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과 책을 알파벳순이나 연대순으로 배열하는 대신 더 유의미하고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배열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었을까? 이 물음은 우리의 현재 관심사와 관련이 있다. 알파벳순과 연대순처럼 지적으로 중립적인 배열법을 포기하거나 넘어서야 공부를 위한 길잡이를 찾는 일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48
특정한 위대한 관념을 (익숙한 학문이나 지식의 갈래 그리고 위대한 관념이 연결되는 다른 방식을 나타내는) 다른 위대한 관념 아래에 묶는 이 모든 사례는 알파벳순 목록보다 우리에게 훨씬 의미가 있다. 이 사례들은 알파벳의 무미건조한 중립성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상하위나 중요도를 척도로 삼아 관념들을 위계적으로 배열할 만큼 중립성을 완전히 넘어서지도 않는다. - P156
‘지식을 조직하거나 지식의 갈래를 배열하고 연관 짓는 것은 본질적으로 철학의 과제다. 그것은 역사가나 과학자가 할 일이 아니다. 역사가나 과학자가 자신의 탐구 영역을 정의하고 그 영역을 다른 학문과 구분하려고 시도할 때, 그는 역사가나 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 P156
20세기에 지식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즉 지식의 부분을 어떻게 배열하고 연관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조금이라도 조명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철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아울러 그러한 시도는 현대의 문화적 다원주의와 지적 이설에 어느 정도 부응해야 한다. - P157
건강, 힘, 활력, 생명력이 신체의 자산인 것처럼 정보, 지식, 이해, 지혜는 정신의 자산(습득해서 정신을 완성하는 자산)이다. 다만 잠시만 생각해 보면 이 네 가지 자산이 동격이 아니라는 것,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금 나열한 순서에서는 뒤로 갈수록 가치가 높다. 즉 정보가 가장 가치가 낮고 지혜가 가장 가치가 높다. 이러한 견해는 앞선 시대와는 달리 남아도는 정보와 지식의 폭발을 칭송하는 우리 시대의 시류에 역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 이해가 넓어지거나 깊어진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세기에 지혜가 합당한 평가를 받는다고 감히 말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 P164
지혜는 정신의 네 자산 가운데 위계가 가장 높다. 지혜는 우리의 정신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통찰을 얻는 데 필요한 정보와 지식, 이해를 갖추고 있음을 전제한다. 문화적 다원주의와 지적 이설 때문에 20세기의 사람들은 인간 학식의 영역에서 위계질서를 용납하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정보가 맨 아래, 지혜가 맨 위, 중간에서 이해가 지식보다 위에 있는 가치의 오름차순을 생각하지 않기는 어렵다. 이 위계질서는 경험적·실험적 연구를 통해 얻는 역사적·과학적 지식의 가치와 역사적·과학적 지식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얻는 이해의 가치와 명백히 관련이 있다. - P167
‘알다’라는 낱말을 최대한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공부의 네 범주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1) 정보를 얻거나 받아들이는 것, 2) 지식을 획득하는 것, 3) 지식을 이해로 보완하는 것, 4) 지혜에 도달하는 것. - P167
철학이 역사와 실증적·경험적 과학보다 우위에 있는 까닭은 ‘그것’과 ‘무엇’에 대한 앎이라는 방식으로 지식을 더 많이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다. 역사와 과학에 비해 철학은 그러한 종류의 지식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철학이 제공하는 지식을 이용해 우리가 기술적 응용이나 발전이라는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철학적 지식에는 그러한 쓰임새가 없다. 철학적 지식으로는 다리를 건설할 수도, 케이크를 구울 수도 없다. 또한 그 지식은 무언가를 만드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철학이 우위에 있는 까닭은 이해와 지혜(‘이유’와 ‘원인‘에 대한 앎이라는 형식의 지식)를 선물할 뿐 아니라 그러한 지식을 사용해 우리의 삶과 사회에 방향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 지식은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규범적 지식이다. - P172
라틴어로 ‘scientia‘(스키엔티아)로 번역하는 ‘에피스테메‘는 개개인이 20세기에 급증한 모든 전문 분야가 아니라, 특정한 하나의 전문 분야에서 통달하거나 정통하는 모든 형식의 전문적 지식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존재한 학문의 모든 갈래에서 능숙한 전문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른바 지식 폭발의 세기라 불리는 20세기에는 아무도 만물박사, 즉 학식의 모든 전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라틴어로 ‘후마니타스‘로 옮기는 ‘파이데이아’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종합적 학식(앞에서 구분한 앎의 방식을 전부 포함하는 학식)을 뜻한다. 내가 지식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을 가리키기 위해 이들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하는 까닭은 학식을 과학과 인문학으로 나누는, 오늘날 만연한 그릇된 구분법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앞에서 나는 19세기 말부터 오용되기 시작한 ‘인문학‘이라는 낱말이 그때 이후로 학계에 두루 퍼졌다는 사실에 주목한 바있다. - P173
‘인문학’이나 ‘인문학적 학식‘은 지식의 특정한 갈래에서 전문성을 갖추는 것과 상반되는, 지식의 모든 부문에 대한 종합적 접근법을 의미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다양한 부문을 열거한 뒤에 남는 지식의 갈래나 부문을 인문학과 동일시하는 것은 인문학을 부정확하고 그릇된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 P174
박사 학위는 근본적인 관념을 종합적 또는 인문학적으로 탐구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 존재하는 어떤 학위도 그러한 종류의 성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 P176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종합인이면서 전문가여야 한다. 달리 말해, 인생의 초반과 후반에는 종합인이어야 하고, 중반에는 전문가여야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숙련된 전문가가 되는 과정에 필요한 길잡이는 교양 있는 종합인이나 종합적 교양을 함양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필요한 길잡이와 상당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학과들의 알파벳순 목록을 수록한 대학의 안내서는 학생들이 선택할 전문 과정인 전공과 부전공에 대해 설명해 준다. 즉 안내서는 무언가를 전공하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길잡이다. 대학에서 종합적인 교육과 흡사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지금의 안내서는 적절한 길잡이를 전혀 제공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내가 이 책으로 내놓고자 하는 방향이 필요하다. - P177
그렇다면 혼자 공부하는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학교 교육을 모두 끝마친 뒤에도 계속 공부하려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하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하면 지혜를 추구하는 평생공부를 가득 채울 만큼 풍성하고 실질적인 답변이기도 하다. 그 간단한 답변이란 이것이다. 읽고 토론하라! 결코 읽는 데서 그치지 마라. 읽기만 하고 같은 책을 읽은 다른 이들과 토론하지 않으면, 읽더라도 이해의 수준이 훨씬 떨어진다. 토론하지 않고 읽기만 해서는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훌륭하고 위대한 책들이 제공하는 알맹이 없이 토론만해서는 잡담으로 빠지거나 기껏해야 각자의 의견과 선입견을 교환하는 데 그치고 만다. - P207
달리 말하면, 종합적 교양인은 프로피디아의 ‘지식의 골자개요’(부록 1 참조)를 검토했을 때, 거기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신토피콘의 위대한 관념의 목록과 그 관념들의 부분집합에 대한 서술(146~157쪽 참조)을 검토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관념들 전체에 관해 능숙하게 지적인 질문을 하고 그 관념들이 제기하는 쟁점을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 P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