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을 수 있는 아포리즘은 <재치> 성벽의 질병이다. 달리 말하자면, 재치 있어 보이기만 하면 어떤 명제와 그 명제의 역(逆)이 모두 참이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의 격언이다. 역설은 일반적 관점을 사실상 뒤집어서 받아들이기 힘든 세계를 제시하고 저항과 거부를 야기한다. 하지만 그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앎이 발생한다. 결국 그게 참이라고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재치 있게 보인다. 뒤집을 수 있는 아포리즘은 부분적인 진리만 담고 있으며 일단 뒤집어 놓고 보면 두 시각 중 어느 쪽도 참이 아닐 때도 있다. 단지 재치 있게 쓰였기 때문에 얼핏 참처럼 보였던것이다. - P258

서사적 허구는 누군가의 믿음을 얻으려고, 혹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고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작가는 <가능한 세계〉를 구축하고 독자 혹은 관객이 공모자가 되어 그게 진짜 세계인 것처럼 그 세계의 규칙 (말하는 동물, 마법의 소산,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행동 등)을 수용하고 살아 주기를 요구한다. - P296

물론 서사적 허구에서는 허구성의 신호들이 발신되어야 한다. 때때로 이 신호들은 제목이나 <소설>이라는 장르, 나아가 뒤표지의 소개 글 같은 <파라텍스트paratext>로 주어진다. 텍스트 내에서 가장 명백한 허구적 신호는 <옛날 옛날에 —가 있었다> 형식의 도입문이다. 하지만 상황 가운데서in medias res 서사를 시작한다든가, 대화로 시작한다든가, 일반적이지 않은 개인사에 빠르게 힘을 실어 준다든가 하는 다른 허구적 신호들이 있다. - P296

가짜 더블double을 만드는 것은 결과적으로 거짓 동일시 falsa identificazione에 가담한다. 역사적 상황t1에서 원작자 A는 원작 O를만들지만 모조자 C는 역사적 상황 t2에서 모조품 OC를 만든다. 그러나 C는 연습 삼아 혹은 순전히 재미로 OC를 만들 수도 있으므로 OC가 반드시 위조인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도 처음에는 순전히 수사학 연습 삼아 쓴 텍스트였을 것이다. 이 텍스트가 진짜 칙령 문서로 (선의에서든 악의에서든) 간주된 것은 나중 일이었을 뿐이다. 반면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O와 OC가 똑같다고 거짓 동일시를 수행하는 자 I의 의도다. 이럴 때만 OC는 가짜가 된다. 이 때문에 거짓 동일시는 삼원적 관계를 작동시킨다. - P303

<더블>은 물리적으로 <출현한 것>이면서, 물리적으로 출현한 다른 것의 속성을 똑같이 지닌다. 그 둘은 추상적인 <유형>에 따른 타당한 특징들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똑같은 모델의 의자 두 개는 서로에 대해서 더블이고, A4 용지 두 장도 서로에 대해 더블이다. 더블은 분별은 안 되지만 <교환 가능하기> 때문에 위조의 속임수가 아니다. 똑같은 A4 용지 두 장도 현미경으로 분석하면 상당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 P305

반면 같은 유형으로 출현한 것들 가운데 <하나>만 한 명 이상의 사용자에게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면 <가짜 더블>의 경우라고할 수 있다. 수집이라는 분야에서 지금은 몇 점 남지 않은 희귀 우표라든가 저자 서명이 들어 있는 고서(古書)에는 특별한 가치가 부여된다. 이 단계에서 더블의 위조는 흥미로워지고, 실제로 희귀 우표 위조는 심심찮게 일어난다. 일상적 교환에서 액면가가 동일한 지폐는 더블이므로 교환 가능하다. 하지만 법적인 면에서는 각각의 지폐는 고유한 일련번호가 있으므로—비록 그런 차이는몸값으로 지불된 돈이나 은행 강도가 훔쳐간 돈일 때만 중요하지만—동일하지 않다. - P306

진품이 없어지거나 아예 존재한 적이 없다면, 어쨌든 아무도 진품을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외전> 혹은 <위작>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OC가 진품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진품은 존재한 적이 없다. - P309

컬트 영화가 되려면 영화 자체에 엉성하고 서툴고 일관성 없는 면이 있어야한다. 완성도가 높아서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선호하는 관점에서다시 읽을 수 없는 영화—책도 마찬가지지만—는 기억 속에 그전체로서 어떤 관념 혹은 주요한 감정으로 남는다. 엉성한 영화만이 흩어진 이미지, 시각적 봉우리로 남는다. 그러한 영화는 하나의 중심적인 생각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 생각들을 보여 줄 것이다. 일관적인 <구성 철학>을 드러내기보다는 빼어난 불안정성 덕택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 P350

저자들은 즉흥적으로 짜임새를 만드느라 기존에 시험해 봤던 레퍼토리를 쥐어짠다. 시험해 봤던 것의 선택이 제한될 때의 결과물은 키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험해 봤던 것의 총체를 투입하면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비슷한 구조물이 나온다. 그런 구조물도 아찔하고 천재적이다.
「카사블랑카」는 모든 원형을 담고 있기 때문에, 배우들이 다른 작품에서 했던 연기를 답습하기 때문에, 그 안의 인물들이 <현실적 > 삶이 아니라 다른 영화들에서 상투적으로 그려 보였던 삶을 살기 때문에 컬트 영화다. - P354

모든 원형이 뻔뻔하게 난입할 때 호메로스적인 깊이에 이른다. 두 개의 클리셰는 웃긴다. 백 개의 클리셰는 감동적이다. 클리셰들이 자기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재회를 만끽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극치가 쾌락과 일맥상통하듯, 도착의 극치는 신비로운 에너지와 흡사하다. 진부함의 극치에서 숭고함이 얼핏 엿보인다.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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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전에 〈절대〉는 연결과 한계에 거리끼거나 얽매이지 않는 모든 것, 타자에게 좌우되지 않고 그 자체에 자신의 근거, 원인, 설명이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신과 아주 흡사한 것이다. 신은 <나는 존재하는 자다Ergo sum qui sum)라고 자기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가. 신에 비하면 나머지는 모두 〈우연적〉이다. 그 자체에 자기 원인이 없으며 어쩌다 존재하게 되었을지라도 당장 내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 일은 태양계에도, 혹은 우리 각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반드시 죽고 말 우연적 존재인 우리는 사라지지 않을 무엇, 다시 말해 절대적인 어떤 것과 이어지기를 갈구한다. - P125

요컨대 불은 너무 많은 것이고 물리적 현상을 넘어서서 상징이 된다. 그리고 모든 상징이 그렇듯 이 상징도 애매하고 다의적이며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불러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불의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개략적이고 느슨한 불의 기호학을 해보고 싶다. 우리는 불을 써서 온기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하는데, 이 불이 지녀 왔고 지금도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겠다는 얘기다. - P165

사물이 빛의 발산에서 태어난다면 신성한 빛의 발산과 닮은 불보다 아름다운 것은 지상에 달리 없을 것이다. 색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것이다. 이 아름다움은 질료의 어둠을 다스리는 형상에서 나오고, 색에 존재하는 무형의 빛, 즉 색의 형상적 이치에서 나온다. 그래서 불은 그 어떤 사물보다 그 자체로 아름답다. 불에는 형상의 비물질성이 있기 때문이다. 불은 모든 물체 중에서 가장 가볍다 못해 거의 물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불은 질료를 이루는 다른 원소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늘 순수하게 남는다. 반면 다른 원소들은 늘 불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들은 불을 받아들여 따뜻해질 수 있지만 불은 차가워질 수 없다. 오직 불만이 그 성질상 여러 색을 지닐 수 있다. 다른 사물들은 불을 통해서 색깔과 모양을 부여받고 불빛에서 멀어질수록 아름다움을 잃는다. - P169

그렇지만 역사 시험에서 히틀러는 코모 호수에서 총살당했다고 답한 학생을 떨어뜨린다고 해도, 문학 시험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알렉세이 카라마조프와 시베리아로 달아났다고 답한 학생도 떨어뜨리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
논리학과 기호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안나 카레니나는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실제 세계에서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는 내용을 쓴 것은 사실이다>를 관습적으로 줄여 쓴 문장이다. 따라서 톨스토이와 히틀러는 같은 세계에 속해 있지만 히틀러와 안나 카레니나는 같은 세계에 속해 있지 않다.
따라서 논리학적으로 말해 보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자살했다〉는 〈대언적de dicto> 참이고 <히틀러는 자살했다〉는 〈대물적de re〉 참이다. 혹은 좀 더 잘 말해 보자면,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는 표현의 〈기의〉와 관련 없이 기표하고만 관련이 있다. - P214

안나 카레니나에게 감동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사의 규약에 따라 그 인물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처럼 사는 척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가면(마치 서사의 특징에서 비롯된 신비주의 발작에 빠진 것처럼) 우리는 <그러는 척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그 세계에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다시 말해 그 세계에서 우리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우리 자신을 그 세계에 속한 인물 중에서 우리와 가장 공통점이 많은 사람에게 의탁하게 된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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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국의 지도력에 매달리는 것은 우주가 무한하기 때문이라고요. 자신들을 결합시켜 주는 상징이 없으면 외로움을 느낀다는 겁니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황제는 분명하게 정해진 장소가 됩니다. 사람들이 황제를 바라보며 〈봐, 저기 그분이 계신다. 그분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신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어쩌면 종교도 같은 역할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폐하」 - P178

경계의 바깥은 괜찮았다. 그리고 경계의 안쪽. 여기에 진정한 공포가 있었다. 그가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까? 적들은 분명히 그가 스스로를 파멸시키도록 그를 함정에 빠뜨리고 있었다. - P180

<달! 달! 달!>
좌절감이 그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다중의 무의식이 주는 압박, 그의 우주를 가로지르며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려고 하는 인류의 움직임을 느꼈다. 그들이 거대한 해일 같은 힘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인간사의 거대한 움직임을 느꼈다. 그것은 회오리바람이었고 조류였고 유전자의 흐름이었다. 금욕이라는 댐도, 성불능의 발작도, 저주도 그것을 멈추지 못했다.
이 커다란 움직임 속에서 무앗딥의 지하드는 눈을 한 번 깜박하는 것만큼도 되지 않았다. 이 흐름 속에서 헤엄치며 유전자를 거래하는 베네 게세리트도 그와 마찬가지로 흐름 속에 갇혀 있었다. 추락하는 달의 환영은 다른 전설들, 즉 겉으로 보기에는 영원해 보이는 별들조차 이지러지고 깜박거리며 죽어가는 우주의 다른 환영들과 반드시 견주어 생각해 보아야 했다.
그런 우주에서 달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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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은 뒷모습만 보인다. 일종의 무대연출에 따라서 숭고가 무대를 차지하고 인물은 무대 전면에 놓인다. 그는 장면 안에 있으면서도—관객의 입장에 있는 우리가 보기에는—장면 밖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우리는 그를 통해 보고, 그의 자리에서 보며, 그가 보는 것을 보기 때문에 장면과 거리를 두게 된다. 이로써 우리 자신도 그 인물처럼 대자연 앞에서는 미미한 존재임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를 위협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자연의 힘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렇다, 나는 유구한 세월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늘 이런 식으로 체험되었다고 생각한다. 뒤돌아서서, 우리에게 속하지 않고 어떻게든 소유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을 마주하면서 바로 이 거리에 미의 경험과 다른 종류의 정념(情念)을 구분하는 희미한 선이 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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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환영의 생생한 힘에 자신이 소진되는 것이 느껴졌다. 끔찍한 목적! 이 순간 그의 온 인생은 자리를 떠나는 새의 움직임 때문에 흔들린 나뭇가지와 같았다………. 그리고 그 새는 기회였다. 자유 의지였다.
〈난 예지력이라는 미끼에 굴복해 버렸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미끼에 굴복했기 때문에 길이 하나밖에 없는 삶에 자신이 고착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예지력이 미래를 알려주지 않은 게 아닐까? 어쩌면 예지력이 미래를 〈만든〉 건 아닐까? 그가 그 옛날의 각성 속에 스스로를 가둬버리고 미래의 거미줄에 자신을 노출시켜서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운 입을 벌리고 그를 향해 다가오는 미래의 거미줄에 희생자가 되어버린 걸까?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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