름의 해석입니다. 해석을 통해 책은 계속 만들어져 갑니다. 저자의 (읽고) 쓰는 행위와 독자의 읽(고 쓰)는 행위로 끝없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저자와 독자가 섞이고, 읽는 것과 쓰는 것이 합류합니다. 책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성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책은 항상 새롭게 읽혀야 한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서평을 통해 구현된다." - P30

서평 또한 해석입니다. 서평, 즉 북리뷰 Book Review에서 ‘리뷰‘는 책을 ‘다시re 보는 view‘ 겁니다. 새롭게 읽는 것이지요. 이는 해석의 주체인 독자가 각기 다른 자리에 서있기에 가능합니다. 모든 서평은 독자/서평자의 다시 읽기입니다. 나아가 다른 독자에게 다시 읽기를 제안합니다. - P33

좋은 책일수록 해석의 여지가 많고 저자와 독자 간의 대화가 지속됩니다. 고전이 이름값을 하는 것은 해석의 가능성이 소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P36

이 해석 작업은 말과 글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서평은 글의 일종입니다. 서평은 다름 아닌 논리를 담아내며, 서평가가 읽은 책에 대한 조리 있는 설명과 평가를 문자화합니다. 읽고 나서 느낀 감동과 깨달음을 쏟아 내는 것은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입니다. 물론 독후감의 감동과 깨달음은 서평의 설명과 평가와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독후감이 보여 주는 감동과 깨달음에 논리와 체계를 부여하여 설득력을 배가시킨 것이 서평이니까요. - P37

독서는 그저 책을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책에 대한 독자의 이해와 해석은 계속됩니다. 실은 그의 삶을 통해 책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지속된다고 말해야 정확할 터이지만, 여기에서는 그에 대해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표현입니다. 해석은 언어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말과 글을 통해 구체적으로 정리되어야 독서는 완결됩니다. - P43

서평 쓰기의 일차 가치는 독자 자신의 내면 성찰에 있습니다. 서평 쓰기는 작성자가 그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독서 자체가 그러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서평 쓰기는 심화된 독서 행위입니다. 더욱 깊게 책을 읽는 가운데 자신을 더욱 깊이 읽게 되는 것이지요. - P44

좋은 책을 잘 읽으면, 삶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서평은 이러한 독서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서평 쓰기의 귀결은 독서를 통해 획득한 자아와 타자에 대한 깨달음을 더 넓은 지평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앎과 삶의 일치, 즉 인격의 통합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 P49

좋은 서평은 이렇게 독자에게 서평자의 의도를 관철해 냅니다. 독자가 대가를 치르게 했다면, 그러니까 독자가 책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면, 또한 독자가 책을 집어 들어 읽게 만들었다면, 그 서평은 성공한 셈입니다. 그 책을 사거나 읽지 않도록 할 때에도 그 서평은 성공한 것이지요. 만일 그 서평이 서평자의 의도와 반대로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 서평은 실패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평은 독자와의 씨름입니다. 그러므로 서평을 쓸 때는 영혼을 담아야 합니다. - P58

서평을 작성하면서 특정한 평가에 따른 특정한 의도를 관철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평가에 부합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서평을 단지 의례적인 주례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공치사로 장식된 서평도 서평이긴 하지만 결코 좋은 서평은 못 됩니다. - P60

그렇다면 서평자는 무엇을 위해 책을 읽을까요? 기본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목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저 각각의 다양한 목적에 따라 읽고 독자와 공개적으로 소통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읽느냐보다는 왜 읽느냐에서 도출되는 질문인 무엇을 소통하려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 P70

서평가는 결코 밀실에서 고고하게 외치는 이가 아닙니다. 그는 광장, 그러니까 공론장에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서평을 작성합니다. 나아가 사회 자체를 그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데에 서평을 활용하고자 합니다. 반드시 그런 거창한 목적을 위해 써야 한다는 당위성이 없더라도 그 목적만은 스스로 분명하게 세워야 합니다. 이 점만 명확하게 할 수 있다면 포르노 소설로도 서평을 쓸 수 있습니다. - P71

분노로 두개골을 열어젖혀도 그 안에 근육밖에 없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선 문법과 언어의 기본 수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또한 문자를 넘어서 그 맥락을 파악하고 저자의 심층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독해력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해당 도서가 자리하는 맥락(전공)에 대한 기본 이해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의 도서관 혹은 인덱스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P73

따라서 어떠한 책에 대해 분노를 느끼거나 비판을 하더라도 동시에 그 책의 매력 요인에 최대한 공감해야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비판인 것입니다. 애초에 독자라면, 아니 서평가라면 기본적으로 공감의 태도로 책에 접근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판의 해석학에 선행하는 것은 공감의 해석학입니다. 온전히 매료되어야 제대로 비판할 수 있습니다. - P75

책에 대한 매료가 책에 대한 반박에 앞서고 논지에 대한 이해가 주장에 대한 비판에 선행하며, 저자에 대한 공감이 저자에 대한 공격을 예비합니다.
그렇기에 좋은 요약은 공정한 평가의 전제가 됩니다. 요약은 성실한 독서에 따른 이해의 결과요, 증거입니다. 요약이 서평의 본질은 아니지만, 요약 없이 서평을 작성할 수는 없습니다. 평가가 열차라면, 요약은 레일입니다. 따라서 평가 없는 서평은 공허하나, 요약 없는 서평은 맹목적입니다. 성실한 독서와 이를 통한 적절한 요약 다음에 나름의 평가가 따라야 합니다. - P80

서평가의 해석과 평가에 튼실한 기반을 제공할 수만 있다면 단 한 문장이 되었든, 서평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든 상관없습니다. 서평의 독자, 즉 서평이 다루는책의 잠재 독자가 책의 요약을 기반으로 삼아서 서평가의 평가를 가늠할 수 있으면 되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요약 자체가 해석입니다. 해석은 해석자의 전망과 입장을 매개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요약도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약의 정확성과 균형 감각은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숙련된 독자의 눈에는 이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 P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는 일들이 몇 가지 있지. 난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미래들에 간섭했네. 그러다가 결국 그 미래들이 나를 창조해 내게 되었지」
「폐하, 그런 말씀은………」
「이 우주에는 답이 전혀 없는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네. 정말 어떻게도 손을 써볼 수가 없어」 - P213

「폴은 평생 동안 지하드와 신격화에서 도망치려고 몸부림을 쳤어요. 지금은 적어도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셈이죠. 이건 오빠가 선택한 거예요!」 - P22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lummii 2023-01-23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듄 시리즈! 제가 정말 좋아했던 시리즈인데 6권까지 읽은 분 만나다니 반가반가워요 ㅎㅎ

Heath 2023-01-23 09:04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한참 읽고 있는데 아직 남은 권수가 많네요 ㅎㅎㅎ
 

안타깝게도 그 흔적들은 지금도 아주 많은 곳에, 가령 인터넷 사이트들에도 널려 있다.
지금도 세계사의 흐름을 보이지 않게 주도하는 비밀집단이 있다는 생각을 이론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터넷에서는 삼자 회담, 빌더버그 회의, 다보스 정상 회의 등을 기업가, 정치가, 은행가들이 자기네 입맛대로 경제 전략을 세우는 자리처럼 묘사하곤 한다. 하루하루 절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파생상품투기로 파산한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춰진 음모가 있다는 듯이. - P384

장미십자회 오컬티스트 조제핀 펠라당이 말한 대로 입문의 비밀은 드러나는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 하지만 대중은 비밀을 탐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쥐고 있는 것 같은 사람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언제 그 비밀을 폭로해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잘 알수록, 혹은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낼 수록 권력을 쥐게 된다. 지구의 절반에서는 이것이 경찰과 첩보활동의 원칙이었다.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첩보 활동은 정부의 기밀문서가 공개될 때, 혹은 위키리크스 같은 단체가 기밀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을 때 무너진다. - P390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계획을 발명해 냈다. 그러자 그들은 그 계획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 논리적이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유추와 유사와 의혹을 거미줄처럼 교직한 우리 계획의 계기와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누가 계획을 발명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수행한다면 계획은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계획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 P392

자, 진짜 비밀로 마무리를 하자. 침해할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비밀을 악착같이 추구하는 것은 장황한 욕망이다. 알카에다의 몇몇 자살 특공대원이 쌍둥이 빌딩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가 눈으로 본 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서툴고 불량한 조물주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 P398

이쯤에서 렌르샤토 이야기를 접어도 되겠다. 이제 그 마을은 메주고레가 그렇듯 순례의 장소일 뿐이다. 렌르샤토의 경우는 전설을 <아예 처음부터> 지어내기가 얼마나 쉬운지, 또한 역사학자와 법정과 기타 기관이 거짓임을 입증한 전설조차 얼마나 힘이 셀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아포리즘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이 더는 신을 믿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뭐든지 믿을 태세이기 때문에 그렇다.> 포퍼의 관찰과도 일치하는 이 아포리즘은 음모 신드롬에 대한 성찰의 명구로 안성맞춤이지 싶다. - P430

성스러움을 경험한 자는 현존을 느끼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복종이나 희생, 때로는 인신공양의 행위로 반응한다. 또 어떨 때는—특히 순박한 사람들이 자주 그러한데―성스러움을 〈보고〉 싶어 한다. 여기서 히에로파니hierophany(성현聖顯), 즉 성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시적 모습을 취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성의 존재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을 말하기 위해 성스러운 것을 보기 원한다. 그러지 않으면 경이감, 당혹감, 망연자실, 공포 같은 효과에만 머물게 될 것이므로(그런데 그는 이 효과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성스러움이 늘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어떤 문화에서는 다양한 대체 형상, 어쨌든 인간이 <다른> 것을 엿볼 수 있는 나무, 돌의 모습을 취한다. - P434

그렇지만(나는 신비주의 역사 전문가가 아니므로 이 가설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보자면)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무(無)>의 체험은 남성 신비주의자의 고유한 특성—내가 보기에는—같다. 신을 순수한 무로 보았던 여성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걸출한 신비주의자 여성들은 그리스도를 거의 육체적인 존재처럼 떠올리곤 했다. 여성의 신비주의에서는 히에로파니가 우세하다. 신의이미지를 본 여성은 의심할 여지없는 성애적 황홀경을 묘사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와 주고받은 사랑의 감정을 토로한다. - P4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간 모든 생물들이 여러 가지 힘들의 목적, 그리고 원래부터 갖고 있던 기질과 훈련에 의해 조각된 일종의 운명을 지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드가 그를 선택한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다중의 힘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느꼈다. 변하지 않는 그들의 목적이 그가 나아가야 할 길을 통제했다. 그가 지금 품고 있는 <자유의지>에 대한 모든 환상은 죄수가 자신을 가둔 쇠창살을 거칠게 흔들어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그 쇠창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저주였다. 그는 그 쇠창살을 볼 수 있었다! - P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만 루슈디가 1988년 발표한『악마의 시』는 작중 예언자 무함마드를 불경하게 묘사했다는 점이 논란이 되어 문제작이 되었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루슈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파트와를 선언하고, 일본, 노르웨이 등지에서 번역가가 피살 당하는 등의 여러 사건이 있었다. 21세기 들어서도, 2022년 8월 작가 루슈디가 뉴욕에서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루슈디와 이 소설은 여전히 문제적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소설보다 소설을 둘러싼 현실의 정황이 더 극적이다. 하지만 역자가 말하듯이 이제는 '소설을 읽을 때'이다.


이 소설은 총 9장으로 구성되며 홀수장에서는 소설의 두 주인공 지브릴 파리슈타와 살라딘 참차의 이야기가, 짝수장에서는 지브릴이 보는 환상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은 2만 9천피트(에베레스트산 높이) 상공에서 두 남자, 지브릴 파리슈타와 살라딘 참차가 런던 해협으로 떨어지며 시작된다. 런던 상공에서 비행기 AI-420 보스탄(낙원의 두 동산 중 하나를 의미)이 폭발하였고, 두 사람은 비행기의 잔해와 구름을 거치며 추락한 끝에 런던 해협에 무사히 도착한다. 이어서 지브릴과 살라딘이라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인지 소개되고, 런던을 주 무대로 지브릴과 살라딘은 얽힌 실타래처럼 꼬인 여정에 나선다.


비행기 폭파 사고에서 살아남은 지브릴은 사고에서 살아남은 후 머리 뒤에 후광이 생기면서 점차 천사처럼 변해간다. 반면 살라딘은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고 발굽과 꼬리가 생기는 등 악마처럼 변해간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대비된다.


지브릴은 인도 영화계의 슈퍼스타다. 지브릴은 살라딘과 달리 소설에서 거의 신체적인 고난을 겪지 않는다. 지브릴의 곁에는 알렐루야 콘이라는 금발백인의 미녀가 있다. 대신 지브릴은 정신적인 고난에 시달린다. 환상을 보기 때문에 억지로 잠들지 않으려 한다. 소설 도중에는 신인지 악마인지 모를 존재를 실제로 만나기도 한다. 


지브릴은 2장, 4장, 6장, 8장, 총 4개의 장에서 환상을 3번 본다. 첫째는 예언자 무하마드(소설에서는 의도적으로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표현인 마훈드로 지칭된다)가 자힐리아(메카의 옛날 이름)의 대공 아부 심벨에게서 아라비아 토속 신앙의 세 여신을 이슬람교에 편입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려다가 그것이 '악마의 수작'임을 깨닫는다. 뒤이어 자힐리아를 떠난 무하마드는 야트리브에서 군세를 몰고 귀환하여 자힐리아의 우상들을 파괴한다. 두 번째 환상은 런던에 망명 중인 이맘이 지브릴의 도움을 받아 이란으로 되돌아가 이란을 집어삼키는 내용이다. 마지막 환상은 나비소녀 아예샤가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는 천사의 계시를 내세워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바다로 떠나는 이야기다. 지브릴은 환상들을 보면서 자신이 하늘에서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관객이자, 동시에 무대에 서서 환상 속의 인물 역할을 일부 맡는 동시에 환상 속의 인물들이 마주하는 '대천사 지브릴' 역을 맡은 배우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반쯤 잠들어 있는, 혹은 반쯤 깨어난 상태에서 지브릴 파리슈타는 이 지긋지긋한 꿈 속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신에게 종종 분노를 느낀다. 내가 죽어갈 때, 내가 간절히 간절히 필요로 할 때도 나몰라라 하던 그 ‘하나‘, 알라 이슈바르(Ishvar) 하느님. 이 모든 일이 자기 때문인데도, 자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데도 신은 예나 지금이나 온데간데 없다.

‘절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 장면, 무아지경의 예언자와 배꼽 탈출과 빛의 탯줄이 자꾸 반복될 뿐이고 그때마다 일인 이역의 지브릴은 위에서내려다보는 동시에 밑에서올려다본다. 그리고 둘 다 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두려워 돌아버릴 지경이다. - 『악마의 시』, 상권, P. 167


마훈드가 눈을 크게 뜬다, 어떤 환상을 보고 있다, 뚫어지게 바라본다, 아하, 그렇구나, 지브릴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나였어. 나를 보고 있어. 내 입술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움직여지고 있으니까. 무엇이, 누가?

모른다, 말할 수 없다. 어쨌든 나온다, 내 입에서, 목구멍을 지나, 이빨 사이를 뚫고 말씀이.

신의 우체부 노릇도 재미있는 건 아니라네, 친구.

그러나그러나그러나: 이 장면에도 신은 나오지 않는다.

내가 누구의 우체부인지 알 게 뭐냐. - 『악마의 시』, 상권, P. 168


지브릴과 관련해 유달리 강조되는 점은 에베레스트 산이다. 처음 지브릴이 추락할 때의 높이도 에베레스트산과 동일한 높이이며, 지브릴에게 수 차례 유령처럼 나타나는 레카 메르찬트라는 여성은 지브릴이 사는 건물인 '에베레스트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인물이다. 소설에서 지브릴과 서로 사랑하는 금발 백인의 유대인 여성 알렐루야 콘은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등반가이다. 


지브릴이 목격한 환상이 정말 소설 속에서 현실로 일어난 일인지, 단지 정신병에 시달리는 지브릴의 망상인지, 둘 다인지는 소설에서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어쨌든 지브릴은 살라딘 참차와 대비했을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천사의 역할을 맡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반면, 또 한 명의 주인공, 살라딘 참차는 온갖 수난에 시달린다. 권위적이고, 엄하고, 뻔뻔하기도 한 아버지 창게즈 참차왈라가 싫어서 이름을 살라후딘 참차왈라에서 살라딘 참차로 바꾼 그는, 영국으로 유학가 철저한 영국인이 되고자 한다. 


분노의 불길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 숭배를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그를 세속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그때부터 그는 어떠한 종류의 신도 섬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다르고 또한 아버지가 결코 될 수 없는 존재, 즉 철두철미철저한 영국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어쩌면 그 분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 『악마의 시』, 상권, P. 70


처음 유학왔을 때 청어 요리 먹는 법 조차 몰랐던 살라딘은 영국 여성 파멜라 러브레이스와 결혼하고 말투까지도 철저히 영국식으로 바꾼다. 종종 화자는 살라딘을 두고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처럼 피눈물나는 살라딘 참차의 노력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해변가에서 지브릴과 살라딘을 데려온 노인 로사 다이아몬드의 집에 들이닥친 경찰과 이민국 직원들은 지브릴은 신경쓰지도 않고 살라딘만 체포해간다. 끌려가는 도중에 학대까지 가한다. 다행히 살라딘의 신원이 조회되긴 했으나 경찰과 이민국 직원들은 적당히 넘어갑시다라며 아무도 책임지는 일 없이 넘어가버린다. 


부상당한 살라딘이 억류된 병원에는 살라딘처럼 몸이 변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놈들은 우리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뿐이에요. 놈들에겐 묘사의 힘이있고 우리는 놈들이 그려놓은 모습대로 변하는 거죠." 『악마의 시』, 상권, p. 246


말하자면 몸이 변한 사람들은 영국인들의 묘사한 모습대로 변해버린 이민자들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살라딘은 그토록 영국인이 되고자 했건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에게 악마로밖에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이 변한 사람들과 함께 탈출한 살라딘은 자기 집에 갔다가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조시 점피라는 남자와 사귀는 파멜라 참차를 만나게 된다. 한술 더 떠 살라딘은 파멜라 사이에 자녀를 갖지 못해 관계가 사실상 파탄에 이르고 말았지만 파멜라는 조시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살라딘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국에서 미미 마물리언이라는 유대인 배우와 같이 〈에일리언 쇼〉라는 TV쇼에서 성우로 출연하고 있었는데, 제작자 헬 밸런스가 인종문제로 클레임이 들어온다면서 살라딘을 해고해버린다. 순식간에 일자리 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소설 중반 시점인 5장 1부 마지막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오긴 한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살라딘의 처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러나, 그는 꿈 속의 아이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에게 무자식의 운명을 선사했고, 그는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녀를 멀어지게 하고 그의 대학 동창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만들었고, 그는 한 도시를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를 히말라야 산맥의 높이에서 그 도시를 향해 내팽개쳤고, 그는 한 문명을 사랑했지만 인생은 그가 악마로 변하고 모욕당하고 그 문명의 수레바퀴에 짓밟혀 망가지게 했다. - 『악마의 시』, 하권, P. 165


그런 살라딘 앞에 영화계 복귀를 선언한 지브릴이 나타난다. 지브릴을 향한 분노로 가득찬 살라딘은 자신의 재능인 목소리를 살려, 지브릴과 지브릴의 연인 알렐루야 콘에게 시를 선물한다. 한때 악마로 변했던 자가 천사 같은 인물에게 시를 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악마의 시'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 상세한 과정과 그로 인해 초래된 사태는 소설을 참고해주길 바란다. 


지브릴과 살라딘, 두 사람 이외에도 이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각자 나름의 고유한 배경과 생각을 지니며 서로 충돌하고 협력하고 갈등한다. 소설의 주 배경이 런던임에도 불구하고 주요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앵글로-색슨계 영국인이 아니다. 인도계 영국인을 비롯한 이민자들이다. 인도 뭄바이 태생의 무슬림 작가가 그려내는 런던 답다고 할 수 있다. 일부는 지브릴하고만 관계있고 일부는 살라딘하고만 관계있지만, 많은 등장인물들이 런던이라는 대도시에서 지브릴과 살라딘 두 인물이 교차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또한 지브릴이 환상속에서 보는 인물들과 지브릴, 살라딘이 현실에서 만나는 인물들 중에는 빌랄, 칼리드, 힌드, 아예샤처럼 동일한 이름을 지닌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서술자다. 소설의 시점은 문학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자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데, 이 서술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나 악마에 준하는 존재다. 이렇게 보면 소설의 첫 장면,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하고 지브릴과 살라딘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도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마치 성경의 「욥기」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을 시험하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초월적인 존재 '나'가 에베레스트 상공에서 천사 같은 지브릴과 악마 같은 살라딘을 런던이라는 혼탁한 세상으로 내던지고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니까. 지금으로서는 무소부재(無所不在)니 무소부지(無所不知)니 하는 것들을 주장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 일은 참차가 의지력으로 원했고 그 의지에 따라 파리슈타가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어느 쪽인가?

파리슈타의 노래는 어떤 것이었나, 천사의 노래, 악마의 노래?

나는 누구냐고?

이렇게 표현해보자: 누구의 노래가 최고인가? -『악마의 시』, 상권, P. 25


악마가 된 자신을 두고 왜 하필 내가 벌을 받느냐고 호소하는 살라딘 앞에서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악의 화신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든 간에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혹은, 나만이 아니다. 나는 온갖 그릇된 것들과 ‘우리가 증오하는 모든 것‘과 죄악이 유형화된 존재다.

그런데 왜? 왜 나야?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도대체 내가 어떤 사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또는 저지르려 했다고?

내가 무엇 때문에 — 그는 이런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 벌을 받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누가 내리는 벌이지? (이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나름대로 ‘선(善)‘을 추구했고 내가 가장 선망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강박 관념이라고 할 정도로 집요하게 매진하지 않았더냐? 열심히 일하고 말썽을 피하고 새사람이 되려고 분투하지 않았더냐? - 『악마의 시』, 상권, P. 370


알렐루야 콘의 침대 위에서 신의 형상으로 지브릴 앞에 나타난 후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밝혀달라고 요구하지 말아라. 계시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창조의 규칙은 상당히 명확한 편이다. 이것저것 만들어 차려놓은 다음에는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 만들어놓은 뒤에도 넌지시 힌트를 주거나 규칙을 바꾸거나 결과를 조작하거나 하면서 일일이 간섭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제법 자제력을 발휘해 왔는데 이제 와서 일을 망칠 생각은 없다. 물론 나도 참견하고 싶을 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꽤 많았다. 그리고 한 번은 참견했던 것도 사실이다. 알렐루야 콘의 침대에 걸터앉아 슈퍼스타 지브릴에게 말을 걸었으니까. 우파르발라냐, 니차이발라냐: 녀석은 그걸 알고 싶어했지만 나는 확실히 가르쳐주지 않았다. 지금 저렇게 알쏭달쏭해 하는 참차에게 수다를 떨 생각도 물론 없다.

난 이제 떠나겠다. 저 녀석은 곧 잠들 것이다. - 『악마의 시』, 하권, P. 176


소설의 특징을 하나 더 들자면, 작가가 인도인이라는 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서양 작가들의 글과는 다른 시각, 다른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저자는 이슬람, 인도, 서구문명을 비롯해 다양한 레퍼런스를 언급하는데, 이를 통해 인도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서구문명을 느낄 수 있다.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고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다. 


한편 이 같은 다양한 레퍼런스를 통해 루슈디라는 작가가 얼마나 깊은 학식을 지녔는가 알 수 있다. 그리고 독자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각 레퍼런스마다 역주가 달려있는데, 아쉽게도 본문에 역주를 삽입한 탓에 읽다가 흐름이 끊긴다는 문제가 있다.



다행히 문학동네에서 작년에 새로운 판본을 출간하였다. 번역자는 동일하고 역주는 모두 각주로 처리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