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살인 - 죽여야 사는 변호사
카르스텐 두세 지음, 박제헌 옮김 / 세계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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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살인

카르스텐 두세 | 세계사

내 목숨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내 곁에는 명상 선생이 있다.

p.168

책 제목부터가 특이했다. '명상과 살인이 어떻게 동시에 함께 있을 수 있지?'라는 호기심과 함께 내용이 궁금해질 찰나 '이토록 재미있는 살인이라니!' 문구가 눈에 들어왔고, 결국 그 문구는 내 호기심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어떻게 살인이 재미있다는 말인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생겨 패스했던 책이었다.

그랬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미리 책을 읽은 사람들의 재미있다는 리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냐, 재미있다'가 주였던 리뷰가 대부분이었기에 '내가 생각했던 그 살인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결국 그 의문이 호기심이 되어 서평단 신청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살인이 맞았다?!

단지 자기 계발 요소가 짙은 '명상'이 더해져 기존 소설에서 찾아보진 못한 독특한 설정이 주는 재미가 더해진 살인이었다.




사랑이 우리 사이에 놓인 연약한 식물이라면

가족이라는 화분에 분갈이를 하면서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게 분명했다.

p. 14

비요른 디멜은 시에서 가장 유명한 로펌 가운데 하나에 소속된 매우 성공한 형법 전문 변호사이다. 그의 의뢰인은 마약, 무기, 매춘업이 주요 수입원인 드라간으로 골칫덩어리이긴 하지만 큰돈을 벌어다 주는 의뢰인이기도 하다.

의뢰인이 원할 땐 언제나 호출이 가능한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정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고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를 시달리던 그가 의뢰인의 불법적인 일들을 합법적으로 바꾸는 일을 하던 어느 순간, 야심에 찬 법률가에서 조직범죄를 완벽하게 위장하는 변호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아내의 권유로 명상 센터를 찾아가게 된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랑하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증오한다는 그가 명상을 통해 나아질 수 있을까?




"계속 호흡하고 있나요"

“그건 42년째 하고 있습니다만.”

p.34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네, 다음 주에도 같은 시간에 올까요?”

“아니요, 다음 주에는 정각에 보도록 하죠.”

p.35

명상 첫날부터 지각한 비요른을 맞이하는 상담사 요쉬카 브라이트너,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특해 웃음을 유발하더니 그가 선물한 책 본인이 저자인 「추월 차선에서 감속하기 - 명상의 매력」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요소가 된다.

각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명상 훈련법이 나오고, 비요른은 일과 사생활을 지킬 수 없을 거란 불안감이 사로잡을 때, 건방지고 우둔한 인간을 상대할 때, 식사하는 보리스의 부정적인 관념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그와 음식에 관한 생각 등 현재 상황에 도움이 되는 구절을 떠올리며 적용해 나간다.

아니 자신의 차가 폭발이 된 상황에서조차 공황에 대비하는 방법을 찾아 명상 훈련을 하면 어쩌란 말인가 ㅋㅋㅋ 너무 잘 적용해가며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황당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거 그렇게 쓰라고 준 책이 아닐 텐데? 아니 명상을 이런 방향으로 적용해 나간다고?ㅋㅋㅋ



행복해지는 것이 항상 쉽지는 않다.

p.120

비요른이 아이와 완전한 시간을 보내기로 한 날 의뢰인이 큰 사고를 치고 만나자고 한순간, 명상의 법칙에 '소풍이 먼저. 그다음에 일'이라는 아이의 말이 더해지면서 '시간의 섬'과 '싱글 태스킹 철학'의 조합으로 의도치 않게 첫 살인이 일어났다.

그 첫 살인이 그려지는 장면은 솔직히 조금 거북했다. 첫 살인임에도 너무나 침착했던 그, 그리고 너무나 잔인했던 그였다. 그런데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위기를 헤쳐나가는 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명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읽는 이에게도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았다. 어느 순간 따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할까나?ㅋㅋㅋㅋ

정의 수호보다는 범죄자를 두둔하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그가 명상을 통해 변해가며 보이던 내면의 갈등과 이익만을 추구하던 기업의 이면 등이 살인과 명상이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잘 어울려져 웃음을 준 「명상 살인」이었다. 그는 완전 범죄를 이룰 수 있을까?

그 답은 「명상 살인」이후 발표된 속편 「명상 살인 2」와 얼마 전 출간된 「명상 살인 3」에서 확인할 수 있으려나?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누구도 이런 일에 연루되지 않는 게 좋지.”

“우리는 원하는 대로 인생을 선택하며 살 수 없어. 그저 살아갈 뿐이야.”

p.105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할 필요가 없다. 난 자유야.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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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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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 황금가지

인간의 뇌는 한계가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정신은 무한하단다.

저장 능력이 어마어마하고

상상력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지.

p.166

스티븐 킹의 최신 중편 소설집 「피가 흐르는 곳에」는 2020년 미국에서 첫 출간되었을 때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한 작품으로 넷플릭스, 벤 스틸러 등에게 수록작 4편 모두 바로 영상화 판권이 팔려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호러 킹'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이라는 듯 피가 낭자한 듯한 책 표지와 더해진 제목이 으스스함을 자아낸다. 공포와는 거리가 먼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온전히 띠지에 적힌 '그가 왜 이야기의 제왕인지 확인시켜주는 4편의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 그 띠지의 글귀보다 더 이 책을 잘 표현할 문장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정말 스티븐 킹의 매력적인 4편의 중편소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평범한 일상 속의 이야기인 듯 '이 이야기 한번 들어보지 않을래?'라며 편하게 다가오던 그 이야기들이 교묘하게 불안을 자극하며 읽는 나로 하여금 그 이면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상상이 주는 오싹함과 짜릿함이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생각했던 결말로 끝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단 말이냐?!ㅋㅋㅋ




헨리 소로는 말했지,

우리가 물건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물건이 우리를 소유하는 거라고.

집이 됐건 차가 됐건 텔레비전이 됐건 그런 근사한 전화기가 됐건,

뭔가 새로운 게 추가되면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게 늘어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제이콥 말리가 스쿠루지에게 한 말이 생각나는구나.

이것들이 내가 살아가면서 만든 족쇄였어.'

p.36

4편의 매력적인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 「피가 흐르는 곳에」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은퇴 후 작은 마을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해리건씨에게 크레이그가 책을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어나는 '해리건 씨의 이야기'이다.

해리건씨에게 매번 받던 복권에 당첨이 된 크레이그가 해리건 씨에게 제1세대 아이폰을 선물해 주게 되고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뉴스와 주식 등의 다양한 기능에 신문물을 거부하던 해리건씨도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노환으로 돌아가신 해리건 씨, 그에게 크레이그는 감사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가 아끼던 아이폰을 해리건 씨 시신에 몰래 넣는다.

장례식을 치른 날 천둥 치는 소리에 잠이 깬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건다. 쇳소리와 함께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그의 음성이 들려오고(무섭) 크레이그는 그가 살아난다면 자신에게 남긴 돈도 포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그런데 다음 날 해리건 씨에게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소오름!)

오늘은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 G부인이 했어. CCC aa 수신된 시각은 새벽 2시 40분이었다.

p.75

와~! 이때의 오싹함이란! '뭐야, 뭐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던 문자 메시지는 이날 이후에도 계속된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해리건 씨에게 전화를 걸게 된 크레이그와 그의 바람을 해리건 씨가 들어주듯 사건이 해결되는 기묘한 이야기였다. 오싹함뿐만 아니라 해리건 씨와 크레이그의 기묘한 우정 이야기가 임팩트 있게 다가왔다.

응답을 바랄 때만 부르짖으라. 그날 나는 응답을 바랐다.

p.125

21세기에 우리는 전화기를 통해 세상과 혼사를 맺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결혼 생활은 불행할지도 모른다.

p.133




한 사람이 죽으면 온 세상이 무너진다고 본다.

그 사람이 알았고 믿어온 세상이.

생각해 봐라.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구가 수십억 명인데,

그 수십억 명 각자의 안에 하나씩의 세상이 있어.

그들의 정신으로 탄생시킨 지구가.

p.166

4편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두 번째 이야기 '척의 일생'총 3막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역순(3-2-1)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3막에서 대규모 지진, 싱크홀, 화산 등 지구의 종말을 보는 듯한 재앙 속에서 알 수 없는 광고가 계속 뜬다. '찰스 크란츠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p.139)' 그가 누구인지 서로에게 물어보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3막에서 궁금증을 일으켰던 척이 2막에 본격적으로 등장해 그에 대해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고, 1막에선 다락방에 얽힌 미신과 함께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을 앞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세상을 품고 있다며 한 사람의 죽음을 하늘에서 별빛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다 나중에는 수백 개씩 그리고 결국 은하수가 어둠 속으로 말려 들어가 암흑이 되는, 세상이 종말 하는 것으로 표현한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힘든 건 문가 하면 말이다, 처키. 기다리는 거야.

이제는 그의 기다림이 시작될 것이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까?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저 남자는 몇 살일까?

p.219

'과연 나였어도 그처럼 그 기다림을 없었던 것처럼 마주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우주로 표현된 나만의 세상을 생각해 보게 했던 이 이야기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마음을 두드려 온다.

얼굴마다 헤어라인이 다르고, 눈과 입이 다르고,

선이 다르고, 연령대가 다르다.

모두 기본 틀은 같은데 다른 모델이다.

모두 온도스키다.

p.338

틀은 같은데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던 '이방인'을 쫓던 세 번째 이야기 '피가 흐르는 곳에', 내부의 악과 외부의 악을 하나의 새로 표현하며 여기저기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총기를 난사하는 사람 머릿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히틀러, 폴 포트 등 그들의 머릿속으로 날아 들어가 살인이 자행되는 그 새를 잡고 싶다던 홀리가 기억에 남는다.

사건이 잘 마무리된 가운데 계속 진행되던 보고식 이야기에 설마... 하는 긴장감이 더해지면서 마지막 헨리 삼촌이 홀리에게 미소 지으며 남기던 마지막 말 "안녕, 홀리."에선 오싹함이 느껴졌다. 왜지?? 사건이 잘 마무리되었는데?? 왜??

"나는 끝까지 한번 가봐야겠어.

그거면 돼. 그게 전부야."

p.491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 '쥐'는 장편 소설을 쓸 때마다 사건이 생겨 포기하길 여러 번이었던 드류가 자신의 도움으로 살아난 쥐로부터 장편소설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신 드류가 아끼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조건이 걸린 제안을 받게 되는 이야기이다. 쥐가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꿈으로 치부해버린 그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만약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각 4편의 이야기를 통해 스티븐 킹만이 보여주는 매력적인 세계에 푹 빠져 '어쩜 이런 생각을?'이란 말이 절로 나왔던 그만이 보여주던 상상력에 감탄하며 읽었던 「피가 흐르는 곳에」였다. 모든 이야기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니 읽는 독자마다 떠올리는 그림이 다를 거라는 생각에 왜 내가 다 즐거운지 모를 일이다.

정말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이었다. 공포물이 아님에도 왜 오싹함이 느껴지는지 모를 이야기들, 정말 상상력이 주는 힘이란 놀랍고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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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역사가가 찾은 16가지 단서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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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로는 기차에서 만난 캐서린 그레이가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책이 왜 잘 팔릴까요?"라고 묻는다. 캐서린은 "사람들에게 흥분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겠죠"라고 대답한다.
p.31

초등학생 때 아람단을 한 적이 있었다. 항상 아람단과 걸스카우트는 비교가 되었던 그 걸스카우트와 보이스카우트를 보어전쟁으로 국민영웅으로 떠오른 로버트 베이든 파월이 향후 영제국을 지켜낼 인재 양성이 절실하다고 판단해 만들어 낸 것이라니 그저 신기하다!

그가 쓴 스카우트 매뉴얼에 영국 남성성의 핵심을 설파하면서 이상적인 영국인으로 탐정 셜록 홈스를 꼽았다고 한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셜록 홈스와는 전혀 다른 탐정이 나타난다. 바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탐정 에르퀼 푸아로이다.

추리소설의 열렬한 독자였다는 애거서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치열하게 공부했고, 그녀만의 탐정 푸아로와 여성 탐정 마플을 탄생시킨다. 외모부터가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탐정과 다른 푸아로 그는 어떤 방식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지 궁금하다.

역사가가 보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보면서 그 시대의 일어난 일들과 흐름도 알 수 있으니 더 재미있는 거 같다! 역시 역사가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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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1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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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경기 대회에서 카이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선보였다는 코끼리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마리우스의 말에 아일리아가 맞장구치며 코끼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야기만 들어도 정말 재미있었을 거 같다. 뒷발로 서서 걷고 네 발로 춤도 추고 의자에 앉아 코로 음식을 집어먹는 코끼리라니! 현실로도 가능하려나??

뇌졸중으로 아직 흔적이 남아있는 마리우스,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율리아를 보며 나 또한 함께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런데 술라와 마리우스의 관계가 변했다. 둘의 관계가 조금씩 더 악화가 되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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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0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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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코맥 매카시 | 민음사

영혼의 고아는 삶이라는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기어이 영원히 돌아 나올 길 없는

고대의 시선이라는 벽 너머로 가 버린 듯했다.

p.13

돈 드릴로, 토마스 핀천, 필립 로스와 함께 코맥 매카시는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라고 한다. 서부 문학의 셰익스피어로도 불리는 그의 작품을 이번에 국경 삼부작 개정판 중 그 두 번째 이야기 「국경을 넘어」로 만나보게 되었다.

무엇인가 배제된듯한 퉁명스러운 인물들의 대화는 따옴표가 생략된 상태에서 오고 간다. 그래서인지 그가 묘사하는 풍경들과 함께 어우러져 더 잔잔하고 고요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느낌과 달리 한 소년이 경험해야 했던 처절한 모험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잔혹했다.

혹여나 이 소년이 잘못될까 봐 불안한 맘에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이 더 이상 없길 바라는 나의 마음을 비웃듯 더 큰 절망이 그에게 안겨진다. 그럴 때마다 울컥함이 계속 자리 잡아갔고, 저자 코맥 매카시가 이 소년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굳이 주인공을 어린 나이로 설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증이 커져갔다. 그는 끝내 희망을 얻을 수 있었을까?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선택이 아닌, 본인의 자의에 의한 선택으로 인한 결과였기에 더 잔혹했던 그 소년의 이야기, 안타까움이 넘쳐흘렀던 「국경을 넘어」였다. 그리고 여전히 ‘왜?’라는 의문이 계속 메아리친다. 왜? 왜? 왜?...




낯선 땅에 추방당한 자. 집 없는 자, 쫓기는 자. 지친 자.

p.421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미성년자에 속하는 열여섯 살 카우보이 빌리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멕시코로부터 넘어온 늑대를 잡기 위해 덫을 놓다 늑대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되고, 급기야 덫에 걸린 늑대를 멕시코로 돌려보내려고 혼자 국경을 넘어간다. (이때 설마를 얼마나 외쳤던가. 왜 아버지한테 이야기하지 않은 걸까? 왜?)

늑대를 데리고 멕시코 땅에 잘 도착했으나 그곳 목장 사람들이 소년에게 멕시코에 침입한 거라고 이야기하며 늑대를 빼앗아간다. 소년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자 했던 늑대는 투견장으로 보내지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늑대를 지켜봐야만 했던 소년은 결국 늑대를 총을 쏴 제 손으로 죽인다. 비싼 값을 치르고 늑대를 묻어 준 그는 다시 국경을 넘어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더 처참한 현실이었다. (저자님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ᅲᅲ)

인디언의 침입으로 부모님이 살해당하고 이웃집에 살아남은 남동생 보이드를 데리고 빌리는 다시 국경을 넘는다. 인디언이 훔쳐 간 말을 되찾기 위해...

그는 여행을 하며 쓰러져가는 교회에서 사는 남자, 전쟁 중에 눈을 잃은 남자, 집시 등 다양한 어른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소년에게 전하는 충고로부터 답을 구하지 못 했던 걸까? 몇 번을 다시 국경을 건너갔으며 국경을 건널 때마다 더 가혹한 세상을 만났고 소중한 것을 하나씩 잃어갔다.

우에르파노(고아)라 할지라도 방랑을 멈추고 정착할 곳을 구해야 한다고,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다가는 열정에 뿌리박게 될 것이며, 그러한 열정은 소년을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서도 멀어지게 만들 것이라고 노인은 충고했다. 장소가 사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이 장소를 품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장소를 알기 위해서는 그곳에 가서 그곳 라마들의 마음을 보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지만 말고,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p.190

이 나라의 코리도를 유심히 들으렴. 그럼 알게 될 거야. 너의 삶에서 무엇을 대가로 치렀는지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앞에 무엇이 높여 있는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지. 너는 보게 될 거야. 길의 모양은 길이야. 길은 다른 길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만의 유일한 길이지. 길에서 시작된 모든 여행은 언젠가는 끝이 나. 말을 찾든 아니든.

p,328

세상 모든 것 중 유일하게 확실한 한 가지는

세상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는 거라고.

다가올 전쟁이든. 그 무엇이든.

p.493~494

주인공이 미성년자였기에 그의 모험이 더 불안했고 더 무모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더 처참하게 다가왔던 이야기, 더 절망적으로 다가와 끝내는 울컥함만이 남았다.

국경 삼부작은 모두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이지만 첫 번째 ‘모두 다 예쁜 말들’과 두 번째 ‘국경을 넘어’의 인물이 세 번째인 ‘평원의 도시들’에서 만나는 설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의 국경 삼부작을 다 읽고 나면 저자가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지금 나로서는 그 의미를 찾지 못해 의문 가득한 「국경을 넘어」였지만 코맥 매카시의 필력에 흠뻑 빠져 술술 읽히던 책이기도 했다. 언젠가 ‘왜?’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길 바라본다.

앞으로 세계는 크게 변할 거야. 그거 알고 있나?

알아요. 지금도 세계는 크게 변하고 있죠.

p.595

국경을 넘어 개정판, 인상 깊은 글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타라우마라족은 이곳에서 천 년 넘게 물을 길었고, 세상에서 볼만한 것은 이미 대부분 이곳을 지나쳐 간 터였다. 갑옷을 입은 스페인 사람들, 사냥꾼들, 덫사냥꾼들, 귀족들, 귀족의 여인들, 노예들, 도망자들, 군대들, 혁명가들, 죽은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그들이 본 사람들은 모두 후세에게 이야기로 전해졌고, 이야기로 전해진 이들은 모두 후세에게 기억되고 있었다.

p.270

인디언들은 칠흑처럼 까맸고, 침묵으로써 일시적이고도 불확실하며 더없이 의심스러운 세계에 대한 속내를 드러냈다. 위험한 휴전 상태라도 관찰하듯 신중한 집중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들은 희망도 미래도 없이 경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확실한 얼음 위의 사람들처럼.

p.271

산산조각 나 다시는 되돌려놓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p.391~392

세계에는 이름이 없지. ……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이름을 붙이지. 하지만 우리는 이미 길을 잃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는 거라네. 세계는 결코 잃을 수 없어. 우리가 바로 세계야. 이름과 좌표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름이기에 그걸로는 우리를 구할 수 없어. 우리의 길을 찾아 줄 수도 없고.

p.515

교회 담 너머에서 밤은 철갑상어의 비늘과 깃털로 덮인 천 년 공포를 품고 있었다. 전쟁과 고문과 절망의 가장 극심한 피해자인 아이들 위로 그 공포가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늙은 여인은 이 땅에 계속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 결국 이 잔혹한 역사는 씨앗 염주를 늙은 손으로 움킨 채 몸을 숙여 중얼거리는 이 자그마한 여인으로 헤아려질지니. 단호하고 엄숙하며 무자비한. 바로 그러한 하느님 앞에서.

p.55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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